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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 13:48 역문연 광장

‘근대의 교차로, 제물포에서 인천으로’ 소감문

 

황윤찬 (신성고역사동아리 등불)

 

     동아리 활동 중 역사탐방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장소가 인천이라는 부분에서 마음이 가게 되었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사시는 지역이 인천이었고 그러다보니 다른 장소보다 이끌리는 느낌과 익숙한 느낌이 들어 참여를 결정하게 되었다.

     우리의 인천탐방은 4월 30일 안양역에서 1차 집결을 하고 그 곳에서 역사탐방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인천 개항장은 나에게 단지 ‘개화기의 산물’ 이라는 내용뿐이었다. 이번 역사탐방은 인천역에서 전체 집결을 하게 되었다. 아이부터 어른, 노인까지 여러 세대가 함께하는 탐방이었다.

 

     인천은 제물포에 개항장이 생기면서 근대도시로써의 인천이 형성되었다. 인천에 개항장이 생기면서 외국인들이 유입되었고, 그 외국인들의 거주와 불평등조약에 대한 결과로 개항장 주변의 지역을 각각의 국적에 따라 나누게 되는데 그것을 조계, 거류지라고 부르게 된다. 조계 안에서는 외국인들의 치외법권이 인정되었고, 원래의 거주민들은 조계 밖, 그러니까 외곽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조계의 설정으로 인해 청일조계지경계계단 이라는 독특한 현상이 생기게 되는데 이 계단은 좌우가 완벽히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계단의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면 왼쪽은 청, 중국의 주택과 석등의 형태를 보이고, 오른쪽은 일본의 주택과 석등의 형태를 보인다.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인지 가로등 또한 좌우의 형태가 다른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또 인천 제물포에는 차이나타운이 있다.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있었던 것은 더욱 전이지만 차이나타운의 상징인 대문, 패루는 20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차이나타운에 세워질 수 있었다. 화교들은 1882년 임오군란 때에 중국의 군대를 따라 들어오게 되었고 화교들의 유입은 늘어만 갔다. 우리나라의 화교들 대다수는 중국의 광둥출신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산둥지방의 화교들이 늘어났다. 이유는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이후 청국인은 패전민이 되었고 광둥출신 사람들은 인천을 떠나게 되었고 그 조계지를 일본인들이 마구잡이로 이용하는 잡거지가 되었다. 그런데 1897년 산둥지역의 자연재해 등의 원인이 맞물리며 산둥 지역민들이 한국으로 대거 입주하게 되었고, 그들이 현재의 화교들이다. 화교의 수는 현재 점차 줄어가고 있다. 현재 한국의 화교 수는 약 2만 2천명인데, 1972년을 계기로 줄어가고 있다. 화교들은 우리가 그들을 ‘차별 때문이다.’ 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 이유는 이승만 정권의 여러 정책들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창고봉쇄령’으로 화교 무역상들에게 타격을 주었고 통화개혁으로 현금다량보유자였던 화교들에게 또 다시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이에 화교들은 우리나라를 떠나게 되었는데, 1961년 제정된 토지법은 화교들에게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들을 모두 역사탐방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점이 있는데 마지막 장소였던 인천 동구의 배다리 부근이다. 배다리 부근은 대규모 공장지대처럼 보이는데, 일본의 자본가들이 세웠던 공장들이 모인 것이다. 이곳에는 노동 집약적 산업인 성냥공장이 즐비했는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력을 착취했고 이들이 파업을 하게 되고, 이것이 인천 노동운동의 시작이었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우리나라의 개발우선풍조로 인하여 이러한 근대유산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가 근대유산에도 관심을 가지고 유산보존에 힘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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