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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광장

[인천 개항장 답사 후기] 근대의 교차로, 제물포에서 인천으로 소감문 (김성준)

'근대의 교차로, 제물포에서 인천으로' 소감문
 

김성준 (신성고역사동아리 등불)

 

    아침 8시 안양역에 도착해서 선생님과 그리고 우리 동아리친구들이 모여 인천으로 출발했다. 이전까지 인천에 가본적은 없었지만 사회, 역사책에서 자주 언급되던 도시여서 내멋대로 인천을 상상하며 출발했다.

 

    몇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10시 쯤에 인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보인 것은 한국철도 탄생역이라고 쓰여있는 열차모양의 특이한 기념탑 이였다 나는 저런 기념탑이 인천역 바로 입구 앞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천역 앞에서 답사를 같이 하시는 분들이 오시고 답사를 시작할 때 답사를 진행하는 선생님이 저 기념탑이 거짓이고 사실 인천역까지 철도가 안왔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기념물까지 세우면서 한국철도의 탄생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뒤통수 맞은 기분으로 건너편 차이나타운의 패루를 향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차이나타운의 자장면 박물관이다. 구 공화춘이 있었던 곳이고 자장면의 탄생지라 한다. 공화춘이란 이름은 중화민국을 세운 것을 축하하는 의미라 한다. 그리고 자장면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중국의 된장을 기름에 볶아 국수 위에 얹어 먹는 음식인 작장면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물을 풀게 된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그리고 차이나타운 한가운데에 있는 공화춘은 가짜라고 한다.

 

    자장면 박물관 다음으로 우리는 인천화교중산중학교에 갔다. 인천화교중산중학교로 가는 중간에 나는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인천화교중산중학교안에 대만국기가 펄럭이는 것이였다. 처음에든 의문은 “차이나타운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이 세운건가?”였다. 중학교의 국기 뿐 만 아니라 경찰서도 대만국기의 상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답사선생님께 물어보니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면서 차이나타운의 여러 가지가 중국에게 넘어갔는데 그렇지 않은곳중에 하나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화교들에 대한 우리의 차별도 이야기 해주셨다. 몇 년마다 체류허가를 받아야하고 재산축적과 직업선택의 자유도 제한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조상이 중국인이라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화교중산중학교를 지나 조금만 더걸으니 청일조계지경계계단이 보였다. 정말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정확히 계단을 기준으로 좌우의 석등 가로등 조각이 달랐고. 뒤를 돌아 건물을 보니 왼쪽은 조금 가파른 느낌의 오른쪽은 아까 지났던 길을 따라 왼쪽과는 다른 느낌의 건물들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왼쪽이 일본식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이 일본식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답사선생님의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저것도 지어낸 가짜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조계지로 나누어져 여러 문화가 도시 하나에 축소된 인천을 기대했지만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옛날에는 물론 진짜였겠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그래도 답사선생님이 저것은 진짜 일본건물이라 알려주신 입구에 나가사키 카스테라라고 적혀있던 건물이 나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다음으로 우리는 기대하던 점심을 먹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답사를 하시는 분들의 자기소개를 들을수있었다. 베트남을 연구하시는분, 중학교 역사선생님, 극장을 연구하시는 분, 저 멀리 독일에서 오신분,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온 부부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물론 우리 신성고 역사동아리 등불도 한 명 한 명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100년 전 맛의 자장면이 나오고 맛을 봤을대 조금 미묘했다. 뭔가 맛이 밍밍했고 우리가 흔히 아는 춘장의 맛이 아니었다.

     100년 전 자장의 맛이 이렇구나 하고 몸소 체험한 다음 청일조계지경계계단을 오르고 삼국지관련 글과 그림이 있는 도로와 벚꽃이 떨어진 길을 올라가 자유공원에 도착했다.

 

    자유공원은 한국최초의 공원으로 처음 명칭은 각국 공원이었다고 한다. 자유공원은 태어난 이후로 여러 번 이름이 그 용도에 따라 바뀌었던 것 같다. 특히 일본 때는 만국공원을 천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날의 자유공원은 매우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월미도의 모습도 보였다. 거기에다가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매우 기분이 좋았다.

    설명을 모두 듣고 우리는 맥아더 장군동상으로 이동했다. 맥아더 장군상은 우리나라가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맥아더 장군동상 의 이전 혹은 철거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맥아더 동상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다름 아닌 어떤 할아버지었다. 그 할아버지는 맥아더 동상 앞에 서서 맥아더장군에게 찬사를 보내시고 있으셨다. 그때 그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장군님 이렇게 장군님을 다시 뵙게 되어서 감개무량합니다. 저는 장군님이 안계셨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안겨주신 장군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아무래도 맥아더 장군은 일부 할아버지들에게 영웅이 된 것 같다.

 

     그다음은 제물포 구락부 이나 마침 우리가 갔을 때 점심시간인 모양이라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먼저 들렀다. 그곳은 옛날에 일본인 상인이 지은 건물로 해방 이후에는 미군의 파티장이 된 모양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우리는 다시 제물포 구락부로 향했다. 구락부는 사교클럽으로 인천에 있던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놀던 곳이라고 한다. 합병이후에는 일본 군인회라는 곳이 쓰고 그 이후에는 일본 부인회가 구락부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구락부의 내부는 술집, 바 같았다. 고급스런 나무들로 이루어진 가구들과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도록 길게 늘어진 의자들 그리고 나무바닥이 마치 내가 그시대 사람처럼 느끼게 하였고 그 착각은 벽에 걸린 tv와 전시된 종이 모형들로인해 깨지게 된다.

    우리는 그다음 중구청으로 향했다. 중구청에 도착한 우리들은 중구청 맞은편에 일자로 쭉 나있는 정돈된 도로를 볼수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캔음료를 마시고 조금 쉬었다.

     그 다음 우리는 인천 최대 번화가였던 혼마치 일대에 갔다. 그곳에는 18은행과 58은행이 있었다고 한다. 답사 선생님이 18은행에 들어가면 나가사키 58은행에 들어가면 오사카인 이라 할 만큼 18은행과 58은행이 지역적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있는 개항박물관에도 들렀는데 그곳에서는 기차, 우표, 타자기, 우편함, 기차표, 지도, 동전, 등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서양인이 안경을 쓰로 조선식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이름이 묄렌도르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은 국민은행으로 갔다. 그곳이 옛날에 미두취인소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미두취인소는 지금으로 치면 증권거래소라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엔 인천중동우체국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 답사 선생님의 경양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 건너편에 인천중동우체국이 있었고 옛날에도 저곳에 우체국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답동성당으로 향했다. 답동성당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설명 들었던 것은 답동성당의 종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본이 전쟁에 쓸 쇠를 구하려고 교회의 종을 공출해 가려고 했다는데 그것을 어떤 신부님이 종을 떼어내 다른 성당에 붙이는 것으로 지켰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우리는 조금 휴식을 취했다. 답동성당까지 가는데 너무 오래 걸리고 멀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답동성당까지 멀긴 했지만 중간 중간 역사에 박식한 남자분이 여러 가지 알려주셔서 심심하진 않았다.

    그 다음 우리는 인천 부윤관사에 갔다. 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인천 시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저기에서 사는 사람도 나름대로 힘들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부윤관사 다음으로 우리는 애관극장에 갔다. 애관극장은 조선인 최초의 극장이라고 한다. 극장도 극장이지만 사업이나 예방접종, 여러 가지 모임들이 여기서 이뤄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중에 극장을 연구하시는 분이 계셔서 그 분의 셜명도 들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배다리마을에 갔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만조 때 바다가 불어나면 일시적으로 배를 엮어 건넜다. 그래서 배다리 마을 이라고 한다. 배다리 일대는 일본인과 청나라인 그리고 기타 외국인들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의 주거지라고 한다. 그리고 개항장의 변두리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가장 발달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공·사립 초등교육기관이 여기에 세워졌으며 노동력도 풍부하여 양조업이나 공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우리는 배다리 마을에 있는 고양이 마크가 그려진 스페이스빔이라는 곳에 갔다. 그곳에 가니 어떤 밴드 같은 사람들이 먼저 있었다. 하지만 곧 그곳의 대표님이 직접 나와 주셔서 직접 설명을 해주셨다. 현재의 배다리는 신도시의 건설로 이미 구도심이 되었고, 현재는 신도시를 잇고 배다리를 두 토막 내는 도로건설문제로 도로건설 무효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하셨다.

    대표님의 설명을 다 듣고 이것으로 답사가 끝이 났다. 답사 뒤풀이를 막걸리 집으로 간다고 했으나 우리 동아리 학생들은 아직 청소년이라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렇게 답사팀과 헤어지고 우리는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인천을 걸으며 140년 전 인천을 함께 걸은 것 같았다. 답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현재의 모습이 어떻게 구성이 되어 왔는지 과거의 모습이 현재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인천이 100년 전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의 조화와 인천속의 일본인과 중국인 그리고 여러 나라의 생활의 어우러짐이 드러내지 않는 은은한 흔적들로 표현된 멋진 공간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