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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광장

[연구소 30주년 나아가며 함께하기] 국정화 반대국면으로부터의 출발 (권혁은,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본 글은 연구소 회보 59호 창립 30주년 기념호에 실린 기사 중 하나입니다. 

연구소 회보는 연구소 후원회원들을 대상으로 배포되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의 글들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합니다. 


 

국정화 반대국면으로부터의 출발

권혁은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길지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강사를 시작한지 2년이 조금 넘었지만 솔직히 ‘역사교육’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늘 강의에 대해 고민하지만, ‘역사교육’이란 대표어는 나 같이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시간강사나 주로 교육을 받는 역할인 대학원생보다 교수나 역사교사 같은 정규직들에게 더 가까운 단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많은 이름 없는 연구자들이 아마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그래서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관계’라는 주제로 글을 청탁받았을 때 막막함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고민 끝에 주제가 기획된 계기라고 짐작되는 작년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관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

 

“미국 역사 교육에서 조지 워싱턴이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만 묘사되거나 아예 초대 대통령으로도 언급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시에라 클럽이나 전미여성협회의 창립이 기억해야 할 사건으로 기록되지만 미 의회의 첫 번째 소집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보라. 맥카시와 매카시즘이 19번 언급되었고, 남북전쟁 이전 노예를 구출했던 흑인 해리엇 텁먼이 6번 언급된 반면 벨, 에디슨, 아인슈타인, 라이트 형제는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1994년 미국 역사 논쟁을 촉발시켰던 린 체니의 월스트리트 유명한 기고문 중 한 구절이다. 1991년 부시 정부가 공표한 국가교육목표를 위해 당시 체니 부통령 부인인 린 체니가 의장을 맡았던 미국인문학기금은 ‘미국 역사표준서 프로젝트(National History Standards Project)'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였다. 프로젝트 추진을 위해 29명의 평의원(9개 대형학회장, 22명의 행정가, 역사가, 교사로 구성), 2개의 역사교사 태스크포스, 9개의 포커스 그룹, 31개의 학회로 구성된 전국 포럼이 구성되었고, 전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를 아우른 광범위한 토론을 거쳐 1994년 가을 표준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표준서에는 보스턴 출신 백인남성이 아닌, 노동자, 여성, 유색인, 게이와 레즈비언 등 기존에는 역사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1980년대 이래 미국 역사학계의 학문적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언론에서 숫자 게임(number game)'이라고 불렀던 우파들의 공격은 그 직후에 시작되었다. 기금을 대고 평의원 구성에도 관여했던 린 체니가 갑자기 표준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표준서에 참여했던 전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고, 여론은 흔들렸다. 결국 상원에서 표준서 채택 반대 결의안을 99대 1로 가결하고, 표준서가 약간 수정되면서 표준서를 공격했던 세력들이 정치적으로는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각주:1]

  
작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를 촉발시킨 세력이 미국의 표준서 논쟁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워낙 유명한 논쟁이기도 하고 어떤 주제와 어떤 인물이 몇 번 나왔는가를 단순하게 비교하는 논리나, 표준서가 교과서가 아닌 가이드라인이었다는 사실이나 표준서가 만들어진 과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의 종말’, ‘우울과 어두움으로 가득한 역사’라든지 ‘미국 역사가 납치되었다’와 같이 자극적인 문구로 공격하는 양태가 국정화 사태 당시의 모습과 거의 유사했기 때문이다. 국정화 전후로 조선일보나 뉴데일리 같은 보수 매체에서 표준서 논쟁을 ‘호헌세력의 승리’라고 보도하기도 하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문화체육공보부의 발주를 받아 2013년 12월에 ‘주요 선진국 역사논쟁 사례연구 결과보고서’라는 보고서를 발간했고 그 안에 표준서 논쟁이 실려 있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표준서가 교과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이례적으로 상원의 개입을 이끌어냈다는 점과 ‘표준서가 어쨌든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싸움은 거는 쪽이 정치적으로 이기기 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아마 논쟁 구도를 수입한 측도 그 점에 착안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위의 사례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정치적으로 기획된 듯한 표준서 논쟁이 미국 역사학계의 판도를 바꾸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후 역사학계가 논쟁을 통해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관계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키게 되었다고 자체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표준서 개발과정에 참여했던 UCLA 사학과 캐롤 글럭은 논쟁 과정에서 “표준서를 바꿀 수는 있지만 표준서가 반영하는 미국사회의 변화를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표준서 제작 책임자였던 개리 내쉬 또한 1997년 여름 표준서 논쟁을 회고하는 글을 통해 표준서를 공격했던 세력이 단기적으로는 승리했지만 표준서가 현 세대 역사학계의 고민을 집대성한 것이고, 아프리카, 유럽, 남미, 중동사를 세계적 틀로 풍부하게 구성한 유일한 교재이기 때문에 역사 커리큘럼 개발자와 교사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금씩 사용되고 있다고 평가했다.[각주:2]  

우리의 경우 문제가 됐던 것이 교과서였고 국정화라는 유례없는 조치로 퇴행하였으며, 중고교과정이 획일적 평가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조금 더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위의 상황을 비춰보자면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은 역사학 그 자체의 발전과 역사학과 역사교육에 관한 논의의 진전이 아닐까.

 

지난 2월 초등학교 6학년 역사교과서가 새롭게 배포된 이후 일부 진보매체들은 교과서가 이승만을 14번 다루고 박정희를 12번 다루는 반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은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각주:3] 그러나 누구를 몇 번 다루고 누구를 몇 번 다루지 않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학 자체의 발전이나 역사학과 역사교육에 관한 논의의 진전과는 관련이 없는, ‘숫자 게임’을 거꾸로 뒤집는 것에 불과하다. 국정화 국면을 우리가 돌파해나가는 방법은 숫자 게임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국정 대 검인정 구도 속에서 검인정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사회적으로 역사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거의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역사의 다양성’이라는 구호가 이례적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는 점이 지난 국정화 반대국면이 낳은 소기의 성과라고 생각된다. 특히나 ‘역사의 다양성’이라는 구호에 어떤 역사학이 들어가는가까지 논의가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기존의 검인정 교과서가 포괄하지 못하는 역사학까지 들어갈 것이며 그 저변은 역사적 고민을 발굴함으로써 넓어질 것이다. 

 

 

아마 국정교과서가 나오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앞으로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역사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과 역사에 권력이 개입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국정화 찬성론자들은 교과서와 기존 학계가 ‘민중사관’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공격했지만 사실 그게 민중사관이든, 다문화주의사관이든, 포스트모던사관이든 문제 삼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흔히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역사인식이 아니라면 정치적으로 언제든 유용한 도구로 변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정교과서가 언제든 실패할 것이라고 방관하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모든 게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기왕에 주장했던 ‘역사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를 넓히고 역사교육의 목표를 질문해보는 게 어떨까. 역사의 국가화와 획일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역사학이 하나로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역사학계 스스로 증명해야 하며 역사교육의 목표에 관한 논의를 학교 밖에서, 대중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국정화 사태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출발선이었으면 좋겠다.

  1. 표준역사서 논쟁에 관해서는 김기봉, 2011 「미국의 역사전쟁에 비춰보는 한국사교과서 논쟁」, 『철학과 현실』 9월호 참조. [본문으로]
  2. Gary Nash, "Reflections on the National History Standards" National Forum(Summer 1997) [본문으로]
  3. 「초등 교과서, 이승만 14번·박정희 12번·김대중은 0번」, 『미디어오늘』 2016년 2월 28일 ; 「국정 역사교과서 예고편 보여준 초등 교과서」, 『한겨레』, 2016년 3월 1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