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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이 여는 것, 열림이라는 해방

 

석민구

 

 

해방을 묻다

 

  두 해 전쯤 처음으로 만주출정가를 들어보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서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던 와중 한 선배가 핸드폰으로 공연 영상을 찾아 틀었던 것이다. 무대랄 것도 없는 조촐한 장소에서 소박하게 노래를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처연함과 결기어림이 섞여있는 듯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핸드폰의 조야한 음질마저도 그런 미묘한 정서를 돋우는 느낌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새벽녘 이북의 추위를 마주하며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앞부분의 노랫말에서는 처연함이 느껴졌지만, ‘해방의 그날까지 총칼을 들고 나가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내용의 후렴구는 강한 결의로 가득했다. 적어도 이 시기 대부분의 식민지 조선인에게 해방이란 무장투쟁과 그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쟁취해야 할 독립을 말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때, 해방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아오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주권을 강탈해 간 일제라는 명확한 적대의 대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독립이라는 형태로 맞이한 해방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간단한 문제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오키나와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는.

 

  조선은 1910년 한일병합에 따라 공식적으로 제국일본의 일부로, 즉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외지(外地)와 내지(內地)의 경계가 뚜렷하게 존재했다. 이는 식민지와 식민모국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오키나와와 일본의 관계는 이와 달리 보다 중층적인 차원에 놓여있었다. 오키나와 문제의 어려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어려움을 바탕으로 오키나와에서 해방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늘, 해방 7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하는 우리에게 어떤 지평을 보여줄 수 있을까.

 

 

 

놓임돌(礎石), 버림돌(捨石), 쐐기돌(要石)

 

  1879, ‘류큐처분이라고 불리는 류큐 지역에 대한 메이지 정부의 폭력적 병합이 이뤄지면서 류큐라는 고유의 명칭은 오키나와로 바뀌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철저한 준비 아래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설계에 따라 이뤄진 류큐병합은 제국일본의 초석이 된 작업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전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 간 질서였던 조공-책봉 체제를 무력화시키고 근대 국제법 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본은 류큐를 수단 삼아 대만을 침공하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만을 할양받는다. 이른바 첫 번째 외지(外地)의 탄생이다. 그 후 여세를 몰아 일본은 15년 뒤 조선을 병합한다. 대만과 조선 모두 류큐병합의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 삼아 효과적으로 식민지화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국일본의 식민지 중 제국대학이 설립되었던 유이한 두 외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화는 이렇게 일본이 오키나와를 놓임돌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2차 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 의해 버림돌로 이용된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 민중에게는 이전에 비해서도 훨씬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의 폭력이 가해졌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패색이 짙어진 일본 정부는 천황제를 골간으로 하는 국체를 수호하기 위해(국체호지) 최대한 평화협상을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 오키나와에서 최대한 전황을 지지부진하게 끌 것을 명령한 것이다(버림돌 작전).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이 상륙한 4월 이후부터 지옥도가 펼쳐졌다. 오키나와전을 통틀어 가장 큰 희생을 겪은 단위는 오키나와 주민과 오키나와현 출신 군인이었고 이들의 수는 약 12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오키나와 거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숫자는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섬에서 이어졌던 죽음들의 비참함을 가려버린다. ‘가마(ガマ)’에서의 옥쇄로 상징되는 주민들의 반강제적 집단자살이나, 패주하는 일본군에 의해 갖은 명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경험은 아직도 상흔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상륙 이후부터 미군은 본토공격을 위해 점령지역 전체를 기지화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그 과정에서 거의 모두가 수용소에 격리 수용되었고, 막대한 규모의 민유지, 공유지가 미군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접수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계속 오키나와에 주둔하면서 섬을 장기적으로 보유하려는 시도를 계획했는데, 미국의 전후 세계패권 전략에 있어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미 군부가 오키나와를 가리켜 태평양의 쐐기돌(keystone)’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쐐기돌은 아치를 만들 때 마지막으로 정중앙에 박아넣는 돌을 일컫는 말로 쐐기돌을 통해 아치는 장력을 유지할 수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기지사회삼아 부여한 역할은 정확히 이 쐐기돌과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오키나와는 5,60년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전폭기가 분 단위로 출격하는 전초기지였다. 적어도 오키나와에서만큼은 1945년 이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전후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전전부터 전후까지, 오키나와는 언제나 본토-점령국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수단으로 존재해왔다. 어쩌면 이 수단-이용됨으로부터 벗어남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오키나와에서 해방을 찾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해방국체

 

  여기서 잠시, 또 다른 해방을 떠올려보자. 오키나와현 오키나와시 남동쪽 해안에는 카이호우’, 해방(海邦)’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다. 바다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이곳에서 1987년 국민체육대회가 열린다.

 

  매년 각 도도부현을 순회하며 개최되는 일본 내 최대 규모의 체육대회 이름은 국민체육대회, 약칭 국체(国体)이다. 1987년 가을 제 42회 국체의 개최지는 오키나와였다. ‘카이호우국체’(海邦国体)라는 테마와 빛나는 태양, 퍼져가는 우정’(きらめく太陽 ひろがる友情)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이 대회에는 단순한 체육대회 이상의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1987년이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15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 더해 천황의 개회식 출석여부, 대회에서의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둘러싼 논의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87년의 국체(국민체육대회)가 일본의 국체를 묻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카이호우국체를 전후해 쇼와천황의 방문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19452월에 있었던 고노에 수상과 천황 사이의 대화 내용이 대중적 차원으로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19479월의 천황 메시지에 대한 천황의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또한 대회를 앞두고 문부성이 학교마다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 지도를 통지한 일은 과거 오키나와 내지화(內地化) 과정에서 강제되었던 황민화 교육을 떠올리게 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표상인 천황()과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대한 질문은 다시 한 번 가장된 자연으로서의 국체를 문제화시켰다.

 

  푸코가 계보학적 연구를 통해 밝혔듯이 근대는 훈육을 통해 국민이라는 국가의 신체를 만들어 낸 과정이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국체(‘국체(国体)’와 국민체육대회)는 서로 연결된다. 국민()이라는 몸()을 기르는() 것은 동시에 개별 국민의 신체에 국가라는 상징 제도를 자연화/내면화시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오키나와 인민의 목숨을 담보로 오키나와를 버림돌로 삼으면서까지 일본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천황제의 존속이었다. 결국 전쟁범죄에 큰 책임이 있었던 황실과 천황제는 오키나와의 희생으로 만세일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전전과 전후가 실은 단절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6,70년대에 때로 과격무장투쟁까지 감수했던 운동세력은 바로 이 전후 민주주의의 기만적 본질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경우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현재와 단절할 것을 요청했는데, 그것은 국가라는 신체를 매개로 연결된 역사적 시간의 성격을 밝히는 일이기도 했다.

 

 

미결성(openness)으로서의 해방

 

그것은 육지인지 파도 위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길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르게 이어진다.

긴 행렬은 하나의 친화가 되어 앞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비옥한 대륙을 향해 입국권도 필요 없고 세관원도 없는 자유의 천지로 건너가자고 한다.

- 마키미나토 도쿠조(牧港篤三), 계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순간 국가로부터 버려진 존재, 난민이 되었다. 그러나 버림과 점령의 부침 사이에서, 유랑과 수용의 경험 사이에서 도리어 그들은 제도로서의 국가를 상대화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야카부시’, ‘패전숫자풀이노래등 종전 직후에 사람들 사이에서 불려진 노래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모리 요시오는 이러한 노래들에 주목할 것을 말하면서 전후 오키나와의 대표적 예능인(芸能人)인 데루야 린스케(照屋林助)를 인용한다. 데루야에 따르면 옛날 오키나와에는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았기에 글 대신 노래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체험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글씨를 가지지 않는 이들의 일기이자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 기록되지 않은 기록, (국가에 의해) 역사화 되지 않은 기록은 언제나 이야기로, 노래로 민중 사이에서 불려질 것이다. 히노마루나 기미가요가 고정화된 역사적 시간의 표상인 것과 달리, 민중의 노래에는 도래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자화를 거부하는 이야기에는 수없이 많은 변주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질서를 세우거나, 경계를 구획하거나, 성격을 규정하는 언어가 아니다. 민중의 노래를 통해 과거는 계속해서 현재화되고, 현재는 수많은 다른 미래가 열리는 장()이 된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토피아의 조감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를 형성해버린’ “질서로서의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될 수 없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운동하는 미결성의 장소”(도미야마 이치로)로서.

 

 

 

 

수단을 넘어서

 

  오키나와 비극의 시작은 근대의 출현과 함께 일본과 미국이 번갈아가며 오키나와를 수단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다. 이미 어떤 결과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서 무언가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고의 폭력이 생겨난다. 전후 오키나와 민주주의의 발자취는 이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었다. 이어지는 투쟁은 곧 이데올로기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어짐”(모리 요시오)으로 전개되었다.

 

  모리 요시오는 이 미결성의 이어짐()’ 또는 이어지는 미결성()’을 가리켜 땅 속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때 땅 속의 혁명은 아직 결과로 드러나지 않은 운동이며 결과를 상정하지 않는, 그렇기에 운동에서 운동으로 과정에서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오키나와를 수단으로 삼아왔던 지난날의 역사를 비판함과 동시에 섣불리 오키나와를 평화의 섬, 해방의 놓임돌로 말하는 언어도 경계해야 한다. 그 역시 평화와 해방을 닫힌 결말로 상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주출정가는 독립 해방의 전위가 될 것을 다짐하는 노래였다. 그러나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해방의 의미는 노래가 말하는 바와는 다를 것이다. 이제 해방의 해방적 성격은 총칼을 든 전위가 앞서 나아가서 쟁취하고 달성한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를 만드는 지금의 운동과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해방이 획득한 결과물이 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닫힌 세계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해방에 대한 혹은 해방이 요구하는 무한한 물음 속에서 가시화된 결말의 형태(국가, 체제, 또는 집단), 설령 그것이 해방을 보장해줄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체화하는 것 대신 해방의 감각을 소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석민구:

중앙대학교 유럽문화학부에서 독일어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계속해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한다.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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