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6 13:04 역문연 광장

45 역사문제연구소 토론마당

 

<'정치적 올바름' 혐오 사이에  ‘민주시민’의 역사인식>


 

발표 : 정무용(역사문제연구소)

토론 : 최은혜(인문학협동조합), 이혜인(성균관대학교)

사회 : 김수향(역사문제연구소)

 

일시 : 2017 11 8 수요일 오후 7

장소 : 역사문제연구소 5 관지헌 (제기동역 1 출구도보 3)

 

*기획취지

2016 가을부터 시작된 ‘촛불’ 정국이 대선  종결되었음에도많은 논평자들이 지적하듯 우리는 여전히 혐오 만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각종 혐오 발언들 한편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혹자는 이를 두고 ‘정치적 올바름’이 유발하는 혐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시민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이 보인다‘민주시민’이라면 모름지기 가져야  덕목인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보이는 태도에서 말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혐오’ 시대에 역사인식은 어떠한 잣대가 되어가고 있는가우리는아니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일까아니면 적극적으로 맞서 ‘키배’를 떠야 하는 것일까

 

다른 방법은 무엇일까물론 결론은 없겠지만여러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현상에 대한 진단과 대처 방법을 듣고 지혜를 모으면 뭔가 답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한 기대와 함께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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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05 12:17 역문연 광장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이 이번 달 반모임을 다음과 같은 공개 집담회로 진행합니다.

    내용은 아래를 참고해주세요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의 집담회 -

     

    나의 삶과 노동운동

     

    많은 사람들이 개혁과 변화를 말하고 있는 요즘, 노동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오랜 시간 노동운동에 힘썼고 노동자 교육을 위해 적극 활동하는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만납니다.

     

    그의 경험을 공유하고 노동하는 우리의 삶과 역사를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노동을 매개로 진솔한 대화를 함께 하실 분들, 어서 오세요.

     

     

    주최: 역사문제연구소

    주관: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

    사회: 한상구

     

    일시: 2017616() 저녁 7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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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8 13:03 역문연 광장

     

     

    대부도 옆 선감도

    1942년 일제 강점기에 이 섬에는 '선감학원'이 있었다.

    불량행위를 하거나, 우려가 있는 자를 교화시켜 사회에 진출시킨다는 명분으로 조선총독부가 세운 감화원.

     

    지난 1월 21일 선감학원의 숨겨진 아픈 역사를 담아 컨테이너 3개동으로 조성된 선감역사박물관을 개관했다.

     

     

     

     

     

     

     

     

     

    박물관에서는 개관 기념전으로 선감학원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출신자의 이야기를 담은 <김춘근, 22년의 시간> 기념 전시 중이다.

     

    8~18세 아이들은 노역과 학대, 폭행, 고문, 굶주림 등의 인권유린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하거나 구타, 영양실조 등으로 희생당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군이 주둔했지만 열악한 환경은 여전했으며, 그렇게 1982년, 완전 폐쇄되기 전까지 이곳에는 모두 5,759명의 어린아이들이 입소해 그 가운데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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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3 14:47 역문연 광장

    * 이 글은 지난 2017년 1월 24일 <'촛불 민주주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제목으로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에서 진행된 토론회의 발표문입니다. 







    집회/시위와 깃발-저항과 참여의 문화사 



    이기훈



    역사연구는 어느 시점에서 현실과 항상 마주하기 마련이다. 2016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과 변화는 정치학이나 사회학만이 아니라 역사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전적인 문제를 제시했다. 특히 11월부터 지속되는 촛불집회에서는 정치적 저항과 사회운동 주체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뒤집는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깃발이다.



    그림1. 1993년 연세대 교내 시위


    그림 1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저항 주체의 모습들이다. 강렬한 소속감, 확고한 신념, 명징한 주체의식을 확연히 드러내 보이는, 전형적인 근대적 저항 주체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강렬한 이미지들은 많은 부분 펄럭이는 깃발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학생들 대오들 속에서 펄럭이는 깃발들에는 단과대학과 학과의 이름만이 아니라, 자주통일, 민족자주, 해방, 횃불 등의 구호가 함께 나부끼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국가는 의례와 군대의 지휘를 위해 깃발을 만들었다. 의전을 위한 깃발은 국왕을 상징하는 교룡기처럼 특정한 지위를 구체적으로 나타냈고,[각주:1] 군사용 깃발들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지휘관이나 부대를 표현했다.[각주:2] 조선 후기의 두레처럼 공동체가 깃발을 사용한 사례들도 있었다.[각주:3] 각각의 깃발은 개별적인 신분, 지위, 집단을 상징하는 것이지, 국민이나 계급 같은 보편적인 공동체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근대 이후에야 국민, 계급 등 집단 전체가 하나의 깃발을 통해 정치적 주체로 재현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기다. 1883년 제정된 태극기는 초기에는 대외적 국가 표시였지만 점차 군주와 주권, 나아가서는 국민의식의 표상으로 정착했다.[각주:4] 1910년 이후 일제의 침략 속에서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태극기는 민족해방의 상징으로 전환되었다. 3·1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시각적 상징이 태극기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러나 1920년대 새로운 정치가 등장하면서 다른 깃발이 등장했다. ‘적기가 출현한 것이다.  붉은 깃발은 아주 오래 전부터 끝까지 싸우겠다는 투쟁의 표시였다(백기와 정반대의 의미). 1831년 웨일즈 노동자 봉기, 1832년 프랑스의 공화주의자 봉기, 1848년 혁명을 거치면서 붉은 깃발이 투쟁의 상징으로 등장했지만, 노동자계급과 민중, 진보의 집단적 표상으로 확연히 드러난 것은 1871년 파리 콤뮌이었다.[각주:5]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이 메이데이를 정한 이후 붉은 깃발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림2. 1871년 3월 28일 코뮌 선거 경축



    그림3 공제 창간호의 표지. (최유리, 󰡔시대의 얼굴 – 잡지 표지로 보는 근대󰡕, 소명출판, 230쪽)


     식민지에도 1920년대부터 붉은 깃발이 노동과 해방운동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그림 31920년 창간된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共濟)>>의 표지다. 이 무렵의 조선노동공제회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각주:6] 컬러로 인쇄된 <<공제>> 창간호의 표지는 둥근 지구 위에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 붉은 깃발을 게양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중의 세계적 연대, 새로운 시대의 개막 등 사회주의적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펄럭이는 깃발은 한반도 형상을 하고 있다. 지구적 연대와 노동자의 붉은 깃발, 그리고 민족주의적 이미지가 깃발 하나에 집약되어 있다.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광주학생운동이나 1930년대 노동운동에서 붉은 깃발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합법적인 노동 단체나 진보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깃발이 그 자체로 상징성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붉은 깃발에도 자신들의 주장을 표현하는 구호를 써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해방은 정치의 폭주를 가져 왔고, 깃발과 플래카드가 홍수를 이루었다. 예상과 달리 붉은 깃발보다는 각 단체가 새로 만든 깃발들이 집회 현장에 많이 등장했고,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들이 훨씬 많았다.


     깃발의 시대는 분단이 확정되면서 소멸했고, 태극기 외에 다른 깃발들은 함부로 들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4월 혁명부터 1980년 서울의 봄까지 1960~70년대의 시위에는 태극기 외의 깃발은 등장하지 않는다. 정치적 저항의 상징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한국 현대 정치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림4 1980년 5월 15일. 태극기와 단국대 교기가 나란히 보인다.


    학생운동에서 깃발이 등장하는 것은 1986년 무렵부터였다. 학생운동이 학생회를 장악하고 대중적 운동으로 거듭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와 학과의 깃발들이 등장했고, 19876월 항쟁을 거치면서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은 깃발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깃발들은 곧 시련을 맞이했다. 현실적인 답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참신함조차 사라진 운동 조직은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극단적인 것이 2008년의 촛불집회였다. 깃발을 들고 있으면 항의와 야유를 받았다. 사람들은 진보 진영까지 포함한 당시의 정치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5 2016년 촛불집회의 깃발들


    2016년과 2017년의 깃발은 새로운 상황을 보여준다. 그림 5의 사진은 20161231일 촛불집회 당시 광화문 바로 앞에서 촬영한 것이다. 총학생회나 시국회의, 시민연대의 깃발들과 함께 얼룩말연구회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얼룩말연구회’,‘장수풍뎅이연구회’, ‘대한민국아재연합’, ‘햄네스티 인터내셔널’, ‘범야옹연대’, ‘민주묘총심지어 혼자온 사람들까지 온갖 종류의 깃발들이 촛불집회에 등장했다. 실제 장수풍뎅이연구회는 장수풍뎅이를 연구하지 않고, 얼룩말 연구회도 얼룩말을 연구하지 않는다. 범야옹연대나 민주묘총은 고양이 애호가들이 내건 깃발과 구호지만 촛불집회에서만 모이는 조직이고, 햄네스티 인터내셔널은 햄스터 동호회의 촛불집회 깃발이다.[각주:7] 


    대규모 시민 저항의 국면에서 사람들은 가상과 현실을 넘나 들며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 ‘아무 깃발 대잔치라고까지 하는 이 현상은 새로운 정치의 측면들을 보여준다. 놀이와 저항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저항하는 주체로서 또는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잠정적이거나 부분적인 성격들이다. 항의하고 저항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며, 깃발은 그 상징이다. 오늘날은 차이와 단절 속에 형성되는 혼성적인 주체들이 등장하면서 싸움의 양상도 달라지는 시점일 수도 있겠다.   






    필자 : 이기훈(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1. 김지영, 2005,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 ; 의궤반차도와 거둥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본문으로]
    2. 노영구, 권병웅, 2016, 「조선후기 의궤 반차도에 나타난 군병 배치 및 군사용 깃발의 표현양식」, 󰡔역사와 실학>> 56 [본문으로]
    3. 정승진, 2012, 「益山 金馬 두레와 勤大 共同體論」, 󰡔대동문화연구󰡕 80, 이 기싸움은 1930년대 민속조사까지도 중요한 풍속으로 남아 있다가 한국전쟁기 단절되었다가 1968년 이후 재현되고 있다. [본문으로]
    4. 목수현, 2006, <근대국가의 ‘국기(國旗)’라는 시각문화-개항과 대한제국기 태극기를 중심으로>, << 미술사학보>> 27 [본문으로]
    5.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 장면처럼 붉은 깃발들이 대규모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원작 소설에서도 1832년 6월의 봉기 장면에서 붉은 깃발들이 군중들 사이에서나 바리케이드 위에 종종 등장한다. (빅토르 위고, 베스트트랜스 역, 󰡔레미제라블󰡕 4, 5권, 미르북컴퍼니) 1980년대 제작된 뮤지컬의 대규모 붉은 깃발 장면 자체는 파리 콤뮌을 기록한 그림들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본문으로]
    6. 이경룡, 1995, 「1920년대 초반 노동운동의 분화과정-조선노동공제회를 중심으로-」, 󰡔중앙사론󰡕 8 [본문으로]
    7. 「웃기는 깃발 들고 함께 울다」, 󰡔시사IN󰡕, 485, 2017.1. 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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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3 14:31 역문연 광장



    * 이 글은 지난 2017년 1월 24일 <'촛불 민주주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제목으로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에서 진행된 토론회의 발표문입니다. 






    공범의 전복 – 세월호 참사와 촛불 민주주의


     장미현



    1. 우리는 왜 촛불을 들었는가?

     

    광화문 촛불집회가 13주 째 이어오고 있다. 늦가을에 시작한 촛불집회는 해를 넘겨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참가인원은 매번 다르지만 121, 혹한의 폭설 속에도 35만 명이 광화문으로 나왔다. 사실, 놀랍지 않은가?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촛불이 이어질지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런데 촛불은 애초 국정농단 진상규명에서 시작하더니 이제는 언론, 경찰, 검찰 개혁을 거쳐 한국 권력의 핵심인 사법부와 삼성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각주:1] 지금까지 다들 어떻게 참고 적응하며 살았는지 놀라울 정도로 정치제도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문제를 다들 진단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나름, 바꾸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한국과 같이 삶을 유지하기 위한 강도가 센 사회 구성원들에게 무엇인가를 바꾸기 위해 지속적인 시도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말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일상의 노동에서 빠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주말에만 할 수 있는 혼인/비혼/가족생활에서 예외를 인정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이유들이 존재해도 나가지 않으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은 어디서 왔을까?


    이제 3년이 다 되어가는 20144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그 이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목도했다. 피해 학생들의 가족이 조롱당하고 고립되며 책임져야 하는 정부와 기득권 세력이 진상규명과 참사 기억 활동을 탄압하는 과거의 작태가 벌어졌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청와대 관계자들의 실상을 접하고야 수많은 의문이 풀렸다. 그렇다면 광장의 감정은 분노였을까?

     



    2. 떠도는 죽음에서 느끼는 가해의 충격[각주:2]


    분노는 주로 피해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식민지와 분단, 승자독식이 강한 한국의 역사와 사회문화 속에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분노를 느낀다. 세월호 부모님들이 가장 많은 느낀 감정도 특정인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희생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단원고 희생자들의 부모님들은 이준석 선장부터 박근혜까지 증오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안에 세월호를 기억하겠노라고 약속하고는 곧바로 자식 팔아 돈 받아먹는파렴치한 부모로 낙인찍는 데 앞장 선 우리들(사회)도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 집권 기간 중 우리가 가장 자주 느낀 감정 또한 분노였다. 언론의 편파, 파행 보도가 싫어 언론사에 취직해 월급 받고 사는 친구들이 싫어지던 때, 단원고 기억교실 철거 중에도 침묵하는 단원고 교사들이 싫어져 교사 하는 친구들을 원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자고 대학의 강단에서 얘기하고 싶었지만 수강생들의 평가가 두려워 침묵했던 시절을 나 또한 함께 보냈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모욕을 참고 분노를 참고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야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내부 분열을 만들고 무기력을 만들어 세월호 부모님들을 고립시키고 있었던 시간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고립된 분노는 무기력 그 자체였다. 그 시간 안에서 나는 박근혜 정권의 피해자였고 피해자이기에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피해자 위치에 안주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피해자 의식은 낯설지 않다. 식민지 경험과 국가에 의한 상시적 폭력, 학살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우리에게 피해를 보상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라는 요구야말로 도덕적으로 가장 정당한 요구였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는, 나는 이 피해자 집단에 속해 있을 권리가 있는가? 적어도 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 해보고 싶다.


    세월호 참사 이전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던 사안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8년 광우병 수입 소 반대등은 피해자의 위치에 선 집회 참가자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이 사건들은 모두 사건의 발생 과정, 그 자체를 우리가 목도한 것은 아니었다. 2008년 촛불은 오히려 은폐의 과정 그 자체가 분노의 원인이었고 대상이 우리 스스로가 아닌 외부의 을 향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세월호 침몰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볼 수밖에 없었고 우리 모두 함께목격한 최초의 참사였다.[각주:3] 세월호 참사는 sns를 통한 드러내기와 참여하기가 활성화 된 이후에 발생한 사건이며 언론과 교육과 자본의 모순이 복잡하게 중첩해 발생하고 그 상태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사건 자체가 총체적인데다 이미 모두가 봐 버린 이후 누구나 이 사건과의 직접 관련성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참사 이후 ‘416 운동[각주:4]은 중앙 집중적·위계적이 아닌 분산적·개별적 활동 방식을 통해 확산·유지되었는데 다른 운동들과는 달리 초기부터 이런 운동의 방식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관련성을 목격자인 우리들이 부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봤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가 느낀 죄책감은 사실 희생’-죽게 했다- 그 자체에서 연원했다기보다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비롯해 피해자로서 동일 집단에 속해 있을 것이라 쉽게 짐작했던 참사 당사자들의 위치 변화에서 연원했을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 학생들의 인터뷰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단어가 미안함과 죄책감이다. 이러한 감정은 마치 그들만의 리그처럼 내부에서 맴돈다. 생존학생과 생존학생의 부모님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죄책감을 가진다. 유가족분들은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촛불을 만들어 준 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가장 분명한 피해자가 피해자 집단에서 나와 자신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을 통해 또한 확인했다. 후지이 다케시가 인용한 이시하라 요시로[각주:5]의 글에 나와 있듯이 확고한 가해자를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충격, 나는 이것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이 우리에게 준 충격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의 직접적 당사자들이 자신의 가해성을 그것도 아이들을 죽게 한 부모라는 개인적 가해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에 무관심한 자신의 생애가 아이를 죽게 했다는 사회적 가해로 인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집단적으로 자신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가해자로 만드는 위치에서 벗어날 것을 선택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성을 드러내고 그 위치를 벗어나려는 고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나 자신이 피해자로서 당당할 수 있을까? 이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가해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행위는 나 자신의 행위이지만 이런 위치 변화는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 전복(顚覆)의 역설


     

    세월호 참사 이후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가운데 불안과 고통으로 인해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가해자로 자신을 설정한 후 자신을 가해자로 만드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교육계와 학계는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한국 사회의 특성상 이러한 위치 변화를 시도하기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어머니들도 이 고투에 서서히 동참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이 취한 위치 변화를 쫓아 각계각층이 변화를 시도 중이다.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단과 방법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자기를 바꿈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줬다. 2014416일 이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은 20161029일 시작했지만 촛불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촛불과 함께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에서 내리지 않은 채 좀 더 천천히 침몰하도록 밧줄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배를 침몰시키고 있는 우리들이 반대편으로 와 그 밧줄을 함께 쥐고 뒤집힌 배의 전복(顚覆)에 함께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 : 장미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1. 이재용 구속영장 청구 기각 판결을 둘러싸고 사법부 내에서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참고할 수 있는 글로 차성안(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 「현직 판사의 일주일을 공개합니다.」, 『시사인』(제418호), 2015. 9. 21 차성안 판사는 판사들의 업무 환경과 개혁 방안에 대해 sns를 통해 활발히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더 자세한 논쟁에 대해서는 페이스북 Sungan Cha, 류영재 참조. [본문으로]
    2. 이 구절은 후지이 다케시, 「(세상 읽기)명복을 빌지 마라」, 『한겨레』, 2015.4.12.에서 인용. [본문으로]
    3. 이 변화의 기제가 또 하나의 언론이자 여론 창구인 sns 인 것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4. 세월호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에 직면한다는 의미로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가들은 이 활동을 ‘416운동’ 으로 부른다. 2014년 6월 후지이 다케시는 세월호 참사 이후 이미 우리의 일상 또한 깨졌다는 점에서 ‘4·16’ 이 ‘그들’의 시간이 아닌 우리의 시간임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후지이 다케시, 「(세상 읽기)멈춘 세월, 흐르는 시간」, 『한겨레』, 2014.6.1). [본문으로]
    5. 각주 2번에서 언급한 칼럼에 나오는 이시하라 요시로는 1939년 만주에서 징병되어 근무하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8년을 시베리아에서 보낸 시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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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3 14:17 역문연 광장



    2017년 1월 24일 시사토론 <'촛불 민주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한 장면.



    * 이 글은 지난 2017년 1월 24일 <'촛불 민주주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제목으로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에서 진행된 토론회의 발표문입니다. 








    노동자가 배제된 민주주의  

    -포섭과 배제의 이중주에 무너진 노동자 정치세력화

     


    전원배


    촛불시위와 4.19

     

    위기는 최순실에서 시작됐고, “공격은 두 방향에서 전개됐다. 하나는 언론, 또 하나는 촛불. 전자가 움직인 이유는 지배블록의 동심원이 터무니없이 협소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건 지배방식이 아니며, 이 때 키워드는 국정농단이 된다. 화력은 박근혜와 친박에 집중됐고, 그 둘은 끝났다. 이 점에서, 정세의 진전을 바라는 좌파들이 최근 언론이 보여준 일련의 활약상에서 예방혁명의 냄새를 맡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확실히 먼저 움직인 것은 전자였지만, 대세를 결정지은 것은 후자였다. 촛불에게도 십년 이상 축적된 노하우와 매뉴얼이 있었고, 연인원 일천만 명이 거리에 나왔다. 하지만 전자가 사뭇 동질적이고 일사불란한 데 비해, 후자는 뭉뚱그려져 있다. 그리하여 그것의 키워드는 국정농단주권사이 어디쯤에서 머문다. 촛불이 횃불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양적 확대가 곧 질적 비약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다만 내연(內燃)하는 중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촛불의 요구는 박근혜 하야”, “이재용 구속그리고 황교안 퇴진이다. 이 셋은 본디 서로 맞물려 있는 것들이나, 현실에서는 따로 논다. 박근혜는 헌법재판소가, 이재용은 법원이, 황교안은 국회가 각각 운명을 쥐고 있는 게 그 단적인 표현이다. 촛불로 타오른 대표성, 주권은 법치로 포장된 국가기구에 아직 갇혀 있다. 이것이 현 정세의 특징이자, 우리 민주주의의 현 주소다.

     

    과거에도 몇 차례의 하야가 있었다. 이승만, 윤보선과 장면, 그리고 최규하. 뒤의 세 사람이 권력을 새로 쥔 자에게 떠밀려 형식적인 절차를 밟은 것이라면, 이승만의 경우는 맥락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경찰이 경무대로 전진하는 군중에게 총을 쏘고 나서,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대학교수들의 시위에 힘입어, 시위대의 선두는 결전을 각오하고 군대를 밀어붙였다.“1공화국의 버팀목에 서열을 매기면, 미국, 군부, 경찰, 정치깡패의 순서였다. 저항권으로서 폭력의 행사가 사회심리적 동의를 얻고 있는 상황, 그것의 진화를 통제하지 못하면 그 다음 얼굴이 순서대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국과 군부는 이승만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하야외에는 안전을 보장할 방법이 없다고, 그에게 통보했다. 동아줄은 끊어졌다. 수백만의 동포들이 죽고 다치고 굶주림에 내몰려도, 12년 동안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던 이 강퍅한 노인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4을 돌이킬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학생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도 얼마만큼 맞아떨어진다. “항쟁의 서막을 연 주역은 대구와 마산의 고등학생들이었고,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이 기폭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4주력학생으로 제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4의 전체 과정에서, “민주주의제단에 목숨을 바친 고귀한 넋들은 모두 일백여든여섯 분. 이 가운데, 고등학생이 36, 대학생이 22,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19명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109명은 누구였을까

     

    국민에게 질서를 요구한 자들, “민중에게 멈춰라고 명령한 자들, 그들은 “4의 대척점에 서 있던 자들이었다. 독재정권에 부역하고, “국가에 빨대를 꽂아 단물을 빨아먹던 것들이었다. 끌어내 내동댕이쳐도 시원치 않을 것들이었다. 반면, 남은 109명 가운데 61명은 일용직노동자, 33명은 무직자였다. “1공화국이 쥐어짜고 버린 사람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노동자와 청년실업자가 시위대의 선두였던 것이다. 이들과 때 묻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바로 “4주력이었다.“4부정선거 다시 하라!”에서 출발해 이승만은 하야하라!”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이승만이 과연 그 노인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겠는가? 이렇게 볼 때, “4의 정신은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표현으로 얼버무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회복이라니? “1공화국에 회복해야 할 민주주의가 언제 있기는 했나? 헌법에 조문 몇 개 넣은 정도로 민주공화국이 굴러갈 만큼, “민주주의는 한가한 게 아니다.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회복될 게 아니라 건설되어야 할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점잖게 설교하던 무리들은, 예외 없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에게는 1공화국,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민주공화국임에는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것을 지탱해 왔던 장치들은 망가져서는 안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이 누려야 할 판에, 그 발판이 될 도구들을 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프레임에는, 기득권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이라는 진실을 묻어두려는, 실로 기만적이고 야비한 심보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진리란 넓은 것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보편의 의미다. 특정의 시점에서, 특정의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권리나 의무는, 존재할 수는 있어도 진리는 될 수 없다. 이것이 역성혁명(易姓革命)”주권재민(主權在民)”의 본질적인 차이다. 전자의 키워드가 교체라면, 후자의 그것은 확장이다. “민주주의, 그것이 일단 작동되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경계를 허문다. 귀족에서 평민으로, “자산가에서 무산자, 남성에서 여성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민주주의의 본령은 확장이다.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영구기관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마찰계수 제로의 진공 상태도, 중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무중력 상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구시대잔재는 끈질기게 민주주의의 작동을 방해하고 교란한다. 이게 성공할 때 이 기관은 멈춘 듯이 보이나, 실은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내연(內燃) 하는 중이다

     

    민주주의, 그것이 출발하는 순간부터, “확장을 둘러싼 거센 소용돌이에서 에너지를 뿜어내고, 그곳에서 자신을 구동할 동력원을 공급받는 것이다.어떤 이들은 민주주의책임이라고 말한다. 맞다. “민주주의주권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이고, “권력책임을 수반한다. 헌데,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한쪽은 권력의 동심원을 좁히는 것을 책임이라 여기고, 다른 한쪽은 넓히는 것을 책임이라 받아들인다면, 과연 어느 쪽이 민주주의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가? 만일 질서주권자를 능멸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대체 왜 주권자가 그것을 지킬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을 공격하지 않고 감히 누가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을 말할 수 있는가? 소위 시장을 신봉하는 무리들은, 대가 없이 경쟁 없고 경쟁 없이 성장 없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대가와 경쟁의 기회가 봉쇄된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러면서 어떻게 생산성과 창의력을 요구하나? 인간은 스스로 행한 만큼 책임진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책임을 질 인간은 없다. 왕의 목을 쳐보지 않고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킬 책임을 느끼겠는가? “책임지기 위해서 파괴하는 것이다. “책임지기 위해서 건설하는 것이다.............인민을 쥐어짜고 억누른 권력기구는 그대로 남아 있으되, 꼭짓점이 사라진 상황. 그것이 이승만이 물러난 직후의 정세였다. 항쟁은 침로를 빼앗기고 좌표를 잃은 채 주저앉았고, 그 결과가 제2공화국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의 탄핵을 인용(認容)한다면, 촛불은 급속도로 대통령선거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주권정권 교체로 제한당할 수 있는 것이다.“4이 열어젖힌 민주주의의 문틈으로 빠져나온 것은 통일노동이었다. 1공화국 내내 금기였으며, 어쩌면 제2공화국이 맞닥뜨린 최악의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이라는 단절을 겪은 뒤 노동은 이제 걸음마를 다시 떼야 하는 처지였고, “노동없는 통일은 모래성이었다. 한편, 2공화국 역시 자기 손으로는 그 상자를 눌러 닫을 힘이 없었다. 이리하여, “4(79에서 80까지)”이 돌아오는 데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좌절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한국 노동운동의 오랜 꿈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애매하다. 우선 노동자계급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노동운동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정체세력화의 경로도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봉기도 있고 선거도 있다. 영국식 노동당이나 독일식 사회민주당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초기에는 이를 대놓고 말하는 이는 찾기 어려웠다. 민주노동당에서 사회주의 강령 삭제로 시비가 붙었을 때도, 사회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대체하자는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대체 무엇을 하자는 건지, 뒤죽박죽이다. 2017년 현재의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실험은 실패했다는 게 중론이나, 원인에 대한 진단은 가지가지다. 한쪽에서는 대중투쟁과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핏대를 올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운동권 정당에서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짜증을 부린다. 아무려나, 결코 짧지 않았던 이 실험에서 남은 이름은 셋이다. 노회찬, 심상정 그리고 이석기. 그러나 그들을 노동자 의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정당이었을까? 민주노동당의 젖줄은 민주노총이었다. 권영길은 이명박과의 TV토론에서 민주노총당 아닙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이건 배은망덕한 소리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정당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대표성 때문에 제기된다.물론 대표성이란 단순히 숫자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은 게 노동조합의 탓만도 아니다. 대의명분으로 보자면, 한국노총과는 달리 민주노총에게는 노동자계급의 대표성을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그 민주노총이 만들었으니, 당연히 민주노동당도 대표성을 주장할 만하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주장했고, 또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표성의 총체적 위기다.

     

     

    이 전후 맥락에 1997년의외환위기가 놓여 있다. 민주노총은 자신의 합법화와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구조조정과 맞바꿨다. 이것이 원죄가 되어 대표성의 해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민주노총의 핵심부대는 대기업-대공장-공공부문노조이고, 이들의 상대는 재벌과 정부다. “외환위기에 힘입어 가장 비대해진 바로 그 세력이다. 대기업-금융-대공장-공공부문의 임금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해, 노무현 정권 때 정점을 찍었다.

     

     

    참여정부에서 노동정책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그 이유를 임금가이드라인을 없애고 노사관계를 시장에 맡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불능력이 있는 자본과 교섭력이 있는 노동이 만났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환한 것이었다. 부담은 먹이사슬의 아래로 전가됐고, 이러는 사이 노동자계급 내부의 임금 및 노동조건의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졌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이 만들어놓은 사회안전망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더 가증스러웠던 것은 노사관계를 시장에 맡겼다는 그들이 유독 비정규 노동운동에 대해서만큼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강경하게 개입했다. 손배소에 가압류가 난무하고, 백주의 테러가 묵인되었으며, 급기야 재벌에게 비정규직을 무한정 쓸 수 있는 라이센스까지 선물했다.

     

    복지의 전성시대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한 참여정부 5년 동안, 가장 많이 울어야 했던 이들이 비정규-불안정 노동자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민주노총의 대표성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민주노동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동자계급이 부러워한 게 보수정당의 청문회 스타였나? 싸울 때 함께 싸워주고, 맞을 때 함께 맞아주는 국회의원 친구를 바랐던 게 아니었던가? 민주노동당이 자랑한 10명의 의원단, 그 어느 누구도 비정규 노동운동을 겨눈 탄압의 칼날을 몸으로 막으려 하지 않았다. 2006년 울산 북구 보궐선거에서 현대차노조 위원장 출신 정갑득 후보가 낙선하던 그 순간, 민주노동당은 끝장이 났다. 그것은 무능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배신에 대한 심판이었다. 민주노총이 입만 열면 되뇌는 노동의 배제, 요즘 표현으로 되받으면 피해자 코스프레에 다름 아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때, 정부 주변에서 한 자리씩 얻은 사람들이 몇 명이며, 오른 임금은 또 얼마인가? 그게 바로 참여다. 그리고 그 뒤안길에 울부짖는 비정규-불안정 노동자들이 있었다. “노동의 배제이명박근혜 정권때 시작된 게 아니었다. ....... “전노협이 쓰러지던 그 시점에서 출발해 소위 민주정부라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완성되었다. 이것이 민주화양극화로 이어질 수 있었던 비밀이다. 민주노총이 잃어버린 10의 종말과 함께 사면초가에 몰린 것은 자승자박일 뿐이었다. “양극화의 거친 바다에서 민중과 함께 노를 저을 생각을 하지 않고, “민주화의 틈새시장에서 뱃지 달 생각으로 잔머리만 굴렸으니, 민주노동당의 파산 역시 동정할 구석이 없는 것이다

     


    실재하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야누스다. 그것은 질서이고, 질서인 한 배제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형용사적 의미로 사용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민주주의와 독재는 항상 함께 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게는 참여가 너에게는 배제인 것이, 내게는 민주주의가 너에게는 독재인 것이, 현실의 정치에서는 수두룩하다민주주의의 동심원은 다른 한편으로는 독재의 동심원이고, 이 동심원을 극한으로 확장시키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개념이 나오는 것이다. 독재의 동심원이 좁아질 때,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동심원이 위축될 때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 투쟁의 문은 열린다. 이 문이 얼마나 열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투쟁에 달려 있다. 승리한 자가 다수일수록 문은 더 활짝 열리고, 승리한 자가 소수일수록 문은 법의 이름으로 다시 닫힌다. 자크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의 적은 법치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민주주의가 깨뜨려야 할 것은 바로 그 직전의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회복이나 복원 따위의 슬로건이다. 앞에서 민주주의의 본령은 확장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이 확장의 동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생산대중으로부터 나온다. 민주주의를 축소시키려는 위협이 착취와 수탈에서 나오는 한, 민주주의의 보루가 노동자라는 명제는 영원히 참이다. 따라서 노동의 배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오늘을 분석하고 미래를 가늠할 핵심적인 키워드다. 촛불에 불을 붙인 것은 박근혜와 최순실이다.

     

     

    그러나 이 우연이 사태를 모두 설명해줄 수 있을까. 모든 우연뒤에는 필연이 숨어 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 본대는 나오지도 않았다. 촛불 뒤에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노동인가? 그것이 노동이라면 어떤 노동인가? 우리는 지금부터 이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선거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네 번째로 밀려올 2를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필자 : 전원배 (역사문제연구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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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5 16:27 역문연 광장

    파주 답사기

    김은정

     논밭 메꾼 땅 위에 무언가를 세우고 또는 산을 깎아내며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골내음 물씬 풍기는 곳도 많은 파주가 올해 민중사반 여름 워크숍의 장소가 되었다. 가까워서 좋긴 한데 다들 한 번 씩은 답사로 다녀왔다는 파주에서 더 이상 무얼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는 파주로 향했다.

    폭염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던 8월 중순이라 날씨는 무척 더웠다. 총무 역할 맡고 있다고 모인 인원이 적을까 취소 인원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약속된 인원이 다 채워져서 다행이다. 만나기로 한 일시장소는 815일 오후 2시 운정역.

    파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10년 이상 파주에서 살았던 까닭에, 나는 운정역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운정역은 금촌역과 일산역 사이에 있던 세모지붕의 작고 작은 간이역이었는데, 아니 운정역이 이렇게 커졌다니. 늦어서 바쁜 와중에 왠지 모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충격적인 운정역을 뒤로 하고 반원들을 만나 첫 번째 답사 장소인 파평 산골에 위치한 평화를 품은 집(평품집)으로 이동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는 평화와 관련된 도서관과 소극장, 자료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근대 이후 발생한, 희생자 수가 30만 명이 넘는 큰 규모의 제노사이드 사건 등을 나라 별로 분류하여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 전시한 공간인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에서 대부분의 반원들은 가이드 님의 설명과 함께 오랜 시간 머물렀다. 해외와 국내 학살 현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지 관계자와의 협력 속에서의 자료 확보를 통해 이 공간을 구성하는 일이 가능했지만, 특히 연구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가이드 님은 설명을 덧붙였다. 학살 관련 연구자를 찾기 힘들다는 얘기.

    학살 관련 자료를 보고 나니 석사과정 때 한국전쟁 당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오래된 사진을 마주한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학살의 기록 앞에서 어느 누가 마음이 가벼울 수 있을까.

    제노사이드 전시를 둘러본 반원들은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2016.7.14.~2016.6.15.) 설명에 집중하는 반원들과 전시된 사진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시는 가이드 님. 다들 표정이 심각하다. 광경은 아래와 같다.

    본래 여유를 갖고 답사를 진행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답사는 항상 시간이 촉박하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소극장과 예쁘게 꾸며놓은 평화도서관도 구경하고 싶지만, 일단 다음 답사 장소로 서둘러 가야하는 시간이 되었다. 다들 밖으로 나오는 채비를 하는 찰나 홍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무농약 우리밀 빵을 사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속으로 박수를 치며 빵을 하나 얻어 차를 탔다. 파주는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답사 장소 간 이동시간이 만만치 않다. 기본 20분 이상. 평화와 학살의 관계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는 운전자 옆에서 빵을 우걱우걱 먹으며 도착한 곳은 파주 답사를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 곳 중 하나인 칠중성(七中城). 그런데 올라가는 길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앞 차량이 움직이지 않아 차에서 내려 올라가보니 심각한 상황이다. 난관에 직면한 당시 상황은 아래 사진과 같다.

    답사 당일 전 왔던 비 때문인지 차바퀴가 움푹 파인 흙길에 빠지고 만 것이다. 몇몇이 바퀴 앞뒤에 돌을 넣다 빼기를 반복하는 등 차를 빼내기 위한 시도를 수차례 반복하며 운전자가 핸들을 요리저리 꺾는 사이 차는 구출되었다, 라고 간단히 쓰고 있지만 긴 시간 동안 다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아반떼의 구출 광경을 돕거나 바라보았다.

    안도하며 그러나 더 더워진 것만 같은 날씨를 절감하며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오르니 그곳에 칠중성이 있다.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142m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라고 한다(칠중성 안내판 발췌).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에는 영국군과 중공군이 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삼국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였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임에도 불구하고 뒤로는 감악산, 앞으로는 임진강은 물론 멀리 북녘 땅까지 보이는 곳이자 교통의 요충지가 될 수 있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그 전경.

    저기 굽이굽이 흐르는 임진강을 감상하며 파주를 향한 나의 무한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다음 답사지인 적군묘지로 서둘러 이동하였다.

    율곡로(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5번지) 어디쯤에 내려 땡볕 속 두렁길 옆을 잠시 걸어가면 적군묘지가 나온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중국군과 북한군, 그 이후에 수습된 북한군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북한군이 있는 1묘역과 북한군과 중국군이 있는 2묘역으로 나누어져있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1묘역을 가보진 못하고 2묘역에서 잠시 머물렀다. 안내판에는 북한군/중국군 묘지로 나와 있다. 도착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니 화강암으로 보이는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위에 북한군, 무명인(이름이 없음) 등이 새겨져있다. 비석들 사이를 걸어보며 저마다의 이유로 죽음에 이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무명인들에게 구천을 헤매지 말고 고향집 들러 좋은 곳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념. 이곳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후에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얻을 요량으로 인터넷에서 적군묘지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니 비석 위쪽을 북을 바라보도록 놓았다고 한다. 지도를 찾아보니 정말 북으로 향하고 있다.

    칠중성과 적군묘지를 막상 가보니, 파주에 답사오기로 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곳곳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고 싶은데, 늦었다. 숙소 측과 약속한 시간은커녕 다시 전화해서 잡은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숙소로 가면서 오후 스케줄이 걱정되기 시작.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헤이리예술마을 안에 있는 헤이리 논밭예술학교라는 곳이었다. 주인장에게 예약한 방 세 개를 소개받고 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방 세 개 중 하나는 에어컨이 없었던 것. 그 방에서 처량하게 홀로 우뚝 서있는 청록색 선풍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매우 심란해졌지만 어차피 다들 술 먹고 잘 텐데 에어컨을 켜겠다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그곳에서는 아무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숙소 회의실에서 한숨 돌린 우리는 곧바로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파주 시민이자 이번 답사를 책임진 조형근 선생님의 발표(주제: 계획 없던 공동체의 뜻하지 않은 진화: 파주의 한 마을을 사례로)와 홍종욱 선생님의 토론이 이어졌다. 발표는 파주 지역,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사례인 교하도서관에서의 지역주민활동, 세월호파주시민모임과 파주시민참여연대의 결성 등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토론은 파주 지역공동체 운동의 특성 등을 묻는 몇 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여러 의견과 질문이 오갔다. 공동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소위 북파주남파주의 갈등, 아이들 교육과 집값 문제까지.

    예상보다 세미나는 오래 지속되었고, 다들 배가 고파보였지만 쉽사리 밥 먹자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이제 언제나 그렇듯을 붙여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정말 배가 고플 수 있는 8시가 다되었으므로 우리는 세미나를 마무리하고 근처 두부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뒤 술과 안주를 곁들여 뒷풀이를 즐기거나 전투적으로 보냈다. 중간에는 지척에 사시는 이이화 선생님이 방문하셨다. 마침 선생님의 생신이라 하여 케이크를 사와 촛불도 켜고 노래도 불러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다른 사람이 끓여주는 맛있는 라면을 먹고 남은 일정을 시작하였다. 우리가 찾은 곳은 파주시청 건너편에 위치한 성공회 파주이주노동자센터 샬롬의집. 도착하니 신부님이 시원한 커피와 함께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래 샬롬의집은 고양시에서 지원을 받으며 일산에서 운영되었으나, 이주 노동자가 많은 파주로 옮겨왔다고 한다. 예전부터 파주에는 이주 노동자가 많았다. 현재 파주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은 13,000명이 넘는다고 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산업연수생 제도가 폐지되고 고용허가제로 대체되면서 한국 이주 노동자 정책은 변화하였지만 그 제도는 한국인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는 점, 외국인 노동력의 단기 활용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 등이 이주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문제임을 신부님의 설명을 통해 이해하며 나는 잠시 옛날 생각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우리 동네 두부공장에서 일하던 방글라데시 사람과, 일산 가는 길에 있던 비닐하우스에서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마늘을 뽑던 가나(기니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 사람들이 밤낮없이 일만 한다는 얘기를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아빠는 나에게 얘기해주곤 했다.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 파주까지 온 게 신기했고, 그리고 조금 더 컸을 무렵 그 방글라데시 사람이 나에게 한국말로 뭔가를 얘기했을 때 도망쳤다. 부끄러운 기억.

    기억을 밀어내고 다시 신부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니 이곳에서는 임금체불이나 재해, 직장 이직 등에 관련된 노동 상담 외에 건강 상담 등 의료지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외에도 한국어교육 등 각종 문화행사가 때때로 열린다고 한다. 특히 봉사활동 차 찾아오는 중고등학생들로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의 지역주민으로서의 관계 정립을 위한 활동에 대한 아이디어 등을 듣기도 하고 때때로 중고등학생들이 그러한 아이디어들을 직접 실천한다는데, 신부님은 매우 뿌듯한 얼굴로 설명하신다.

    샬롬의집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다시 교하로 향했다. 교하 주택단지에 지역 주민을 위해 마련된 마당이라는 공간이 있다고 해서, 잠시 들러보기로 하였다. ‘마당에도 신부님이 계셔서 잠시 자리에 앉아 마련해주신 다과와 담소를 나누었다. 이곳의 정체성이 궁금하여 마당 브로셔를 살펴보니 소개 글에 치유와 회복을 위한 마을 소통 공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모임이나 휴식 공간 등으로 쓸 수 있다고 한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어느 동네에나 쉽게 생길 수 있는 공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마당을 나섰다.

    그나저나 교하가 이렇게 변하다니, 이제 교하에 와서 교하 쌀떠올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교하는 행정 구역 상으로는 파주시에 속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파주에서 분가한, 파주와는 다른 곳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말 다르다. 여기가 파주라니.

     

    생각보다 매우 맛있었던 만두전골을 먹으며 답사는 마무리 되었다.

     

    사진: 김세림, 김아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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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2016.07.07 16:36 역문연 광장



    <외상의 사회적 구성:

    역사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의 가능성 모색>

    참관기

     

    조민지

     

    SNS 게시물을 통해 접한 역문연 토론마당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순전히 기말 보고서 때문이었다. 기말 보고서 때문에 한창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을 읽던 나는 외상이라는 단어가 전면에 배치된 이번 강연에 관심이 생겼다. 이번 학기 나는 한일관계와 동아시아 전후처리 문제, 그 중에서도 위안부문제에 초점을 맞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기말보고서를 낼 때가 가까워오자 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집을 분석하겠다는 요지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했다. 이미 상당한 분량으로 축적된 증언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제국의 위안부> 같은 연구에서도 증언집을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조각조각으로 인용된 증언을 보고 있자니 화자의 전체 이야기를 직접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정도의 간단한 결심은 막상 증언집을 읽기 시작하자 금세 벽에 부딪쳐 버렸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있을 때, 그것이 당사자의 경험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해석을 제안하는 작업은 입장만 다를 뿐 방법론에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특히 역사적 사실의 진위가 (경험적) 입증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암묵적인 (철학적) 전제가정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숙고하지 않는다면 제국의 위안부 논쟁이 보여주듯 실증주의와 해석주의의 인식론적 폭력은 상호 순환적이다는 발표문의 설명이 어느 때보다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다. 역사적 지식 또한 진공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역사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실제 역사 과정에 변증법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와 같이 과거 발생한 사건에 의한 외상은 그것을 재현하는 사회과정과 상호작용하며 구성된다.


    현재 상식으로 통용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개념은 피해자의 고통에 얽힌 다중적 행위자들의 공적 책임을 드러내지 못하며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결과라는 비판이 흥미로웠다. 외상 사건에 있어서도 사건에 대한 사회 전체의 해석보다는 오로지 피해자들의 주관적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외상적 기억을 개인적이고 의학적인 관점으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명희 선생님이 소개하신 비판적 실재론의 개념은 인상깊은 것이었는데, 세월호 사건과 같은 집단적인 외상에 있어서 외상은 원인영역-사건영역-경험영역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직접 외상 사건의 처리과정에 참여한 경험을 통해 현장에서 조사와 치료가 어떻게 뒤섞여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들을 수도 있었다.


    외상의 사회적, 관계적 차원을 고려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가해자-피해자 개인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외상이 재생산되는 사회적 환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김명희 선생님은 그것을 생태적 접근이라고 명명하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방관자라는 제 3의 행위자를 추가할 것을 제안했는데, 역사학에 있어서 그것은 사회적 치유를 위한 기억의 연대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특히 역사적 서술이 갖는 수행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단순히 레포트를 쓰려는 생각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집을 펴들었던 내가 조금 작게 느껴졌다. 피해자들의 경험을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하는 작업이 갖거나 가질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한다면 내가 부딪혔던 어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명희 선생님의 강연은 나에게 그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지식이었다. 급히 가느라 필기도구를 챙겨가지 못했지만 듣다보니 결국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에 새로운 개념이나 용어를 적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하염없이 펼쳐진 무거운 증언자료를 앞에 두고 이론이나 방법론의 부족을 절감하고 있었던 터라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 것 같다. 이어진 두 분 선생님의 토론 또한 외상문제에 대한 비전공자로서 가질 수 있는 의문을 적절히 짚어 주셔서 강의만큼이나 유용했다. 특히 나로서는 플로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시는 선생님들이 직접 발언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무엇보다 귀중한 수확이었다. 끝나고 이어진 뒷풀이 자리에서 나는 연구소 여기저기에 걸린 포스터를 유심히 보았다. 이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면 다음에도 꼭 참석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민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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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2016.06.08 15:57 역문연 광장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 정치' 후기

    이정엽


    양치기 소년의 우화에서 양치기 소년은 거짓된 정보로 공포심을 조장하여 사람들을 자꾸 골탕먹이다가 결국 늑대의 출현이라는 참된 정보로 공포를 진심으로 느껴야 하는 시기에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봉착하고 말았다국정원이 양치기 소년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그것은 반복된 거짓말로 신뢰를 잃은 양치기 소년과 달리국정원의 잘못된 행동을 국민들이 계속 믿어줄 수 밖에 없고 국민들에게는 이를 제어할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국정원은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국내 선거에 개입해왔고 북한의 위협을 부풀려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갖게 만들었다물론 여당은 이 공포심을 자극하는 마케팅으로 선거에 압승해왔다


    공포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양을 늑대가 한 마리 물어가도 다시 새끼를 낳고 키울 수도 있지만국가안보는 되돌리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국정원의 기능은 함부로 다른 기관으로 대체할 수 없다그렇다면 국정원 스스로의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어떠한가반복된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마을 주민이 피해를 입었기에 자신의 진실성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양치기는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거짓정보생산과 권한의 남용을 그만둘 가능성이 있다그렇지만 국정원은 그 자신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지 않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거짓정보가 기밀을 다루는 국가안보라는 점즉 참과 거짓의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투명과 개방으로부터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여지가 남아있다이러한 구조적인 모순을 가진 국정원에게 양치기 소년 우화를 읽는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 혹은 충고를 하는 것은 독사에게 독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주문일 것이다.


    이번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 정치라는 타이틀로 이루어진 역사문제연구소의 시사토론회는 국정원이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명목상의 존립근거로 역사적으로 어떻게 국민을 배신하고 특정 정치세력에만 봉사하는 이념적인 단체로 성장해왔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자리라 생각하여 참석을 하게 되었다.


    국가의 안전보장이 이루어진다 함은국가를 이루는 국민전체가 안보와 관련된 행정이나 정책으로 인해 수혜를 입는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안전보장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은 국가에게 범죄와 전쟁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할 것이고 이는 생존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국가의 목적보다 상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국민의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이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볼 때국가는 내외부적 위험요인을 제거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그렇게 될 때 국가는 안보에 위해가 되는 위험을 방지하고 궁극적으로 국가의 번영과 평화라는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특이하게도이러한 안보와 관련된 정책과 정보는 다른 국가정책과는 달리 극단적으로 폐쇄적이며 타 기관과 달리 국민에 대해 다분히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아마도 국가의 안보와 직결된 정보가 타국에 의해 감지가 도힌다면 이는 정보전의 실패를 의미하며 더 나아가 전쟁상황에서는 패배의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어떤 집단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한다는 논리로 정권을 잡는다면그 정권의 정치적 목표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리로 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자세와 민주주의적 가치란 양립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민주주의란 불안정성을 제도화한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때선거로 인한 정치적 지형변화다양한 의견의 표출 등은 전쟁에 싸워 이겨야 한다는 단일한 국가이념과 전혀 다른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러한 전투의지가 전쟁을 방지하고 국민에 봉사하는 길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다만 그것이 정권이 평시에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만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번 시사토론의 발제자였던 김동춘 교수는 국정원의 기원이 한국전쟁에서 대북심리전의 기능을 수행하던 방첩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고국정원이 국가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정권이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으로 그 기능이 변경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아 중앙정보부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창설이 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과연 법적인 타당성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도 의문시된다. 5.16 쿠테타를 주도한 김종필과 박정희가 군 복무 당시 모두 첩보요원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점 또한 시사했다

    나는 현 정권에서 국정원의 기능은 바로 5.16 쿠테타를 주도한 박정희 시대와 자못 다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의 간첩조작 사건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수사한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임윤석열 검사의 직무배제선거 직전 여당 대표의 남북대화록 공개 등은 과연 국정원의 역할이 첩보인지 국내정치관여인지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닌가경제적 대공황에 대한 두려움이 극우적인 현상을 자아내듯박근혜 정권은 북한에 대한 위협을 과대포장하고있지도 않은 간첩을 만들어 내고 국가 기밀문서인 남북대화록을 선거 유세에 활용하는 행동을 표출함으로써 사람들의 단결을 조장했으며그 단결은 결국 권력자 자신에 대한 충성만을 의미했던 것이다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물론 권력자의 의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김동춘 교수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파시즘이 오기 전 사회는 이미 해체되었다는 말을 인용한대로 현재 한국에서 약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무너지고 있는 파시즘적 움직임은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들이 무엇인가에 기대고 싶어하는 사회심리와 결합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박근용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이러한 국정원에 대한 감시견제를 하려면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청문회를 열어 그것이 가능하게 해야 하는데여기에 제도적인 한계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19대 국회에서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이었던 김광진 의원 말에 의하면 자료에 대한 자료 열람의 권한은 의원에게만 있고 보좌관들에게는 없다고 한다그 수많은 데이터를 의원 혼자서 다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국정원에 대한 견제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국정원이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분석평가하는 권한까지 다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의원 보좌관까지 그 자료를 열람할 수 없게끔 만든 것은 다시 한번 국정원의 폐쇄성을 실감할 수 있는 예시였다


    이러한 국정원이 지난 19대 국회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의 무기한 필리버스터를 이끌어 내면서 추진한 테러방지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이광철 변호사는 테러방지법에서 정의한 테러의 개념이 상당히 모호하며이는 대테러활동이 민중총궐기나 대중들의 정부에 대한 상식적인 차원의 시위마저 테러로 규정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이변호사는 테러방지법의 9조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전의 훈령인 국가대테러활동지침” 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했다. 9조의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용어, “테러위험인물이라는 것이 과연 지금까지 국정원이 줄기차게 감시해오던 정치적 반대세력과 다른 세력인가여당이 이러한 우려에 대해 단 한 글자도 바꿀 수 없다” 고 말한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러한 법적인 결함은 결국 우리 사회가 분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일 것이라는 이변호사의 지적에 나는 동감한다.


    공포를 이용한 마케팅은 종종 경영학에서 좋은 사례로 지적된다이를테면 폐암의 공포를 통해 흡연자가 금연을 하게 되고 음주운전에 대한 공포를 강화하여 사람들이 더욱 교통법규를 지키게 되었다는 점은 그 결과로 보았을 때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 같이 보인다테러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테러위험방지 인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권한이 정말로 국가전체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원칙적으로만 보면 그것이 정치적 문제가 될 리 없을 것이다전 세계 어느 나라도 첩보를 하지 않는 국가는 거의 없을 것이며 전쟁의 위험에 대비하지 않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그러한 차원에서 대를 위해 소를 양보하는 것은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국정원은 국가를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신한 것이 아닌 극우 헤게모니를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신하고 국민에게 신뢰를 잃어왔다.




    프레임 전쟁은 때와 장소를 불문한다우리나라의 건국 이후로 그 어떤 프레임보다 강한 정치적 프레임은 역시 종북 프레임일 것이다이 나라의 안전보장에 위협을 가하는 인물과 국내의 정치세력 일부를 동일시 여기는 태도는 우리가 아직도 냉전식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미 대선을 앞두고 미국 양당이 외교정책을 두고 분열이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미국은 외교에 있어 양당이 상당한 문제에 대해 협력하는 모습을 항상 보여왔고 서로 분열이 되어 있는 이슈들은 통상 국내문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우리는 그와 반대다우리도 물론 국내의 이슈들로 많이 갈라서 있기는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북한이나 미국에 대한 입장일 것이다하지만 2016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극단적인 반미와 종북세력은 없거나 극히 미진한 수준일 것이라 믿는다이러한 차원에서 정권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자국민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국정원의 접근방식은 분명 바뀌어야 할 것이라 본다이러한 다소 무거운 주제에 대해 시사토론을 열어주신 역사문제연구소에 감사함을 전달한다.




    이정엽 :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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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2016.06.04 11:02 역문연 광장

    인천 답사를 다녀와서

    권영서 (신성고역사동아리 등불)

     

        평소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고 역사를 좋아했지만 답사 같은 활동은 잘 다녀보지 않아서 어떻게 진행되고 무슨 활동을 하는지 잘 몰랐다. 동아리에서 답사활동을 간다기에 진로랑 관련도 있고 관심이 있어서 신청을 해서 아이들과 선생님이랑 모여서 안양역에서 인천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가는길이 좀 힘들긴 했다. 주말이여도 출근시간이랑 겹쳐서 사람이 무지하게 많았다. 도착하고 나니 역 앞에 차이나 타운 입구가 보이고 역이 되게 허름해 보여서 번화하지 않은 동네 같이 보였다. 그냥 안좋은 동네에 차이나 타운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분들이 오셔서 책을 나누어 주셨는데 잘 만드신 것 같았다. 잘 정리되어 있었고 우리가 가는 코스와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보기가 참 편했다. 사실 역사문제연구소라고 들어는 봤는데 그곳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그렇게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느낀 것은 되게 좋은 일들과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이 됐다.

     

     

        차이나 타운에 들어서서 처음 본건 패루 중국식 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패루는 여행프로그램 같은데에서 본적이 있어서 그렇게 막 신기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점은 놀라웠다. 그 다음에 차이나타운안으로 안 들어가고 옆으로 돌아간게 차라리 좋았던 것 같다. 안쪽으로 가서 사람이 북적거려 혼란스러울 바에는 차라리 옆쪽을 돌면서 보는 것이 좋았다. 처음에 공화춘을 봤는데 그렇게 별로 외관이라 던지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고 말 안하면 잘 모를 것 같은 평범한 건물이었다. 거기서 화교들이라던지 여러 이야기를 듣고 인천화교 중산중학교에 갔는데 그렇게 화교들이 차별을 당하고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직 우리나라에 차별같은 일들이 참 많고 같은 사람인데 어찌 그렇게 차별하는지 이해를 할수 없었다.

     

        그리고 만국공원으로 올라 갔는데 경치가 생각보다 좋았다. 거기서 월미도 이야기를 듣고 올라가서 맥아더 장군동상을 봤는데 맥아더장군에 대해 생각해보면 솔직히 약간 이중적인 것같다. 동기를 중시한다면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결과만 따지자면 우리나라에겐 영웅이기 때문에 동상을 세운 것 같다. 나는 차라리 다른 독립운동가들 혹은 위인들 동상을 세우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공원을 나오고 나서 제물포 구락부에 갔는데 제일 먼저 웃겼던건 구락부가 클럽을 표현한 말이라는 것에 웃겼고 내부가 진짜 서양 클럽처럼 장식되어 있어서 놀랐다. 또한 대불호텔 터라던지 일본우선주식회사 같은 곳도 다 둘러 보았지만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건 뭐니뭐니해도 답동성당이다. 사실 나는 무교라 종교 적인 것에 큰 관심은 없지만 종교와 관련된 예술품들은 되게 좋아 하는 편이다. 특히 3개의 종과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가 정말로 멌있었다.

     

        그렇게 해서 배다리에 가서 설명을 다 듣고나니 다리도 아프고 힘들기도 했지만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주말 하루를 쓰고 온게 아깝지 않은 답사였고 맨날 번화한 도시라고만 생각했던 인천에 이런곳도 있고 참 역사가 깊은 동네라고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역사공부도 열심히 해서 꼭 역사교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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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