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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에세이들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강좌; 후기] 해방-화교편 (김선호)

해방 - 화교편

 

김선호(2015.8.26)

 

 

차이나타운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해외여행 중 일본에서 차이나타운을 본 이후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3대 차이나타운을 모두 가보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나가사끼의 차이나타운은 규모도 제법 크고 2, 3대째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일본에 비해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보잘 것 없었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화교들이 별로 없었다.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현대적 공간이 맥도날드라면,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근대적 공간은 차이나타운이다. 뉴욕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고, 런던에도 있고, 중국의 반대편 멕시코에도 있다. 물론 해방전 한국에도 8만명이 넘는 화교가 살았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화교는 겨우 2만명을 헤아린다. 그 많던 화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세 개의 사건

 

  해방 70주년을 맞이해 한국화교에 대한 발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막연하다 못해 뜬구름잡는 궁금증을 가지고 제기동으로 향했다. 내가 화교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란, 1930년대 만보산사건과 박정희정부때 화교들이 대만으로 많이 돌아갔다는 정도였다. 발표자가 한국에서 살았던 화교라고 하니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도착한 역사문제연구소 강당에는 청중이 별로 없었다. 주최측은 난감했겠지만, 소담한 걸 좋아하니 내겐 안성맞춤이었다. 곧 강연이 시작되었고, 70년동안 살아온 화교들의 희노애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해방후 70년동안 한국사회에서 화교들이 잊혀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주목받은 시기는 역사적으로 두 번 정도 있었다. 이승만정부때와 박정희정부때다. 이승만정부때는 수입업자로 먹고살던 화교들에게 수입상품을 제한했고, 거주자격 심사를 강화했다. 박정희정부때는 외국인토지법을 만들어 화교들이 50평 이하의 상점 단 1개만 소유하도록 제한했다. 화교들에게 한국정부 수립은 기쁨이 아니라 억업과 구속의 시작이었다. 박 정부의 화교억압정책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아무리 화교의 경제력이 높아진들 한국경제 전반을 좌우할리 만무한데, 그 억압의 정도는 깊고 철저했다. 억압정책의 밑바닥에는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있었을까? 이같은 궁금증은 문민정부이후 현재까지 한국정부의 화교정책을 들으면서 해소되었다.

 

  왕은미 교수는 해방 70주년 중 화교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사건으로 1992년 한중수교, 1997IMF사태, 2005년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를 꼽았다. 이 세가지 사건이 한국 화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화교들에게 한국인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왜일까?

 

  첫째, 화교들에게 한중수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가 아니라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를 뜻했다. 화교들은 해방후 중화민국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한중수교가 체결되자 중화민국은 한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국교를 단절한 날, 서울 중화민국대사관에서 국기하강식이 거행되자 식장은 화교들의 울음으로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삶은 계속 살아야했다. 2000년에 들어서 중화민국에 민진당정부가 들어서자 화교사회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화교들에게 있어서 중화민국은 바로 국민당정부였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민진당정부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고, 중화민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반대로 화교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다.

 

  둘째, 1997IMF사태는 뜻하지않게 화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IMF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 한국정부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소유제한을 전면 철폐했다. 1968년에 만들어진 토지소유제한은 30년동안 화교들의 경제성장을 억압한 가장 대표적인 규제였다. 화교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50평이 넘는 가게를 소유할 수 없었고, 분점을 가질수도 없었다. 문제는 토지소유제한 전면 철폐가 화교에 대한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달러가 부족했던 정부가 외국인의 국내 부동산 보유를 허용함으로써 외환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1992년 한중수교와 똑같이 법률의 도입제정공포에서 화교는 아예 관심 밖에 있었다. 70년동안 화교정책의 핵심은 근본적 차별과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셋째, 외국인토지법 개정이 화교들에게 경제활동을 길을 열어줬다면, 2005년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는 화교들에게 정치활동을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온전히 화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정치권은 일본정부에 재일동포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의 재일동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화교들에게 영주자격과 지방참정권을 보장하는 법률을 마련한 것이다. 우리도 못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는게 애시당초 이치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여 2002년 화교들에게 영주자격이 부여되었고, 2005년 지방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의 바램와 달리 재일동포의 정치적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이로서 2005년에 이르러 한국의 화교들은 다른 나라의 중국인들이 몇십년전부터 누려온 권리의 한자락을 가지게 되었다.

 

 

주현미와 이연복

 

  강연은 1시간 안팎이었고, 몇 명의 청중은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그러나 나는 질문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사람에 대한 의문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했을까? 또 한국정부는 왜 화교들을 이처럼 철저히 억압했을까? 그리고 한국인들은 왜 화교들에게 이처럼 무관심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 떠오른 인물은 주현미와 이연복이다. 트로트 가수인 주현미는 화교3세로 아버지가 중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1980년대 한국 최고의 가수였는데, 화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TV에 안나왔다. 그 때문에 괜히 화교3세인 하희라까지 덩달아 욕을 먹었다. 이연복은 현재 방송에서 가장 핫한 요리사다. 어느 방송에 나와 자신이 화교라고 얘기하는 걸 보고 한국도 많이 변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변하지 않은게 더 많았다. 그의 주변에는 직장인이나 공무원인 화교가 없었다. 화교 청년들에게 중국집말고 선택할 직업이 없었으니까.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이처럼 다른 민족에 대한 배척과 억압을 먹고 자라왔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재일동포 3, 4세들이 회사나 공공기관에 취직하기 어려워 대부분 장사나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알고 있다. 그래서 어릴때부터 일본학교에 다니거나 일본으로 귀화하는 재일동포도 많다. 그리고 재일동포들은 대개 이름이 두 개다. 본명(本名-한국이름)과 통명(通名-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다. 재일동포들이 통명을 쓰는 것은 이름 때문에 차별받지 않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한국으로 눈을 돌려 생각해보자. 70년의 세월동안 자식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한국식 이름을 지은 화교 부모는 없을까? 화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마조마하며 한국학교를 다닌 화교 아이들은 없을까? 지금도 2만명이 넘는 화교가 이 땅에 산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15년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동포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또다른 화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래 잘 모르면 말이 길고, 대충 알면 글이 긴 법이다. 각설하자. 남을 비판하기는 쉬우나 나를 돌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70년동안 한반도에 살아온 화교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과 우애(友愛)를 보낸다.

 

 


 

김선호:

북한 인민군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