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5.09.16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영화와 포럼; 맛보기 에세이] 또 하나의 전후 일본사를 위해 (히라사와 고, 영화연구자)
  2. 2015.09.07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강좌; 맛보기 에세이] 재일조선인에게 해방이란 무엇이었는가?(이성, 한신대) (1)
  3. 2015.08.27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강좌; 후기] 해방-화교편 (김선호) (2)
  4. 2015.08.27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영화와 포럼; 맛보기 에세이] 해방으로 시작된 실어증 (백지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5. 2015.08.03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강좌; 후기] 해방이 여는 것, 열림이라는 해방 (석민구)
  6. 2015.08.02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답사; 후기]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송윤희)
  7. 2015.08.02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답사; 후기]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정명섭)
  8. 2015.08.02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강좌; 맛보기 에세이] 해방 70년, 한국화교에 대한 이해(왕언메이, 대만국립사범대 동아시아학과)
  9. 2015.07.17 <평화기행 참가자 대모집중!!!>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70주년맞이 평화기행
  10. 2015.07.12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영화와 포럼; 맛보기 에세이] '사랑과 맹세'에서 '자유만세'로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또 하나의 전후 일본사를 위해

 

히라사와 고(平沢剛, 영화연구자)

 

전쟁 직후의 일본 영화라면 전후 민주주의, 반전을 주제로 한 영화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영화는 GHQ의 점령 하에서 1945년부터 1952년까지 검열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이 시기에는 국가주의를 예찬하는 내용이나 사극 등의 장르가 금지되었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영화가 나왔으며, 검열 해제 후에 전쟁을 주제로 하는 영화가 잇달았다. 그 중에서 구로자와 아키라(黒澤明),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恵介), 이마이 다다시(今井正),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등 좌파 영화인에 의해 많은 걸작이 만들어졌으며, 일본의 전전(戰前) 군국주의의 철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전후 일본의 방향성이 제시되어 갔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 전후 민주주의와는 다른 가능성을 그려낸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 발표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는 일본 영화의 뉴웨이브로부터 등장하는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돼지와 군함(軍艦)(1961), 오오시마 나기사(大島渚)태양의 묘지(太陽墓場)(1960),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육체의 문(肉体)(1964), 마에다 요이치(前田陽一)일본 파라다이스(にっぽんぱらだいす)(1964), 와카마츠 고지(若松孝二)벽 속의 비사(秘事)(1965), 가토 다이(加藤泰)남자의 얼굴은 이력서(履歴書)(1966),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인의 없는 싸움(仁義なき)(1973), 모리사키 아즈마(森崎東)들개(野良犬)(1973) 그 전사로서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밤의 여인들(たち)(1948), 가와시마 유조(川島雄三)스자키 파라다이스 적신호(洲崎パラダイス赤信号)(1956) 처럼 새로운 국민국가의 부흥에서 배제된 하층계급, 재일조선인, 재일중국인을 그린 작품을 언급함으로써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전후 일본 영화사, 전후 일본사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히라사와 고(平沢剛):

가나가와현 출생. 현 메이지학원대학 언어문화연구소 연구원이다. 쓴 글로는 (35ぶりの帰還”)足立正生思想実践 独立映画可能性とは(2007) 등 다수가 있고アンダーグラウンド・フィルム・アーカイブス』(2003), ファスビンダー(2005) 등을 펴냈으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각종 상영회 기획에 참여하였다.

 

[연속기획 해방]의 대미를 장식할 이번 '영화와 포럼: 해방과 제국의 잔영-일본'은 히라사와 고 선생님의 강의로 9월 20일(일) 15시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일본

강사 히라사와 고 (영화연구자)

일시 9월 20일(월) 15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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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재일조선인에게 해방이란 무엇이었는가?

- 해방 70년을 맞이하여 -

이 성 (한신대)

 

   특별영주권을 가지는 재일조선인 인구는 현재 약 38만 명 정도다. 과거 최대 65만 명에 달했을 때도 있었지만 그 후 계속 줄어들고, 21세기 들어서는 연간 약 1만 명 가까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40년 후에는 재일조선인은 자연소멸될 것이라는 주장도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서 본국 국적 유지에 집착하다간 재일조선인이 소멸될 것이 뻔하므로 적극적으로 일본국적을 취득해서 조선계 일본인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재일조선인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다만 이미 귀화 등을 통해 상당수의 재일조선인이 일본국적을 취득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민족성을 상실해버린 현실을 볼 때 조선계 일본인이라는 집단이 뚜렷이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환상에 불과하고 결국은 일본 동화를 촉진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할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한편으로 재외국민에게 국정참정권을 부여하는 제도개혁이 한국에서 이루어져 한국국적을 가지는 재일조선인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엄연한 한국 국민인데도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도 주어지지 않은 채 한국 제도정치에서 소외되어온 한국국적 재일조선인이 해방 후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이다. 일본인화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비로소 한국 국민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이 국정참정권 행사를 계기로 재일조선인에게 본국이라는 존재는 무엇이며 본국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물음이 새삼 부상하고 있다.

 

    이렇듯 21세기 들어 재일조선인은 매우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재일조선인의 현주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들의 해방 후 역사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해방으로부터 한일회담을 거쳐 그들의 법적지위가 확정되는 시기는 재일조선인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틀이 형성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재일조선인에게 해방이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성(李誠):

한신대학교 겸임교수. 한국 현대사와 재일조선인사를 연구하고 있다. 쓴 글로 「재일코리안의 현황과 미래」, 『통일인문학논총』 제52집(2011), 「재일조선인과 참정권」, 『황해문화』 57호(2007) 등이 있으며, 박사학위논문인 「한일회담에서의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 교섭(1951-1965년)」으로 제7회 강만길연구지원금을 받았다.

 

  '강좌 : 주변에서 바라 본 해방-재일조선인'는 이성 선생님의 강의로 9월 14일(월) 19시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재일조선인

강사 이성 (한신대)

 

일시 9월 14일(월) 19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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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 화교편

 

김선호(2015.8.26)

 

 

차이나타운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해외여행 중 일본에서 차이나타운을 본 이후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3대 차이나타운을 모두 가보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나가사끼의 차이나타운은 규모도 제법 크고 2, 3대째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일본에 비해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보잘 것 없었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화교들이 별로 없었다.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현대적 공간이 맥도날드라면,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근대적 공간은 차이나타운이다. 뉴욕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고, 런던에도 있고, 중국의 반대편 멕시코에도 있다. 물론 해방전 한국에도 8만명이 넘는 화교가 살았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화교는 겨우 2만명을 헤아린다. 그 많던 화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세 개의 사건

 

  해방 70주년을 맞이해 한국화교에 대한 발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막연하다 못해 뜬구름잡는 궁금증을 가지고 제기동으로 향했다. 내가 화교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란, 1930년대 만보산사건과 박정희정부때 화교들이 대만으로 많이 돌아갔다는 정도였다. 발표자가 한국에서 살았던 화교라고 하니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었다. 도착한 역사문제연구소 강당에는 청중이 별로 없었다. 주최측은 난감했겠지만, 소담한 걸 좋아하니 내겐 안성맞춤이었다. 곧 강연이 시작되었고, 70년동안 살아온 화교들의 희노애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해방후 70년동안 한국사회에서 화교들이 잊혀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주목받은 시기는 역사적으로 두 번 정도 있었다. 이승만정부때와 박정희정부때다. 이승만정부때는 수입업자로 먹고살던 화교들에게 수입상품을 제한했고, 거주자격 심사를 강화했다. 박정희정부때는 외국인토지법을 만들어 화교들이 50평 이하의 상점 단 1개만 소유하도록 제한했다. 화교들에게 한국정부 수립은 기쁨이 아니라 억업과 구속의 시작이었다. 박 정부의 화교억압정책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아무리 화교의 경제력이 높아진들 한국경제 전반을 좌우할리 만무한데, 그 억압의 정도는 깊고 철저했다. 억압정책의 밑바닥에는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있었을까? 이같은 궁금증은 문민정부이후 현재까지 한국정부의 화교정책을 들으면서 해소되었다.

 

  왕은미 교수는 해방 70주년 중 화교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사건으로 1992년 한중수교, 1997IMF사태, 2005년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를 꼽았다. 이 세가지 사건이 한국 화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화교들에게 한국인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왜일까?

 

  첫째, 화교들에게 한중수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가 아니라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를 뜻했다. 화교들은 해방후 중화민국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한중수교가 체결되자 중화민국은 한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국교를 단절한 날, 서울 중화민국대사관에서 국기하강식이 거행되자 식장은 화교들의 울음으로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삶은 계속 살아야했다. 2000년에 들어서 중화민국에 민진당정부가 들어서자 화교사회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화교들에게 있어서 중화민국은 바로 국민당정부였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민진당정부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고, 중화민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반대로 화교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다.

 

  둘째, 1997IMF사태는 뜻하지않게 화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IMF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 한국정부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소유제한을 전면 철폐했다. 1968년에 만들어진 토지소유제한은 30년동안 화교들의 경제성장을 억압한 가장 대표적인 규제였다. 화교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50평이 넘는 가게를 소유할 수 없었고, 분점을 가질수도 없었다. 문제는 토지소유제한 전면 철폐가 화교에 대한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달러가 부족했던 정부가 외국인의 국내 부동산 보유를 허용함으로써 외환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1992년 한중수교와 똑같이 법률의 도입제정공포에서 화교는 아예 관심 밖에 있었다. 70년동안 화교정책의 핵심은 근본적 차별과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셋째, 외국인토지법 개정이 화교들에게 경제활동을 길을 열어줬다면, 2005년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는 화교들에게 정치활동을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온전히 화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정치권은 일본정부에 재일동포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의 재일동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화교들에게 영주자격과 지방참정권을 보장하는 법률을 마련한 것이다. 우리도 못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는게 애시당초 이치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여 2002년 화교들에게 영주자격이 부여되었고, 2005년 지방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의 바램와 달리 재일동포의 정치적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이로서 2005년에 이르러 한국의 화교들은 다른 나라의 중국인들이 몇십년전부터 누려온 권리의 한자락을 가지게 되었다.

 

 

주현미와 이연복

 

  강연은 1시간 안팎이었고, 몇 명의 청중은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그러나 나는 질문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사람에 대한 의문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했을까? 또 한국정부는 왜 화교들을 이처럼 철저히 억압했을까? 그리고 한국인들은 왜 화교들에게 이처럼 무관심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 떠오른 인물은 주현미와 이연복이다. 트로트 가수인 주현미는 화교3세로 아버지가 중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1980년대 한국 최고의 가수였는데, 화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TV에 안나왔다. 그 때문에 괜히 화교3세인 하희라까지 덩달아 욕을 먹었다. 이연복은 현재 방송에서 가장 핫한 요리사다. 어느 방송에 나와 자신이 화교라고 얘기하는 걸 보고 한국도 많이 변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변하지 않은게 더 많았다. 그의 주변에는 직장인이나 공무원인 화교가 없었다. 화교 청년들에게 중국집말고 선택할 직업이 없었으니까.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이처럼 다른 민족에 대한 배척과 억압을 먹고 자라왔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재일동포 3, 4세들이 회사나 공공기관에 취직하기 어려워 대부분 장사나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알고 있다. 그래서 어릴때부터 일본학교에 다니거나 일본으로 귀화하는 재일동포도 많다. 그리고 재일동포들은 대개 이름이 두 개다. 본명(本名-한국이름)과 통명(通名-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다. 재일동포들이 통명을 쓰는 것은 이름 때문에 차별받지 않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한국으로 눈을 돌려 생각해보자. 70년의 세월동안 자식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한국식 이름을 지은 화교 부모는 없을까? 화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마조마하며 한국학교를 다닌 화교 아이들은 없을까? 지금도 2만명이 넘는 화교가 이 땅에 산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15년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동포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또다른 화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래 잘 모르면 말이 길고, 대충 알면 글이 긴 법이다. 각설하자. 남을 비판하기는 쉬우나 나를 돌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70년동안 한반도에 살아온 화교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과 우애(友愛)를 보낸다.

 

 


 

김선호:

북한 인민군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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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이 가져온 실어증

 

2015.8.27.

백지운(白池雲)

 

 

동아시아에서 제2 대전의 종결을 알린 8.15는 또 다른 억압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 복잡한 현대사를 예고한다. 일제의 식민은 종결되었지만 한국, 일본, 대만의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반공이라는 강력한 이념을 앞세운 냉전사가 시작되었다. 네이션 빌딩 프로세스 속에서 만들어진 국민들. 이들은 식민지 시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훈육되었고 식민지에 대한 기억과 서사 또한 국가의 네이션 빌딩 프로세스 속에서 새롭게 구축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해방을 맞았다. 대만을 경험해 본 한국 사람들이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은 대만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친근감이다. 한국보다 더 오랫동안 식민지를 겪었음에도 반일은 고사하고 2000년대 한류가 오기 전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일본문화가 대만의 젊은 층과 대중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왜 한국과 같이 식민지를 겪었음에도 대만이 일본 식민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와 이토록 다른가. 여기에 대만의 해방이 갖는 복잡성이 있다.

 

우녠전의 <또오상(多桑, Borrowed Life)>(1994)은 대만 뉴웨이브 중 일본 식민지 잔재를 다룬 첫 영화이다. 1990년대 대만 영화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렸던 뉴웨이브의 성장에는 국민당 권위주의 통치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1980년대라는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특히 1987년 계엄 해제 이후, 식민지와 해방을 (국가가 아닌) 개인의 기억에 의거하여 말하는’ <또오상> 같은 영화가 비로소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오상이란 아버지의 일본어 발음이다. 주인공 또오상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고 곧이어 국민당 권위주의 통치 속에 평생을 살았던, 그 시대 전형적인 대만인 아버지의 표상이다. 영화를 보면 느끼겠지만 주인공 또오상은 볼수록 문제적인 인물이다. 아들인 원지엔의 눈에 비춰진 또오상은 한편으로는 일생 가족에게 존중 받지 못하는 무능한 아버지이지만, 다른 한편 영화 전편에서 우리는 원지엔이 또오상에 보내는 짙은 향수와 그리움에 마음이 애잔해진다. <또오상>은 감독 우녠전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아니, 그 세대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제사일지 모른다.

 

이토록 우스꽝스러울 만큼 무능한 아버지를 작가는 왜 그리 못내 그리워하는가. 이를 묻기 위해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 무엇이 또오상을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거세시켰는가이다. 그것은 바로 해방과 함께 찾아온 국민당 통치시대이다. 1987년 계엄해제 이후에야 비로소 정면으로 물을 수 있게 된 이 질문 국민당 통치시대가 대만인에게 무엇이었는가 은 대만이 일본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라는 질문과 대만인의 무의식의 깊은 층에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의하여 보아야 할 지점은 언어이다. 해방 후 국민당의 네이션 빌딩 프로세스에서 철저하게 거세된 또오상의 무기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일본어와 민난화(閩南話)를 말하는 또오상은 학교에서 표준 중국어인 푸통화(普通話) 교육을 받는 자녀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된다. 푸통화로 구축되는 대만의 근대성 속에서 말할 자격을 박탈당한 또오상은, 자기의 언어로 표상되지 않는 낯선 세계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왜 이 작품의 영문 제목이 ‘Borrowed Life’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타박을 받을 때마다 사라진 내 청춘이여라며 처량하게 읊던 그의 노래자락을 음미해 보는 것도…….

 

언뜻 보면 또오상은 평범한 인물이다. 종종 한국의 아버지 상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국민당 통치 시대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전복적 국민상이라는 점에서 또오상은 문제적인 인물이다. 한 개인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잔잔한 작품 저변에 대만의 해방과 근대성을 향한 도전적인 시선이 무겁게 감지된다. ‘또오상의 문제성은 대만의 해방과 근대성의 문제성인 것이다.

 

 


백지운(白池雲)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중국 현대문학을 전공했고, 최근의 관심 주제는 동아시아 문화사상의 연쇄이다. 논저로는 “East Asian Perspective on Taiwanese Identity”(2010), 근대 중국의 아시아 인식의 문제성(2012), 네이션 너머의 통일 : 타고르의 내셔널리즘 비판의 아포리아(2015) 등 다수. 제국의 눈(2003), 일본과 아시아(2004), 리저널리즘(2008) 등을 공역했으며, 위미, 시간, 귀거래등의 중국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영화와 포럼 : 해방과 제국의 잔영_대만'은 백지운(白池雲) 선생님의 강의로 8월 29일(토)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대만

강사 백지운(白池雲,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일시 8월 29일(토) 16시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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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구

 

 

해방을 묻다

 

  두 해 전쯤 처음으로 만주출정가를 들어보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서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던 와중 한 선배가 핸드폰으로 공연 영상을 찾아 틀었던 것이다. 무대랄 것도 없는 조촐한 장소에서 소박하게 노래를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처연함과 결기어림이 섞여있는 듯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핸드폰의 조야한 음질마저도 그런 미묘한 정서를 돋우는 느낌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새벽녘 이북의 추위를 마주하며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앞부분의 노랫말에서는 처연함이 느껴졌지만, ‘해방의 그날까지 총칼을 들고 나가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내용의 후렴구는 강한 결의로 가득했다. 적어도 이 시기 대부분의 식민지 조선인에게 해방이란 무장투쟁과 그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쟁취해야 할 독립을 말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때, 해방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아오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주권을 강탈해 간 일제라는 명확한 적대의 대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독립이라는 형태로 맞이한 해방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간단한 문제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오키나와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는.

 

  조선은 1910년 한일병합에 따라 공식적으로 제국일본의 일부로, 즉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외지(外地)와 내지(內地)의 경계가 뚜렷하게 존재했다. 이는 식민지와 식민모국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오키나와와 일본의 관계는 이와 달리 보다 중층적인 차원에 놓여있었다. 오키나와 문제의 어려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어려움을 바탕으로 오키나와에서 해방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늘, 해방 7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하는 우리에게 어떤 지평을 보여줄 수 있을까.

 

 

 

놓임돌(礎石), 버림돌(捨石), 쐐기돌(要石)

 

  1879, ‘류큐처분이라고 불리는 류큐 지역에 대한 메이지 정부의 폭력적 병합이 이뤄지면서 류큐라는 고유의 명칭은 오키나와로 바뀌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철저한 준비 아래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설계에 따라 이뤄진 류큐병합은 제국일본의 초석이 된 작업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전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 간 질서였던 조공-책봉 체제를 무력화시키고 근대 국제법 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본은 류큐를 수단 삼아 대만을 침공하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만을 할양받는다. 이른바 첫 번째 외지(外地)의 탄생이다. 그 후 여세를 몰아 일본은 15년 뒤 조선을 병합한다. 대만과 조선 모두 류큐병합의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 삼아 효과적으로 식민지화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국일본의 식민지 중 제국대학이 설립되었던 유이한 두 외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화는 이렇게 일본이 오키나와를 놓임돌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2차 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 의해 버림돌로 이용된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 민중에게는 이전에 비해서도 훨씬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의 폭력이 가해졌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패색이 짙어진 일본 정부는 천황제를 골간으로 하는 국체를 수호하기 위해(국체호지) 최대한 평화협상을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고, 그 방법으로 오키나와에서 최대한 전황을 지지부진하게 끌 것을 명령한 것이다(버림돌 작전).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이 상륙한 4월 이후부터 지옥도가 펼쳐졌다. 오키나와전을 통틀어 가장 큰 희생을 겪은 단위는 오키나와 주민과 오키나와현 출신 군인이었고 이들의 수는 약 12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오키나와 거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숫자는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섬에서 이어졌던 죽음들의 비참함을 가려버린다. ‘가마(ガマ)’에서의 옥쇄로 상징되는 주민들의 반강제적 집단자살이나, 패주하는 일본군에 의해 갖은 명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경험은 아직도 상흔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상륙 이후부터 미군은 본토공격을 위해 점령지역 전체를 기지화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그 과정에서 거의 모두가 수용소에 격리 수용되었고, 막대한 규모의 민유지, 공유지가 미군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접수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계속 오키나와에 주둔하면서 섬을 장기적으로 보유하려는 시도를 계획했는데, 미국의 전후 세계패권 전략에 있어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미 군부가 오키나와를 가리켜 태평양의 쐐기돌(keystone)’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쐐기돌은 아치를 만들 때 마지막으로 정중앙에 박아넣는 돌을 일컫는 말로 쐐기돌을 통해 아치는 장력을 유지할 수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기지사회삼아 부여한 역할은 정확히 이 쐐기돌과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오키나와는 5,60년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전폭기가 분 단위로 출격하는 전초기지였다. 적어도 오키나와에서만큼은 1945년 이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전후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전전부터 전후까지, 오키나와는 언제나 본토-점령국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수단으로 존재해왔다. 어쩌면 이 수단-이용됨으로부터 벗어남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오키나와에서 해방을 찾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해방국체

 

  여기서 잠시, 또 다른 해방을 떠올려보자. 오키나와현 오키나와시 남동쪽 해안에는 카이호우’, 해방(海邦)’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다. 바다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이곳에서 1987년 국민체육대회가 열린다.

 

  매년 각 도도부현을 순회하며 개최되는 일본 내 최대 규모의 체육대회 이름은 국민체육대회, 약칭 국체(国体)이다. 1987년 가을 제 42회 국체의 개최지는 오키나와였다. ‘카이호우국체’(海邦国体)라는 테마와 빛나는 태양, 퍼져가는 우정’(きらめく太陽 ひろがる友情)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이 대회에는 단순한 체육대회 이상의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1987년이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15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 더해 천황의 개회식 출석여부, 대회에서의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둘러싼 논의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87년의 국체(국민체육대회)가 일본의 국체를 묻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카이호우국체를 전후해 쇼와천황의 방문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19452월에 있었던 고노에 수상과 천황 사이의 대화 내용이 대중적 차원으로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19479월의 천황 메시지에 대한 천황의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또한 대회를 앞두고 문부성이 학교마다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 지도를 통지한 일은 과거 오키나와 내지화(內地化) 과정에서 강제되었던 황민화 교육을 떠올리게 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표상인 천황()과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대한 질문은 다시 한 번 가장된 자연으로서의 국체를 문제화시켰다.

 

  푸코가 계보학적 연구를 통해 밝혔듯이 근대는 훈육을 통해 국민이라는 국가의 신체를 만들어 낸 과정이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국체(‘국체(国体)’와 국민체육대회)는 서로 연결된다. 국민()이라는 몸()을 기르는() 것은 동시에 개별 국민의 신체에 국가라는 상징 제도를 자연화/내면화시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오키나와 인민의 목숨을 담보로 오키나와를 버림돌로 삼으면서까지 일본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천황제의 존속이었다. 결국 전쟁범죄에 큰 책임이 있었던 황실과 천황제는 오키나와의 희생으로 만세일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전전과 전후가 실은 단절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6,70년대에 때로 과격무장투쟁까지 감수했던 운동세력은 바로 이 전후 민주주의의 기만적 본질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경우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현재와 단절할 것을 요청했는데, 그것은 국가라는 신체를 매개로 연결된 역사적 시간의 성격을 밝히는 일이기도 했다.

 

 

미결성(openness)으로서의 해방

 

그것은 육지인지 파도 위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길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르게 이어진다.

긴 행렬은 하나의 친화가 되어 앞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비옥한 대륙을 향해 입국권도 필요 없고 세관원도 없는 자유의 천지로 건너가자고 한다.

- 마키미나토 도쿠조(牧港篤三), 계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순간 국가로부터 버려진 존재, 난민이 되었다. 그러나 버림과 점령의 부침 사이에서, 유랑과 수용의 경험 사이에서 도리어 그들은 제도로서의 국가를 상대화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야카부시’, ‘패전숫자풀이노래등 종전 직후에 사람들 사이에서 불려진 노래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모리 요시오는 이러한 노래들에 주목할 것을 말하면서 전후 오키나와의 대표적 예능인(芸能人)인 데루야 린스케(照屋林助)를 인용한다. 데루야에 따르면 옛날 오키나와에는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았기에 글 대신 노래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체험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글씨를 가지지 않는 이들의 일기이자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 기록되지 않은 기록, (국가에 의해) 역사화 되지 않은 기록은 언제나 이야기로, 노래로 민중 사이에서 불려질 것이다. 히노마루나 기미가요가 고정화된 역사적 시간의 표상인 것과 달리, 민중의 노래에는 도래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자화를 거부하는 이야기에는 수없이 많은 변주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질서를 세우거나, 경계를 구획하거나, 성격을 규정하는 언어가 아니다. 민중의 노래를 통해 과거는 계속해서 현재화되고, 현재는 수많은 다른 미래가 열리는 장()이 된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토피아의 조감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를 형성해버린’ “질서로서의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될 수 없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운동하는 미결성의 장소”(도미야마 이치로)로서.

 

 

 

 

수단을 넘어서

 

  오키나와 비극의 시작은 근대의 출현과 함께 일본과 미국이 번갈아가며 오키나와를 수단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다. 이미 어떤 결과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서 무언가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고의 폭력이 생겨난다. 전후 오키나와 민주주의의 발자취는 이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었다. 이어지는 투쟁은 곧 이데올로기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어짐”(모리 요시오)으로 전개되었다.

 

  모리 요시오는 이 미결성의 이어짐()’ 또는 이어지는 미결성()’을 가리켜 땅 속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때 땅 속의 혁명은 아직 결과로 드러나지 않은 운동이며 결과를 상정하지 않는, 그렇기에 운동에서 운동으로 과정에서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오키나와를 수단으로 삼아왔던 지난날의 역사를 비판함과 동시에 섣불리 오키나와를 평화의 섬, 해방의 놓임돌로 말하는 언어도 경계해야 한다. 그 역시 평화와 해방을 닫힌 결말로 상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주출정가는 독립 해방의 전위가 될 것을 다짐하는 노래였다. 그러나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해방의 의미는 노래가 말하는 바와는 다를 것이다. 이제 해방의 해방적 성격은 총칼을 든 전위가 앞서 나아가서 쟁취하고 달성한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를 만드는 지금의 운동과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해방이 획득한 결과물이 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닫힌 세계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해방에 대한 혹은 해방이 요구하는 무한한 물음 속에서 가시화된 결말의 형태(국가, 체제, 또는 집단), 설령 그것이 해방을 보장해줄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체화하는 것 대신 해방의 감각을 소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석민구:

중앙대학교 유럽문화학부에서 독일어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계속해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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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송윤희

 

 

  며칠 전에 한홍구 선생님 강의를 들었다. ‘노덕술(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밀고하고 고문한 사람)’에서 ‘이근안(민주화 운동하시던 분들을 고문하던 전기고문기술자)’으로 이어지는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화도 나고 나는 참 모르는 게 많구나 싶었다. 그래서 ‘해방의 마을로’ 답사 연수가 있어 참여하게 되었다. 순간순간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연구원님들의 설명을 들으며 지난 역사의 현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랐지만, 역사의 현장으로 온 ‘남산’은 처음이었다.

  일본공사관, 총독 관저, 조선총독부, 중앙정보부로 이어지는 모습이 참 공포스러웠다. 공간이든 사람이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는 변하지 않나보다. 조선 사람들을 억압했던 장소가 시민들을 억누르는 장소로 이어지는 것을 보니. 역사적으로 청산해야 할 무언가를 그냥 넘기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장소가 그에 대한 설명도 없고, 심지어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아 무척 아쉬웠다.

 

 

 

 

  월남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해방촌’. ‘잊고 싶은 실향의 아픔과 벗어나고 싶은 가난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표현만큼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골목마다 남아 있는 옛날 집들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이 공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과거보다 지금은 조금은 더 나아진 걸까? 시간이 많지 않아 골목을 충분히 걸어보지 못한 점이 아쉽다.

 

 

 

 

 

  시간을 머금고 있는 공간을 걸으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인데...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우선, 많이 알고 느껴야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가야겠다.

 

 

 

 

추신>

 

 

1. 뒷풀이 장소 ‘레아’ 정말 좋았어요. 맥주도, 노가리도. 물론 사람들이 제일 좋았습니다.

2. 현장 현장을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신 세 분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더 즐거웠어요.

3. 주신 책자 감사했어요. 다시 되돌아보기 참 좋아요!! 게다가 종이질이 너무 좋아요~

4.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추천 드리고 싶어요. 용산 주변 이야기 책인데... 역사를 잘 아시니 더욱더 좋을 것 같아요.

 

 


 

 

송윤희

사람들의 이야기 듣기. 영화 보기. 사람들. 초콜릿. 비.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요. ‘곁에’라는 이름을 좋아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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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정명섭


  공간은 기억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남산이라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와 남산타워, 사랑의 자무쇠로 알 잘려진 남산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였으며, 그리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답사에 운 좋게 참여하게 되었다. 충무로  역에 모여서 남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답사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들린 곳은 통감관저 터였다.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발을 뻗게 된 일본은 공사관을 세웠다. 처음 세워진 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불탔고, 새로 만든 공사관 역시 2년 후의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남산 중턱에 새로 영사관을 지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남산 근처인  진고개, 지금의 충무로에 자리를 잡게 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일본 영사관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통감부가 되었다가 왜성대에 새로운 통감부가 설치되자 관저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이 우리에게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곳 2층에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 처음을 다른 나라에게 주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이후 총독관저로 사용되다가 경복궁 뒤편,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관저가 지어지게 되면서 시정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아쉽게도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작은 공원 한구석에 통감부 터였다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해방 이후 군사용 건물로 만들어졌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이 지역에서 세워지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실 통감부 건물도 언제 사라졌는지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은 상태에서 마주치면 감흥이 좀 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텅 빈 공터에서도 충분히 그런 감상을 느낄 때가 많다. 통감부 터 역시 남아있는 것은 표지석 하나  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근대였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통감부 터 바로 옆의 작은 공원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늘 아래 긴 벤치가 있는데 나무가 아니라 돌로 만들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았다가 표면에 새겨진 한문을 발견했다. 답사를 안내해준 역사문제 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설명을 해줬다. 바로 한일강제병합 당시 일본 영사였던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좌대를 벤치로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동상까지 만들면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반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통감부 터 표지석과 벤치로 변한 하야시 곤스케에 동상 좌대를 보고 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바 캐릭터들이 세워져있는 애니메이션 센터에 도착하자 작은 표지석이 우리들을 반겼다. 1907년 만들어진 통감부 청사 자리였다는 표지석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본격적인 통치를 위해 남산에 세워진 통감부 청사는 르네상스 양식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우리에게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에 세워진 것 밖에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926년에 총독부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조선에 대한 통치와 지배가 이뤄졌다.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이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이곳에 잠입해서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벌인다. 그야말로 영화같은 이 이야기는 암울했던 당시는 물론이고 95년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가슴도 뜨겁게 만들었다. 증축을 거듭하던 남산의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에 새로운 총독부가 완성되면서 과학관으로 사용된다. 일본보다 한발 먼저 세워진 과학관은 일본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점과 개발 사업들을 선전하면서 장소가 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면서 표지석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라바 캐릭터 동상 사이에 세워진 표지석이 없다면 이곳이 과거에 어떤 장소였는지 알 수 없었다. 좀 더 큰 조형물을 만들어서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것은 김익상 의사의 의거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떨어진 곳에 세워져있었다는 점이다. 두 개를 나란히, 혹은 하나로 합쳐서 만들면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올라가게 되면 노기 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면서 곳곳에 자신들의 종교 시설은 신사를 세웠다. 정신적으로도 지배하겠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인데 남산에는 그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신사였던 조선신궁을 비롯해서 노기신사와 경성신사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기 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과 그 부인을 기리는 신사다. 두 사람은 메이지 천황이 죽자 나란히 순사를 했는데 일본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신사를 세운 것이다. 노기 신사는 경성신사에 부속된 신사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리라아트 고등학교 안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손을 씻는 수조와 석등 받침 등이 남아있다. 노기 신사에서 나와 좀 더 올라가면 숭의여대가 나온다. 이곳 교정의 한구석에는 이곳이 경성신사 터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사진이 남아있다.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신사는 이 땅이 일본의 것이 되면서 확장되어갔다.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유권을 빼앗긴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대로 이어온 전통을 부정당하고 지배자들의 종교와 정신을 주입당해야만 했다. 일본은 이 땅 곳곳에 신사를 지으면서 종교를 강요했다. 정신을 말살함으로서 이 땅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속셈을 보인 것이다. 남산에는 이런 신사들이 많이 세워졌다.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했던 충무로와 명동과 가까웠고,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때 조선인들의 숭배를 받았던 경성신사는 이후, 그들의 손에 의해 폐교된 기독교 계통의 학교 송의여학교가 들어선다. 교정의 안내판에도 숭의 정신이 일본의 제신을 눌렀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교정 건너편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에 세워져있다. 햇살 속에 우뚝 솟아있는 동상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다는 것이 지닌 의미를 떠올려봤다. 신사를 두 곳이나 봤지만 남산에는 신사들의 끝판왕 조선신궁이 있다. 신사보다 한 단계 위인 신궁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남산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는 이곳은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고 있다. 상징성과 규모에서 다른 신사들을 압도하는 이곳은 총독부와 더불어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이곳은 갈기갈기 찢겨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 경외심을 갖게 만들었던 계단은 1948년 겨울, 눈으로 덮힌 채 스키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변했다. 일본이 사라진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독재자 이승만이었다. 살아있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동상은 4.19의거로 파괴되었다.

 

 

 

 

  남산을 둘러보고 향한 곳은 해방촌이었다. 글자 그대로 해방 이후 남북분단이 진행되면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거주한 곳이었다. 남이 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남산에 있던 경성호국신사에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이후 해방촌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실향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급한 경사와 좁은 길을 보면서 그들의 팍팍했던 삶을 짐작해봤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골목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지어진 일본식 주택들이 남아있었다. 지방이 아닌 서울에 이렇게 많은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향민들의 거주지였던 해방촌은 최근에는 외국인들의 거주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끼리 바톤터치를 한 셈이다. 해방촌 주민들이 세운 해방교회를 지나 하늘 계단을 내려오자 시내와 마주쳤다. 오가는 버스와 사람들을 보면서 방금 지나쳐왔던 과거와 다른 세상을 만났다. 역사를 마주친다는 것은 일종의 몽상과 같다. 백 년 전의 세상을 이야기하고 걷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어떤 결정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면 역사는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물음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다. 역사란 ‘현실’ 그 자체다. 

 


정명섭: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백화점 경리와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치고, 현재는 글을 쓰고 있다. 이런저런 책을 썼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좀비부터 청소년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 중이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현재도 그것으로 전업 작가 생활을 버티고 있는 중이다. 남들보다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답사를 자주 다닌다. 역사는 종이 뿐만 아니라 발끝으로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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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 70, 한국화교에 대한 이해

-의미 있는 사건과 진정한 해방을 위한 과제

 

왕언메이(王恩美)

대만국립사범대학 동아시아학과 부교수

 

 

한국에서는 1945 8 15일 이후를 ‘해방 후’라고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방’은 “어떤 대상을 억누르거나 얽매었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 지배로부터 풀려난 일”을 가리킨다. 이렇듯 ‘해방’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무척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일본의 ‘구속억압’에서 벗어났다는 상징적인 용어인 것이다.

 

올해는 해방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필자는 한국인에게 있어 해방 70주년 중 가장 의미가 있었던 일은 일제통치로부터의 해방, 국가의 설립, 민주화의 달성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한국인에게 의미가 있었던 세 가지 사건이 반드시 한국화교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화교에게 있어 1948년 한국 국가 수립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새로운 억압구속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정부는 화교를 외국인으로서 관리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박정희정부 시기에는 이 시스템은 더욱 강화되었다. 1987년 민주화 직후에도 한국사회는 화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화교에게 있어 한국의 민주화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한국인의 해방이었지 화교들의 해방은 아니었다. 한국인은 독재ㆍ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에서 풀려난 해방에 젖어 자신들이 화교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민주화가 한국화교에게 영향을 발휘하는 것은 김대중정부 이후이다.

 

그렇다면 한국화교가 한국에서 사는 70년 동안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사건은 1992한중수교’, 1997 IMF경제위기, 2002년 영주자격과 2005년 지방선거 참정권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들은 한국화교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한국화교에게 진정한 해방을 안겨줬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국화교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다.

 

이번 강연에서는 해방 70주년을 맞이해 위에서 거론한 세 가지 사건이 한국화교에게 있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한국화교가 ‘구속억압’에 벗어난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제들이 남아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IMF경제위기는「외국인토지법」개정, 영주자격ㆍ지방선거 참정권 부여는 재일동포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번 강연에서는 특히 재일동포의 문제가 어떻게 한국화교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재일동포의 담론구조가 한국화교의 담론구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밝힘으로서 한국의 피해자의식가해자의식의 구조와 과거사반성문제에 대해 토론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재일동포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에서 한국화교의 문제를 거론할 때 얼마나 그 특수성과 역사성이 무시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화교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어떤 과제가 남아있는지를 생각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해방 70주년을 맞이한 올해가 한국화교에게 있어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왕언메이(王恩美)

: 대만사범대 부교수. 동아시아 근현대사, 화교사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동아시아 현대사 속의 한국 화교』(2013) 등이 있으며 한국에서 발표된 논문으로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의 주도권을 둘러싼 한국과 중화민국의 갈등과 대립, 1953-1956」『아세아연구』56권 3호(2013), 「한반도 화교들의 한국전쟁」『역사비평』91호(2010) 등이 있다.

 

  '강좌 : 주변에서 바라 본 해방-화교'는 왕언메이 선생님의 강의로 8월 7일(금) 19시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화교

강사 왕언메이(대만사범대)

일시 8월 7일(금) 19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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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8. - 11

해방 분단 70년 평화기행

Peace Tour

 

  2015년 평화기행은 안산과 서울 일대의 국가폭력(인권탄압) 현장과 화천·철원의 비무장지대와 동두천의 주한미군 피해현장을 찾아간다.

 

  화천·철원·동두천은 분단과 전쟁의 상흔이 생생히 남아있는 비극적 현장이자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냉전의 최전선’이다. 화천 베트남 참전기념관의 깨어진 조각상을 통해 여전히 진행 중인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기억투쟁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끊어진 금강산전기철도교량·평화전망대·승일교·노동당사를 둘러보는 길 위에서는 해방의 꿈을 산산히 부셔버린 분단과 전쟁의 아픈 상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폐허로 버려져 있는 기지촌여성 성병검사소,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진 나무 묘지석이 줄지어 늘어선 초라한 기지촌여성 공동묘지, 미선이 효순이 참사현장에 새워진 미군추모비는 동두천과 양주 지역에 저마다 간직하고 있던 억울한 사연을 들려줄 것이다. 또한 분단현장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민통선마을 사람들과 지뢰피해주민들, 현장 활동가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듣게 될 것이다.

 

  평화기행은 국내외 연구자와 활동가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함께 분단과 전쟁의 비극적 현장을 둘러보며 분단 극복과 한반도 평화운동의 방향을 고민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프로그램

 

8.08 학술행사  "해방분단 70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서울 l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09:00 - 18:00

 

※ 순서

사회  박래군(인권재단사람), 홍승혜(연세대 교수)
● 환영사  김성보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오웬밀러 (런던대 교수)

 

● 세션 1 10:00-12:00 동아시아 전후 질서와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역사전쟁


    사회 : 양미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발제1 :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한반도 - 이삼성 한림대 교수
    발제2 : 역사교과서 논쟁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발제3 : 북조선의 분단체제와 조선(한국)전쟁 – 수지김 럿거즈 대학 교수


12:00-13:00 점심식사


● 세션2 13:00-15:00 해방·분단 70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사회 : 유영주 미시간 대학교수
     발제1 :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 변화와 동아시아 군사갈등 – 서재정 교수
     발제2 : 한국 정치의 우경화와 대중적 극우단체의 등장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발제3 : 남한의 평화운동과 통일운동  - 참여연대 박정은 협동사무처장


● 세션 3 15:30-17:30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
     영상 : Women Cross DMZ 기록 영상
     초대 : 임재성(병역거부자), 제인진 카이젠(영화감독), 리정애(조선적 재일교포)

 

* 한영 동시통역 제공됩니다. 프로그램 중 일부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8.09 - 11 평화기행

1일차 8월 9일(일) : 안산, 서울

2일차 8월 10일(월) : 철원, 화천

3일차 8월 11일(화) : 철원, 동두천, 양주

 

※ 평화기행 코스 안내

● 1일차 8월 9일(일)  안산·서울
서울 경복궁역 집결 → 안산 단원고 → 기억저장소 → 안산합동분향소 방문(유가족과의 만남) → 의릉 전 중앙정보부 강당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해산

 

● 2일차 8월 10일(월) 화천·철원
서울 경복궁역 집결 → 화천 베트남 참전기념관 → 화천 꺼먹다리 → 철원 승일교 → 철원 금강산전기철도교량 → 유곡리 통일촌(민통선마을 주민과의 간담회) → 철원 두루미평화관(지뢰피해자와의 간담회)

 

● 3일차 8월 11일(화) 철원·동두천·양주
철원 노동당사 → 철원 월정리역 → 평화전망대 → 동두천 기지촌 여성 성병검사소(기지촌 활동가 간담회) → 상패동 기지촌여성 공동묘지 → 양주 효순이 미선이 참사 현장 → 해산

 

 

* 8월 8일과 9일 숙박은 개별신청자에 한해 제공합니다.

 

참가비

● 공동주최 단체 회원

전일정 참가시 10만원 / 학생가 7만원  (부분참가 : 8일 1만원, 9일 2만원, 10-11일 7만원)

 

● 비회원

전일정 참가시 15만원 / 학생가 10만원 (부분참가 : 8일 1만원, 9일 3만원, 10-11일 11만원)

 

※ 입금계좌

우리은행 1002-185-222333 (예금주 : 이지혜)

 

 

>>> 참가신청 바로가기 (선착순 70명)

 

 

 

 

공동주관   인권재단사람 참여연대 역사문제연구소 ASCK(한반도문제를걱정하는학자모임)

공동주최   (사)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4.9통일평화재단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시민평화포럼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천주교인권위

 

 

문의  2015평화기행 준비위원회 (02-723-4250, 2015peacetour@gmail.com)

        연구소에 곧바로 연락을 주셔도 됩니다.

        (02-3672-4191, kistory@k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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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사랑과 맹세'에서 '자유만세'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정병욱

 

  해마다 8월이 되면 동아시아는 기억의 홍수에 잠긴다. 조선과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부를 점령했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올해처럼 10년 단위의 주년에 되는 해는 더욱 기억이 범람한다. 올해도 식민통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끊임없는 저항을 상기하는 자료와 증언 보도가 이어질 것이다. 연례행사로서 해방의 날이 거듭되면 될수록 ‘해방’에 무뎌지는 것은 왜 일까? 그 상투성에 하도 지쳐서 더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 우리의 무기력함이 반영된 것인지 모르겠다.

 

 


  무감각과 무기력을 넘어 ‘해방’을 새롭게 보기 위해 당시로 돌아가 다양한 사람들의 해방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8월 15일은 동아시아의 누군가에게 해방의 날이었지만 누군가에겐 패전의 날이었으며, 누군가에겐 기쁨이자 희망, 누군가에겐 굴욕이자 절망의 날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지나고 보니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지배와 피지배의 시작인 경우도 많았으며, 희망과 절망은 교차했다. 많은 사람들은 꿈과 불안을 안고 위기와 기회의 강을 건넜다. 그 경험은 국가나 지역별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같은 지역 안에서도 사람마다 달랐다. 작지만 다양한 ‘해방’을 복원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자.

 

 

 

  1945년 5월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영화 ‘사랑과 맹세(愛と誓ひ)’가 개봉됐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선전하는 내용으로 “현존하는 일제시대 선전영화 중 가장 노골적인 군국주의 영화”로 평가 받는다. 이 영화는 이마이 타다시(金井正)와 최인규(崔寅奎)가 공동 감독한 것으로 알려졌고, 최인규도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그로부터 채 2년이 되지 않은 1946년 10월 서울에서 최인규가 감독한 ‘자유만세’가 개봉됐다. 독립운동가의 투쟁을 소재로 한 영화로 크게 히트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사이 8.15 해방을 감안하면 내용 변화는 당연하더라도 같은 사람이 감독했다니? 더욱이 관객의 격한 반응은 또 뭐냐, 집단 기억 상실? 아니면 이러 의문을 품는 현재의 우리가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당시 시대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영화를 보면서 해방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감독 최인규의 변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 사실 이런 변신이야 근현대사에서 너무 자주 봐왔고 대부분의 사례가 그러하듯이 당대부터 지금까지 한편에서 나름의 변명과 옹호가, 다른 한편에선 이런 저런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대조적인 주장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해방 전후 영화계의 상황, 이후 현대사의 흐름과 식민지 기억을 둘러싼 경쟁을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비판하는 측과 옹호하는 측 대부분이 함께 공감하는 ‘속죄 영화’론, 즉 최인규가 식민지 시절 친일 영화들을 찍었던 죄를 씻기 위해 독립운동 영화를 찍었다는 주장에 의문을 가져보자. 영화를 보면 볼수록 변한 건 최인규가 아니라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최인규에게 ‘해방’은 무엇이었을까?

 

  다음으로 격하게 반응한 관객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자유만세는 해방 이후 상영 영화 중 흥행 수입 제2위였다거나 외화의 공세 속에서 ‘조선 영화’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심어줬다는 보도들로 볼 때 관객의 호응이 뜨거웠던 것 같다. 만원 관객에 대해 ‘속죄 의식’의 발로라는 해석도 있다. 항일운동 영화에 열광하면서 식민지 시절 협력하거나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자책감을 씻으려 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웃고 손뼉 치며 울었던 관객들의 속마음을 알 길 없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그들이 본 영화가 항일영화인지 의문이 든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의식을 갖고 영화를 보거나 평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관객들에게 영화는 무엇이었는지, 그들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영화를 통해 알아보자.

 

 


 

정병욱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 한국근대사 전공으로, 경제사, 에고도큐먼트 등의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식민지 불온열전』, 『한국근대금융연구-조선식산은행과 식민지 경제』가 있으며, 엮은 책으로 『식민지라는 물음』,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등이 있다.

 

  '영화와 포럼 :해방과 제국의 잔영-한국'은 정병욱 선생님의 강의로 7월 18일(토)16시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한국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감독, 1945)

        《자유만세》(최인규 감독, 1946)

강연 정병욱(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일시 7월 18일(토) 1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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