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 화교편

 

김선호(2015.8.26)

 

 

차이나타운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해외여행 중 일본에서 차이나타운을 본 이후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3대 차이나타운을 모두 가보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나가사끼의 차이나타운은 규모도 제법 크고 2, 3대째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일본에 비해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보잘 것 없었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화교들이 별로 없었다.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현대적 공간이 맥도날드라면,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근대적 공간은 차이나타운이다. 뉴욕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고, 런던에도 있고, 중국의 반대편 멕시코에도 있다. 물론 해방전 한국에도 8만명이 넘는 화교가 살았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화교는 겨우 2만명을 헤아린다. 그 많던 화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세 개의 사건

 

  해방 70주년을 맞이해 한국화교에 대한 발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막연하다 못해 뜬구름잡는 궁금증을 가지고 제기동으로 향했다. 내가 화교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란, 1930년대 만보산사건과 박정희정부때 화교들이 대만으로 많이 돌아갔다는 정도였다. 발표자가 한국에서 살았던 화교라고 하니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도착한 역사문제연구소 강당에는 청중이 별로 없었다. 주최측은 난감했겠지만, 소담한 걸 좋아하니 내겐 안성맞춤이었다. 곧 강연이 시작되었고, 70년동안 살아온 화교들의 희노애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해방후 70년동안 한국사회에서 화교들이 잊혀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주목받은 시기는 역사적으로 두 번 정도 있었다. 이승만정부때와 박정희정부때다. 이승만정부때는 수입업자로 먹고살던 화교들에게 수입상품을 제한했고, 거주자격 심사를 강화했다. 박정희정부때는 외국인토지법을 만들어 화교들이 50평 이하의 상점 단 1개만 소유하도록 제한했다. 화교들에게 한국정부 수립은 기쁨이 아니라 억업과 구속의 시작이었다. 박 정부의 화교억압정책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아무리 화교의 경제력이 높아진들 한국경제 전반을 좌우할리 만무한데, 그 억압의 정도는 깊고 철저했다. 억압정책의 밑바닥에는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있었을까? 이같은 궁금증은 문민정부이후 현재까지 한국정부의 화교정책을 들으면서 해소되었다.

 

  왕은미 교수는 해방 70주년 중 화교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사건으로 1992년 한중수교, 1997IMF사태, 2005년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를 꼽았다. 이 세가지 사건이 한국 화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화교들에게 한국인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왜일까?

 

  첫째, 화교들에게 한중수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가 아니라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를 뜻했다. 화교들은 해방후 중화민국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한중수교가 체결되자 중화민국은 한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국교를 단절한 날, 서울 중화민국대사관에서 국기하강식이 거행되자 식장은 화교들의 울음으로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삶은 계속 살아야했다. 2000년에 들어서 중화민국에 민진당정부가 들어서자 화교사회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화교들에게 있어서 중화민국은 바로 국민당정부였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민진당정부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고, 중화민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반대로 화교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다.

 

  둘째, 1997IMF사태는 뜻하지않게 화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IMF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 한국정부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소유제한을 전면 철폐했다. 1968년에 만들어진 토지소유제한은 30년동안 화교들의 경제성장을 억압한 가장 대표적인 규제였다. 화교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50평이 넘는 가게를 소유할 수 없었고, 분점을 가질수도 없었다. 문제는 토지소유제한 전면 철폐가 화교에 대한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달러가 부족했던 정부가 외국인의 국내 부동산 보유를 허용함으로써 외환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1992년 한중수교와 똑같이 법률의 도입제정공포에서 화교는 아예 관심 밖에 있었다. 70년동안 화교정책의 핵심은 근본적 차별과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셋째, 외국인토지법 개정이 화교들에게 경제활동을 길을 열어줬다면, 2005년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는 화교들에게 정치활동을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온전히 화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정치권은 일본정부에 재일동포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의 재일동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화교들에게 영주자격과 지방참정권을 보장하는 법률을 마련한 것이다. 우리도 못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는게 애시당초 이치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여 2002년 화교들에게 영주자격이 부여되었고, 2005년 지방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의 바램와 달리 재일동포의 정치적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이로서 2005년에 이르러 한국의 화교들은 다른 나라의 중국인들이 몇십년전부터 누려온 권리의 한자락을 가지게 되었다.

 

 

주현미와 이연복

 

  강연은 1시간 안팎이었고, 몇 명의 청중은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그러나 나는 질문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사람에 대한 의문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했을까? 또 한국정부는 왜 화교들을 이처럼 철저히 억압했을까? 그리고 한국인들은 왜 화교들에게 이처럼 무관심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 떠오른 인물은 주현미와 이연복이다. 트로트 가수인 주현미는 화교3세로 아버지가 중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1980년대 한국 최고의 가수였는데, 화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TV에 안나왔다. 그 때문에 괜히 화교3세인 하희라까지 덩달아 욕을 먹었다. 이연복은 현재 방송에서 가장 핫한 요리사다. 어느 방송에 나와 자신이 화교라고 얘기하는 걸 보고 한국도 많이 변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변하지 않은게 더 많았다. 그의 주변에는 직장인이나 공무원인 화교가 없었다. 화교 청년들에게 중국집말고 선택할 직업이 없었으니까.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이처럼 다른 민족에 대한 배척과 억압을 먹고 자라왔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재일동포 3, 4세들이 회사나 공공기관에 취직하기 어려워 대부분 장사나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알고 있다. 그래서 어릴때부터 일본학교에 다니거나 일본으로 귀화하는 재일동포도 많다. 그리고 재일동포들은 대개 이름이 두 개다. 본명(本名-한국이름)과 통명(通名-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다. 재일동포들이 통명을 쓰는 것은 이름 때문에 차별받지 않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한국으로 눈을 돌려 생각해보자. 70년의 세월동안 자식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한국식 이름을 지은 화교 부모는 없을까? 화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마조마하며 한국학교를 다닌 화교 아이들은 없을까? 지금도 2만명이 넘는 화교가 이 땅에 산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15년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동포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또다른 화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래 잘 모르면 말이 길고, 대충 알면 글이 긴 법이다. 각설하자. 남을 비판하기는 쉬우나 나를 돌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70년동안 한반도에 살아온 화교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과 우애(友愛)를 보낸다.

 

 


 

김선호:

북한 인민군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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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이 여는 것, 열림이라는 해방

 

석민구

 

 

해방을 묻다

 

  두 해 전쯤 처음으로 만주출정가를 들어보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서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던 와중 한 선배가 핸드폰으로 공연 영상을 찾아 틀었던 것이다. 무대랄 것도 없는 조촐한 장소에서 소박하게 노래를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처연함과 결기어림이 섞여있는 듯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핸드폰의 조야한 음질마저도 그런 미묘한 정서를 돋우는 느낌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새벽녘 이북의 추위를 마주하며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앞부분의 노랫말에서는 처연함이 느껴졌지만, ‘해방의 그날까지 총칼을 들고 나가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내용의 후렴구는 강한 결의로 가득했다. 적어도 이 시기 대부분의 식민지 조선인에게 해방이란 무장투쟁과 그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쟁취해야 할 독립을 말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때, 해방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아오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주권을 강탈해 간 일제라는 명확한 적대의 대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독립이라는 형태로 맞이한 해방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간단한 문제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오키나와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는.

 

  조선은 1910년 한일병합에 따라 공식적으로 제국일본의 일부로, 즉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외지(外地)와 내지(內地)의 경계가 뚜렷하게 존재했다. 이는 식민지와 식민모국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오키나와와 일본의 관계는 이와 달리 보다 중층적인 차원에 놓여있었다. 오키나와 문제의 어려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어려움을 바탕으로 오키나와에서 해방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늘, 해방 7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하는 우리에게 어떤 지평을 보여줄 수 있을까.

 

 

 

놓임돌(礎石), 버림돌(捨石), 쐐기돌(要石)

 

  1879, ‘류큐처분이라고 불리는 류큐 지역에 대한 메이지 정부의 폭력적 병합이 이뤄지면서 류큐라는 고유의 명칭은 오키나와로 바뀌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철저한 준비 아래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설계에 따라 이뤄진 류큐병합은 제국일본의 초석이 된 작업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전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 간 질서였던 조공-책봉 체제를 무력화시키고 근대 국제법 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본은 류큐를 수단 삼아 대만을 침공하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만을 할양받는다. 이른바 첫 번째 외지(外地)의 탄생이다. 그 후 여세를 몰아 일본은 15년 뒤 조선을 병합한다. 대만과 조선 모두 류큐병합의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 삼아 효과적으로 식민지화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국일본의 식민지 중 제국대학이 설립되었던 유이한 두 외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화는 이렇게 일본이 오키나와를 놓임돌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2차 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 의해 버림돌로 이용된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 민중에게는 이전에 비해서도 훨씬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의 폭력이 가해졌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패색이 짙어진 일본 정부는 천황제를 골간으로 하는 국체를 수호하기 위해(국체호지) 최대한 평화협상을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 오키나와에서 최대한 전황을 지지부진하게 끌 것을 명령한 것이다(버림돌 작전).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이 상륙한 4월 이후부터 지옥도가 펼쳐졌다. 오키나와전을 통틀어 가장 큰 희생을 겪은 단위는 오키나와 주민과 오키나와현 출신 군인이었고 이들의 수는 약 12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오키나와 거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숫자는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섬에서 이어졌던 죽음들의 비참함을 가려버린다. ‘가마(ガマ)’에서의 옥쇄로 상징되는 주민들의 반강제적 집단자살이나, 패주하는 일본군에 의해 갖은 명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경험은 아직도 상흔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상륙 이후부터 미군은 본토공격을 위해 점령지역 전체를 기지화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그 과정에서 거의 모두가 수용소에 격리 수용되었고, 막대한 규모의 민유지, 공유지가 미군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접수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계속 오키나와에 주둔하면서 섬을 장기적으로 보유하려는 시도를 계획했는데, 미국의 전후 세계패권 전략에 있어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미 군부가 오키나와를 가리켜 태평양의 쐐기돌(keystone)’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쐐기돌은 아치를 만들 때 마지막으로 정중앙에 박아넣는 돌을 일컫는 말로 쐐기돌을 통해 아치는 장력을 유지할 수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기지사회삼아 부여한 역할은 정확히 이 쐐기돌과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오키나와는 5,60년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전폭기가 분 단위로 출격하는 전초기지였다. 적어도 오키나와에서만큼은 1945년 이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전후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전전부터 전후까지, 오키나와는 언제나 본토-점령국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수단으로 존재해왔다. 어쩌면 이 수단-이용됨으로부터 벗어남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오키나와에서 해방을 찾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해방국체

 

  여기서 잠시, 또 다른 해방을 떠올려보자. 오키나와현 오키나와시 남동쪽 해안에는 카이호우’, 해방(海邦)’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다. 바다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이곳에서 1987년 국민체육대회가 열린다.

 

  매년 각 도도부현을 순회하며 개최되는 일본 내 최대 규모의 체육대회 이름은 국민체육대회, 약칭 국체(国体)이다. 1987년 가을 제 42회 국체의 개최지는 오키나와였다. ‘카이호우국체’(海邦国体)라는 테마와 빛나는 태양, 퍼져가는 우정’(きらめく太陽 ひろがる友情)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이 대회에는 단순한 체육대회 이상의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1987년이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15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 더해 천황의 개회식 출석여부, 대회에서의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둘러싼 논의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87년의 국체(국민체육대회)가 일본의 국체를 묻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카이호우국체를 전후해 쇼와천황의 방문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19452월에 있었던 고노에 수상과 천황 사이의 대화 내용이 대중적 차원으로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19479월의 천황 메시지에 대한 천황의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또한 대회를 앞두고 문부성이 학교마다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 지도를 통지한 일은 과거 오키나와 내지화(內地化) 과정에서 강제되었던 황민화 교육을 떠올리게 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표상인 천황()과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대한 질문은 다시 한 번 가장된 자연으로서의 국체를 문제화시켰다.

 

  푸코가 계보학적 연구를 통해 밝혔듯이 근대는 훈육을 통해 국민이라는 국가의 신체를 만들어 낸 과정이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국체(‘국체(国体)’와 국민체육대회)는 서로 연결된다. 국민()이라는 몸()을 기르는() 것은 동시에 개별 국민의 신체에 국가라는 상징 제도를 자연화/내면화시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오키나와 인민의 목숨을 담보로 오키나와를 버림돌로 삼으면서까지 일본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천황제의 존속이었다. 결국 전쟁범죄에 큰 책임이 있었던 황실과 천황제는 오키나와의 희생으로 만세일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전전과 전후가 실은 단절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6,70년대에 때로 과격무장투쟁까지 감수했던 운동세력은 바로 이 전후 민주주의의 기만적 본질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경우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현재와 단절할 것을 요청했는데, 그것은 국가라는 신체를 매개로 연결된 역사적 시간의 성격을 밝히는 일이기도 했다.

 

 

미결성(openness)으로서의 해방

 

그것은 육지인지 파도 위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길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르게 이어진다.

긴 행렬은 하나의 친화가 되어 앞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비옥한 대륙을 향해 입국권도 필요 없고 세관원도 없는 자유의 천지로 건너가자고 한다.

- 마키미나토 도쿠조(牧港篤三), 계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순간 국가로부터 버려진 존재, 난민이 되었다. 그러나 버림과 점령의 부침 사이에서, 유랑과 수용의 경험 사이에서 도리어 그들은 제도로서의 국가를 상대화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야카부시’, ‘패전숫자풀이노래등 종전 직후에 사람들 사이에서 불려진 노래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모리 요시오는 이러한 노래들에 주목할 것을 말하면서 전후 오키나와의 대표적 예능인(芸能人)인 데루야 린스케(照屋林助)를 인용한다. 데루야에 따르면 옛날 오키나와에는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았기에 글 대신 노래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체험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글씨를 가지지 않는 이들의 일기이자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 기록되지 않은 기록, (국가에 의해) 역사화 되지 않은 기록은 언제나 이야기로, 노래로 민중 사이에서 불려질 것이다. 히노마루나 기미가요가 고정화된 역사적 시간의 표상인 것과 달리, 민중의 노래에는 도래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자화를 거부하는 이야기에는 수없이 많은 변주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질서를 세우거나, 경계를 구획하거나, 성격을 규정하는 언어가 아니다. 민중의 노래를 통해 과거는 계속해서 현재화되고, 현재는 수많은 다른 미래가 열리는 장()이 된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토피아의 조감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를 형성해버린’ “질서로서의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될 수 없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운동하는 미결성의 장소”(도미야마 이치로)로서.

 

 

 

 

수단을 넘어서

 

  오키나와 비극의 시작은 근대의 출현과 함께 일본과 미국이 번갈아가며 오키나와를 수단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다. 이미 어떤 결과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서 무언가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고의 폭력이 생겨난다. 전후 오키나와 민주주의의 발자취는 이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었다. 이어지는 투쟁은 곧 이데올로기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어짐”(모리 요시오)으로 전개되었다.

 

  모리 요시오는 이 미결성의 이어짐()’ 또는 이어지는 미결성()’을 가리켜 땅 속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때 땅 속의 혁명은 아직 결과로 드러나지 않은 운동이며 결과를 상정하지 않는, 그렇기에 운동에서 운동으로 과정에서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오키나와를 수단으로 삼아왔던 지난날의 역사를 비판함과 동시에 섣불리 오키나와를 평화의 섬, 해방의 놓임돌로 말하는 언어도 경계해야 한다. 그 역시 평화와 해방을 닫힌 결말로 상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주출정가는 독립 해방의 전위가 될 것을 다짐하는 노래였다. 그러나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해방의 의미는 노래가 말하는 바와는 다를 것이다. 이제 해방의 해방적 성격은 총칼을 든 전위가 앞서 나아가서 쟁취하고 달성한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를 만드는 지금의 운동과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해방이 획득한 결과물이 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닫힌 세계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해방에 대한 혹은 해방이 요구하는 무한한 물음 속에서 가시화된 결말의 형태(국가, 체제, 또는 집단), 설령 그것이 해방을 보장해줄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체화하는 것 대신 해방의 감각을 소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석민구:

중앙대학교 유럽문화학부에서 독일어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계속해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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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송윤희

 

 

  며칠 전에 한홍구 선생님 강의를 들었다. ‘노덕술(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밀고하고 고문한 사람)’에서 ‘이근안(민주화 운동하시던 분들을 고문하던 전기고문기술자)’으로 이어지는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화도 나고 나는 참 모르는 게 많구나 싶었다. 그래서 ‘해방의 마을로’ 답사 연수가 있어 참여하게 되었다. 순간순간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연구원님들의 설명을 들으며 지난 역사의 현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랐지만, 역사의 현장으로 온 ‘남산’은 처음이었다.

  일본공사관, 총독 관저, 조선총독부, 중앙정보부로 이어지는 모습이 참 공포스러웠다. 공간이든 사람이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는 변하지 않나보다. 조선 사람들을 억압했던 장소가 시민들을 억누르는 장소로 이어지는 것을 보니. 역사적으로 청산해야 할 무언가를 그냥 넘기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장소가 그에 대한 설명도 없고, 심지어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아 무척 아쉬웠다.

 

 

 

 

  월남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해방촌’. ‘잊고 싶은 실향의 아픔과 벗어나고 싶은 가난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표현만큼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골목마다 남아 있는 옛날 집들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이 공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과거보다 지금은 조금은 더 나아진 걸까? 시간이 많지 않아 골목을 충분히 걸어보지 못한 점이 아쉽다.

 

 

 

 

 

  시간을 머금고 있는 공간을 걸으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인데...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우선, 많이 알고 느껴야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가야겠다.

 

 

 

 

추신>

 

 

1. 뒷풀이 장소 ‘레아’ 정말 좋았어요. 맥주도, 노가리도. 물론 사람들이 제일 좋았습니다.

2. 현장 현장을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신 세 분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더 즐거웠어요.

3. 주신 책자 감사했어요. 다시 되돌아보기 참 좋아요!! 게다가 종이질이 너무 좋아요~

4.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추천 드리고 싶어요. 용산 주변 이야기 책인데... 역사를 잘 아시니 더욱더 좋을 것 같아요.

 

 


 

 

송윤희

사람들의 이야기 듣기. 영화 보기. 사람들. 초콜릿. 비.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요. ‘곁에’라는 이름을 좋아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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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정명섭


  공간은 기억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남산이라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와 남산타워, 사랑의 자무쇠로 알 잘려진 남산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였으며, 그리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답사에 운 좋게 참여하게 되었다. 충무로  역에 모여서 남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답사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들린 곳은 통감관저 터였다.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발을 뻗게 된 일본은 공사관을 세웠다. 처음 세워진 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불탔고, 새로 만든 공사관 역시 2년 후의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남산 중턱에 새로 영사관을 지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남산 근처인  진고개, 지금의 충무로에 자리를 잡게 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일본 영사관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통감부가 되었다가 왜성대에 새로운 통감부가 설치되자 관저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이 우리에게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곳 2층에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 처음을 다른 나라에게 주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이후 총독관저로 사용되다가 경복궁 뒤편,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관저가 지어지게 되면서 시정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아쉽게도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작은 공원 한구석에 통감부 터였다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해방 이후 군사용 건물로 만들어졌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이 지역에서 세워지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실 통감부 건물도 언제 사라졌는지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은 상태에서 마주치면 감흥이 좀 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텅 빈 공터에서도 충분히 그런 감상을 느낄 때가 많다. 통감부 터 역시 남아있는 것은 표지석 하나  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근대였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통감부 터 바로 옆의 작은 공원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늘 아래 긴 벤치가 있는데 나무가 아니라 돌로 만들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았다가 표면에 새겨진 한문을 발견했다. 답사를 안내해준 역사문제 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설명을 해줬다. 바로 한일강제병합 당시 일본 영사였던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좌대를 벤치로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동상까지 만들면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반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통감부 터 표지석과 벤치로 변한 하야시 곤스케에 동상 좌대를 보고 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바 캐릭터들이 세워져있는 애니메이션 센터에 도착하자 작은 표지석이 우리들을 반겼다. 1907년 만들어진 통감부 청사 자리였다는 표지석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본격적인 통치를 위해 남산에 세워진 통감부 청사는 르네상스 양식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우리에게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에 세워진 것 밖에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926년에 총독부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조선에 대한 통치와 지배가 이뤄졌다.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이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이곳에 잠입해서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벌인다. 그야말로 영화같은 이 이야기는 암울했던 당시는 물론이고 95년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가슴도 뜨겁게 만들었다. 증축을 거듭하던 남산의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에 새로운 총독부가 완성되면서 과학관으로 사용된다. 일본보다 한발 먼저 세워진 과학관은 일본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점과 개발 사업들을 선전하면서 장소가 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면서 표지석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라바 캐릭터 동상 사이에 세워진 표지석이 없다면 이곳이 과거에 어떤 장소였는지 알 수 없었다. 좀 더 큰 조형물을 만들어서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것은 김익상 의사의 의거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떨어진 곳에 세워져있었다는 점이다. 두 개를 나란히, 혹은 하나로 합쳐서 만들면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올라가게 되면 노기 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면서 곳곳에 자신들의 종교 시설은 신사를 세웠다. 정신적으로도 지배하겠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인데 남산에는 그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신사였던 조선신궁을 비롯해서 노기신사와 경성신사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기 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과 그 부인을 기리는 신사다. 두 사람은 메이지 천황이 죽자 나란히 순사를 했는데 일본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신사를 세운 것이다. 노기 신사는 경성신사에 부속된 신사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리라아트 고등학교 안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손을 씻는 수조와 석등 받침 등이 남아있다. 노기 신사에서 나와 좀 더 올라가면 숭의여대가 나온다. 이곳 교정의 한구석에는 이곳이 경성신사 터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사진이 남아있다.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신사는 이 땅이 일본의 것이 되면서 확장되어갔다.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유권을 빼앗긴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대로 이어온 전통을 부정당하고 지배자들의 종교와 정신을 주입당해야만 했다. 일본은 이 땅 곳곳에 신사를 지으면서 종교를 강요했다. 정신을 말살함으로서 이 땅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속셈을 보인 것이다. 남산에는 이런 신사들이 많이 세워졌다.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했던 충무로와 명동과 가까웠고,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때 조선인들의 숭배를 받았던 경성신사는 이후, 그들의 손에 의해 폐교된 기독교 계통의 학교 송의여학교가 들어선다. 교정의 안내판에도 숭의 정신이 일본의 제신을 눌렀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교정 건너편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에 세워져있다. 햇살 속에 우뚝 솟아있는 동상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다는 것이 지닌 의미를 떠올려봤다. 신사를 두 곳이나 봤지만 남산에는 신사들의 끝판왕 조선신궁이 있다. 신사보다 한 단계 위인 신궁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남산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는 이곳은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고 있다. 상징성과 규모에서 다른 신사들을 압도하는 이곳은 총독부와 더불어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이곳은 갈기갈기 찢겨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 경외심을 갖게 만들었던 계단은 1948년 겨울, 눈으로 덮힌 채 스키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변했다. 일본이 사라진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독재자 이승만이었다. 살아있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동상은 4.19의거로 파괴되었다.

 

 

 

 

  남산을 둘러보고 향한 곳은 해방촌이었다. 글자 그대로 해방 이후 남북분단이 진행되면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거주한 곳이었다. 남이 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남산에 있던 경성호국신사에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이후 해방촌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실향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급한 경사와 좁은 길을 보면서 그들의 팍팍했던 삶을 짐작해봤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골목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지어진 일본식 주택들이 남아있었다. 지방이 아닌 서울에 이렇게 많은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향민들의 거주지였던 해방촌은 최근에는 외국인들의 거주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끼리 바톤터치를 한 셈이다. 해방촌 주민들이 세운 해방교회를 지나 하늘 계단을 내려오자 시내와 마주쳤다. 오가는 버스와 사람들을 보면서 방금 지나쳐왔던 과거와 다른 세상을 만났다. 역사를 마주친다는 것은 일종의 몽상과 같다. 백 년 전의 세상을 이야기하고 걷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어떤 결정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면 역사는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물음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다. 역사란 ‘현실’ 그 자체다. 

 


정명섭: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백화점 경리와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치고, 현재는 글을 쓰고 있다. 이런저런 책을 썼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좀비부터 청소년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 중이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현재도 그것으로 전업 작가 생활을 버티고 있는 중이다. 남들보다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답사를 자주 다닌다. 역사는 종이 뿐만 아니라 발끝으로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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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