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세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용석, 병역거부자로 살아가기

 

  나는 평화주의자여서 병역거부를 한 게 아니다. 물론 나도 군대 가기 싫어하는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대학시절 내가 속한 학생운동 그룹이 병역거부 운동을 열심히 했고,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병역거부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군대 가기 싫어하다 억지로 끌려가는 대부분의 남성들처럼 군대에 다녀왔을 것이다. 내가 평화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히려 병역거부자가 되고 난 뒤였다.

  병역거부자가 된다는 건, 내게는 단순히 군대 2년 대신 감옥 1년 6개월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평화주의자로 살아가며,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병역거부는 평화주의자로 살아가는 한 시기에 거쳐 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폭력의 일방적인 피해자도 되지 않겠다는 다짐, 폭력과는 언제고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보면 죽을 때쯤에서는 내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세상의 모든 폭력에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감옥만 보더라도, 나는 너무 힘이 없었고, 무기력했다. 부당한 일이나 폭력적인 구조에 맞서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지만, 그보다는 눈감고 외면해버린 일들이 훨씬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으면서.

  출소하고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전과자가 정규직이라니, 나름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출판사였는데, 내가 들어가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수습사원 한 명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걸 보았다. 사장은, 수습사원이기 때문에 해고가 아니라 계약해지라며 노동법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사실 회사 들어갈 때 그저 돈이나 좀 벌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나는 권력과 폭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장이 휘두르는 인사권은 그야말로 노동자들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폭력이 되었다.

  결국 나는 동료들과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장의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인사권과 경영권은 자신의 고유 권한이라면서, 사장은 납득 할 수 없는 인사 발령과 업무지시를 자주 내렸다. 노사 관계는 갈수록 안 좋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만 두었다. 나 역시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지금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힘겹게 사장의 폭력에 맞서 저항하고 있다.

  만약 내가 병역거부를 하지 않았다면,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을 거 같다. 병역거부 덕분에 노동자 의식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나는 노동자들이 사장과 싸울 때는 늘 노동자 편을 들고, 노동조합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병역거부를 한 것이 내게는 어떤 삶의 지침이 되었다.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지침. 병역거부를 하지 않았다면 머릿속으로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병역거부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내 삶의 방향은 정해졌다고 생각한다. 화두는 폭력이었다. 내 삶을 폭력으로부터 최대한 분리시키는 것. 군 입영 영장이 나왔을 때는 입영을 거부하는 게 내 삶이었고,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회사 사장의 권력에 맞서는 게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질지 모른다. 그저 내가 계속 평화주의자로 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용석

7월 10일(수) 늦은 7시부터 진행되는 '<대담> 총을 들지 않는 평화 : 한 병역거부자의 이야기'에서 말씀나누실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바랍니다. :)

신고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평화에세이] 도시락밴드, 일상이라는 전장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 있다. 꽤 넓은 이 곳엔 그 넓이 만큼 많은 테이블과 사람들이 있고, 그 만큼 많은 목소리들이 있다. 친구, 연인 혹은 가족들과 함께 온 이들의 목소리는 경쾌하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바깥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말쑥한 차림을 한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주보며 웃는다. 슬픔 따위는 없어 보인다. 그런 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두가 웃고 있다.

 

슬픔은 어디로 갔을까? 모든 아픔과 고통은 마치 정기적으로 수거되는 쓰레기 봉지처럼 어딘가로 옮겨진 걸까? 우리는 수거된 쓰레기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슬픔이 옮겨간 자리를 알지 못한다.

 

거리에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만 보인다. 휠체어를 탄 사람, 한 쪽 팔이 없는 사람,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예전에 노숙인들이 많이 모이던 어느 지하도의 빈 공간에는 세련된 조명을 갖춘 빵집이 들어섰다. 빈 터는 더 깨끗해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었다. 노숙인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흩어졌다.

 

낡은 집들이 빽빽하게 있던 산비탈의 동네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재개발을 기다리는 그곳에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깨진 유리창과 마구 던져진 가구들. 나는 마치 시가전이 벌어진 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투는 이미 끝났다. 나는 아마도 격렬했을 그 광경을 떠올릴 뿐이다. 전장은 사라진 듯 보인다. 아니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일까? 우리는 전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느껴지는 일상 속에 있다. 아마도 전투가 끝난 곳에 세워졌을, 벽이 세워진 공간 안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산다. 전투가 끝난 이 곳에는 기념비가 없다. 우리는 그 전장을 알지 못한다.

 

이제 전장은 어디론가 가버린 것인가? 아니,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시선은 움직이는 것에 포획되어 있다. 버스정류장에서는 들어오는 버스 번호판에, 횡단보도에서는 언제 바뀔지 모르는 신호등에,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바뀌는 숫자에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옆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은 이 도시가 구성한 리듬에 맞추어져 있다. 감각을 잃어버린 우리는 전장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선은 다른 어딘가에서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순간순간에 편재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우리가 서있는 이 무대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전장 속에 있다. 이것은사는 게 전쟁이다와 같은 비유가 아니다. 실제 상황이다. 우리가 사는 이 평화로운 일상이 전장을 준비하는, 아니 바로 그 전장이기 때문이다. 

 도시락밴드

 

도시락밴드. 본 사진은 2011년 11월 30일 클럽 빵에서 있었던 '콜트콜텍수요문화제' 사진 중 하나입니다. 본 사진의 저작권은 '콜트빨간모자'님에게 있습니다.

@ 도시락밴드는

7월 20일(토) 18시부터 북촌문화센터에서 진행되는

<닫는공연> 평화를 노래하다에서

공연을 해주실 예정입니다. 많이들 오셔서 같이 평화를 노래해보아요 :)

신고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평화에세이] 한홍구, 다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본 글은 정주하 사진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눈빛, 2012)에 서문으로 들어갔던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어, 어, 어, 후쿠시마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을 덮치고 연이어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TV로 생중계되는 폭발장면을 나 역시 극한의 불안감과 극한의 무기력함 속에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년, 미약하나마 평화운동을 한답시고 정신없이 왔다갔다 했는데, 평화란 것이 저렇게 느닷없이, 저렇게 한방에, 저렇게 참담하게 깨져나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세상은 온통 지진과 쓰나미와 핵발전소 이야기였다. 독일은 탈핵을 결정했고, 발전소를 해외에 수출하는 데 열을 올리던 일본도 안전점검을 이유로 자국의 발전소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이웃 일본에서 벌어진 압도적인 사태 앞에 숨을 죽이고 있던 원자력 마피아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이 나라의 대통령 이명박이 있었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21개의 원전 중 12기의 건설에 직접 참여한 바 있는 그는 ‘이번 사고로 원전을 오히려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외쳤다. 그에게 3ㆍ11 사태는 인류를 덮친 핵 재앙이 아니라, 핵 수출 경쟁국 일본의 탈락으로 한국형 원전을 팔아먹을 좋은 기회가 온 것일 뿐 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또 2012년 3월 26~27일 세계 50여 개 국의 정상이 모이는 핵안보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려고 하고 있다.

  평화박물관은 2005년부터 원폭2세 환우 문제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며 핵 문제를 다뤄왔다. 핵문제에 관해서 우리 사회는 놀라울 정도의 불감증에 빠져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핵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사망한 조선인이 무려 4만 여 명으로 추산되건만,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음에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2세 환우에 대해서건 한국사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불감증이 후쿠시마에 대한 관심도 슬그머니 사라지게 만드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3ㆍ11 사태가 있은 후 나는 5월과 8월에 각각 도쿄를 방문했다. 일본에 간다고 하니 일부 친지들은 도쿄도 방사능 오염수치가 높게 나온다는데 괜찮겠냐고 우려했다. 거기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하며 일본에 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후쿠시마에 꼭 한번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평화박물관 활동을 몇 년째 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이 역사적 비극의 의미를 한국사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괴된 일상

  후쿠시마의 비극이 갖는 의미를 어떻게든 기록하고 한국의 시민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평화박물관이 제일 먼저 떠올린 작가는 바로 정주하 교수였다. 그는 2008년에는 개인 사진집 <불안, 불-안>을, 2010년에는 제자들과 더불어 <검은 비 하얀 눈>을 연달아 펴내며 핵발전소와 핵무기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이를 사진으로 형상화해왔다. 그만큼 핵발전소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핵무기의 피해로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온 작가를 찾기는 어렵다. 정주하 선생과는 쉽게 의기투합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 후쿠시마에 같이 가자며 불쑥 연락을 했지만, 사진집을 통해, 그리고 합천평화의 집에 갔을 때 학생들과 먼저 다녀가신 흔적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독한 불감증에 걸린 이 땅에서 핵발전소와 핵무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묘한 동질성 때문에 교감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쿠시마에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가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의 시각으로 찍느냐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기획자인 평화박물관의 입장에서 일정하게 큰 방향에 대해서는 주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 발생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이웃나라 한국에서 후쿠시마를 이야기 할 때 재난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후쿠시마의 일상, 쓰나미에 뒤이은 원전 폭발로 지금은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후쿠시마의 일상으로 모아졌다. 느닷없이 삶의 거처에서 쫓겨난 사람들, 그들은 과연 정든 땅 언덕 위로 돌아갈 수나 있을 것인가, 돌아간다 해도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고향을 빼앗긴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이상화 시인의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들려주고 싶었다. 정주하 선생도 사건 발생 후 나온 재난 관련 사진을 보면 크게 재난의 참상을 찍은 것과 복구 과정을 찍은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진보다는 후쿠시마 사람들의 빼앗긴 일상, 인간이 사라져버린 빈 공간에 무심하게 찾아 온 계절의 변화를 찍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는 사건 이후 후쿠시마 인근을 방문하여 다큐를 만든 서경식 선생께 후쿠시마에 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선생께서는 쾌히 우리와 동행하여 안내해 주시기로 하셨다. 도쿄대 교수로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하고 있는 다카하시 데츠야 교수도 동행하기로 했는데, 다카하시 교수의 고향은 바로 후쿠시마이다.

 

빼앗긴 들, 조선과 후쿠시마

  서경식 선생의 발문에도 잘 나와 있지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타이틀로 정주하 선생의 후쿠시마 사진전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듣고 몇몇 벗들은 우려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이상화가 이 시를 쓴 것은 1926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때였다. 그 때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일본제국주의나 그 하위동맹자인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어떤 사람은 만주로 어떤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떤 사람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도시의 토막민이 되었고, 또 어떤 이는 자기 땅이었던 곳을 떠나지 못하고 소작인이 되어 부쳐 먹고 살아야 했다. 그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표하는 절창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다. 몇몇 벗들은 일본제국주의에게 땅을 빼앗긴 조선 사람의 처지를 노래한 이 시를 자기네 나라 정부와 기업이 세운 핵발전소 때문에 땅을 빼앗긴 일본 사람들에게 불러주는 것을 꺼려했다. 식민지 통치로 핵발전소가 초래한 재난을 동일한 평면에 두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우려한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절절한 아픔을 노래한 절창으로 후쿠시마를 노래할 때, 일본사람들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에서 쉽게 위안을 받거나 쉽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운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불편한 마음이 들었었던 적이 있다.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관을 둘러본 한국인들 중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의 뜻이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사실을 비난하는 분들이 상당히 있다. 이 분들 중에는 심지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 정말 못된 짓을 많이 했으니, 원자폭탄을 맞아 싸다고 하거나,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고마운’ 원자폭탄 이라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있다. 히로시마 원폭 평화기념관에 가면 묘한 비석이 서 있다.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 여기서 ‘잘못’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 아니면 전쟁에서 진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히로시마는 원래 군사도시였다. 그 역사를 아는 이들 중에는 군사도시 히로시마는 사라지고, 피폭도시 히로시마, 평화도시 히로시마만 남게 되었다는 점을 몹시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다.

 

고통의 연대를 위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처럼 원폭이 투하된 곳은 아니지만, 2차 대전 말기에 일본 전역이 엄청난 공습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 곳곳에 있는 평화박물관의 대다수는 바로 이 공습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엎드려 공포에 떨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상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늘에선 폭탄이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땅은 흔들리고, 굉음과 비명은 고막을 찢는 절망적인 순간에 젊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리면 안전하기는 한 걸까? 일본에 널려있는 평화박물관 중에 일본이 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한 사실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전시를 구성한 곳은 매우 드물다. 그것이 정말 아쉬운 점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평화운동에 몸담고 있는 역사학자인 내가 더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의 결여 또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무지나 무감각이 아니다. 왜 저 어마어마한 공습이 안겨준 공포와 무기력감과 절망의 기억이 그저 일본 내에만 머무를 뿐,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공습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과 공감과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왜 일본이 당한 공습의 기억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엄마들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일까?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연대의 손짓은 그래도 어디선가 찾아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일본에 공습이 가해지고 불과 5~6년 후에 이웃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북쪽지역에 가해진 엄청난 공습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시는 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역사학자이지만 히로시마를 찾는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이 원폭이 휩쓸고 간 압도적인 풍경을 보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이라고 아쉬워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앞으로 지구상에 다시는 이런 참상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자기 손으로 실천하기를 바란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내일 그와 유사한 잘못이 일어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아내는 데에서 가장 첨예하게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숫자로만 따진다면, 히로시마에서는 ‘겨우’ 16만 명이 원폭 때문에 죽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아시아에서 제 명에 죽지 못한 사람이 무려 2천만인데 말이다. 히로시마는 먼저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은 아시아인들의 명복을 빌고 사죄한 뒤에야 히로시마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사죄를 받을 권리가 있고, 일본인들은 사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한국인들은 기필코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그것은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 사죄를 안 했다고 일본인들이 원폭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통만 이야기하고 조선인을 비롯한 다른 전쟁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묵살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지만, 자신들의 고통을 뼈 속까지 느끼고 그 고통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과정 속에서 조선인들의 고통과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제국주의의 침략에 땅을 빼앗긴 것과 핵발전소 사고로 땅을 빼앗긴 것 중 어떤 것이 더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이런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할 것이다. 남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쩔 수 없는 본성 일지 모른다. 서로 내가 더 아프다고, 당신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기보다, 몹시 아파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는 놈이 더해 라는 말도 있지만 과부 사정을 홀아비라도 알아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의 연대이다.

  봄은 어김없이 왔다. 왕소군(王昭君)이 끌려간 흉노의 척박한 사막에도, 이상화가 거닐었던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에도 봄은 와 주었다. 후쿠시마에도 봄은 왔다. 사고가 난 핵 발전소 반경 20km지점의 강제 피난구역 경계선은 그저 사람이 쳐 놓은 경계선일 뿐, 봄은 선 안팎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그 경계선 밖에서 물끄러미 정든 땅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살아생전 그 땅을 밟아 볼 수 있을 것인가? 꽃조차 피지 않는 황량한 땅에 끌려간 왕소군은 그 봄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노래했고, 이상화는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곳에 찾아온 그 잔인한 봄을 거닐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겼다. 그래도 온 몸에 풋내를 띤 이상화는 다리를 절면서도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들을 걸을 수 있었지만, 지금 후쿠시마는 걸어볼 수조차 없는 땅이다. 빼앗긴 땅 되찾으려다 쫓겨난 독립투사들은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빠지더라도 그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그 땅을 기필코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아본 적은 없다. 그런데 후쿠시마의 현실은 그런 꿈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빼앗긴 들에 돌아가고픈 마음이야 절절하지만, 앞으로 수백 년, 어쩌면 수천, 수만 년 동안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 돌아간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결코 가능하지 않다. 정주하 교수가 찍은 후쿠시마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감은 더 탐스럽고, 더 붉고, 더 슬프다. 핵을 폐기 대상이 아니라 잘 지켜야 할 안보의 대상이라면서 각 국의 정상들이 50명이 넘게 몰려온다는 대한민국, 단위면적당 핵발전소 밀도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대한민국에서 다시 만나는 후쿠시마의 첫 봄은 너무 시리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ㆍ평화박물관)

한홍구 대학 교수
출생1959년 07월 16일
소속성공회대학교 교수
경력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한홍구 선생님께서는

 7월 17일(수) 19시부터 평화박물관에서

 <강연> 핵과 평화. 핵발전과 핵폭탄, 그리고 민주주의강연해주십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신고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평화에세이] 김한상, 어느 비정한 평화의 영화적 기록

 

  영화와 물질적 현실의 친화성에 대한 글에서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삶의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영화적 매체만이 지닌 고유한 특징임을 지적한다. 연속체로서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숱한 감정과 생각, 가치 역시도 그러한 끝을 알 수 없는 흐름에 포함된다. 사건을 증명하는 증거로 자주 쓰이는, 고정된 무엇을 보여주는 사진과는 다른 영화의 이러한 특징은 훗날 연속체로서 ‘역사’를 사유하는 그의 이론적 여정에 큰 바탕이 되었다.

  지금 소개하는 푸티지는 아마도 그러한, 사건과 사건 사이의 삶의 흐름을 보여주는 영화적 기록일 것이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이른바 “한국 국군의 아버지”로까지 불렸던 미군 대위가 찍어 남긴 이 푸티지는 1949년 3월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군 내 남로당 세포사건’의 당사자 김종석 중령 등 다섯 명의 처형 장면을 담고 있다.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숙군(肅軍) 사업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종석은 본래 군에서 신임 받던 인재였지만 남로당 조직원임이 드러나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한국군의 주한미군측 고문관이었던 하우스만 역시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고 하지만, 한국 “반공체제 형성의 굳건한 지원자”라는 평가에서 볼 수 있듯 ‘공산주의자’ 김종석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여기까지가 이 푸티지를 있게 한 ‘사건’에 대한 설명이라면, 이 푸티지 속에 비친 영상은 그러한 사건으로 집약해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이 열리면 트럭 뒤에 탄 다섯 명의 수인이 포승줄에 묶인 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묶인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려 담배를 입에 무는 젊은 남성들의 표정은 무척 담담하다. 곧이어 중절모에 선글라스를 한 국군 장교의 한 마디에 파안대소를 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익숙한 농담을 익숙한 이들과 나누는 여유가 엿보인다. 트럭에서 내려 일렬로 늘어서 있는 다섯 명 중에서 김종석으로 보이는 이가 웃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의 하우스만 대위와 반갑게 악수를 나눈다. 그리고는 헌병의 안내에 따라 처형장으로 걸어가는 다섯 사람의 뒷모습, 성큼성큼 걸으며 별다른 주저함이 없는 발걸음이 비친 후 카메라는 한참 뒤로 물러나 멀리 서 있는 다섯 명과 그들을 조준하고 있는 총 든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바탕 먼지가 일고 군인들이 일렬로 퇴장하자 목을 늘어뜨린 채 숨을 거둔 다섯 사람의 모습이 멀리서 얼핏, 그리고 클로즈업으로 자세히 비친다.

  [김종석 중령 등 처형장면 기록영상]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그들 다섯 명의 담담한, 그리고 때때로 웃음을 띤 그 표정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화기애애한 대화가 다섯 명의 총살로 이어지는 2분 30초 동안의 급격한 전환은 사운드가 없는 고요한 푸티지의 화면 속에서 요동치는 어떤 정서, 어떤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자가 그 죽음을 선사하는 자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자 짓는 미소에서, 그리고 얼마 전까지 웃으며 인사를 나눴을 상대의 죽음을 결정하고서 무표정하게 응수하는 미군 대위의 다문 입에서 드러나는, 그 시대의 공기이다. 방금 전까지의 동료가 일순간 적이 되어 처형의 대상이 되고, 그 급격한 변화를 이쪽도 그리고 저쪽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러한 공기. 그것은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라는, 어쩌면 당연한 대립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또 한편으로 아직 역사서에 기록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평화시(平和時)’였던 시점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그 흔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름 붙이기에도 어색한 그런 공기이다.

  ‘제정’된 국가보안법이 국가 변란 세력을 막아줄 것이라고 누군가는 굳게 믿던 그 시점에 이미 전쟁은 그렇게 안으로부터 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숙군사업의 원인이 되었던 ‘여순사건’은 진압되었지만 정부군의 잔혹한 민간인 살상을 동반했고, ‘보안’의 대상인 국가는 어느 순간 국민을 등질 수 있음을, ‘국민’ 내에서 어느 순간 ‘적’을 만들어 도려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평화와 안보는 이처럼 비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정전 60주년을 맞는 올해 7월, 이를 되새기고 “일상 속에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사건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지 않고, 이를 연속체로서의 역사 속에서 사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터이다. 그것은 1950년 6월이 오기 전에 이미 시작된 전쟁의 공기, 그리고 1953년 7월이 지나고도 사라지지 않은 그 공기를 이제는 정화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2분 30초의 비정한 기록은 그래서 60년 넘는 그 역사의 현실과 짙은 친화성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참고자료

《Military 2》, Harvard-Yenching Library, James Hausman Archive, Box 10.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제5화 여수 14연대 반란》, 문화방송, 1999년 10월 17일 방영.

김득중(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Kracauer, Siegfried, Theory of Film: The Redemption of Physical Realit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 김한상 선생님께서는

7월 13일(토) 13시부터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되는

<강연> 전쟁기억의 기원-한국전쟁의 이미지 만들기에서

이야기해주실 예정입니다. 많이들 좋은 강연 들으러 오세요 :)

신고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평화에세이] 서재정, 정전협상의 국제정치

  오는 7월 27일이면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60주년이다. 정전협정을 위한 협상은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됐지만 그 협상과정이 2년 이상을 끌어 1953년에나 조인이 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정전협상은 왜 2년이나 걸렸을까?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1951년 11월부터 불거진 포로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즉 중국과 북은 제네바협정 118조에 따라 전원 자동 송환을 주장했으나, 유엔군측은 인도주의를 제기하며 포로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전협정에 반대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 와중인 1953년 6월 18일 포로수용소에서 2만7천명을 일방적으로 석방시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한반도 주변국가들에게 전쟁의 지속은 그들의 국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스탈린은 당시 북이 당하던 피해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전투원 사상자뿐만 아니라 미군의 폭격에 의한 피해를 잘 알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여론동향까지 추적하고 있었다. 정전협상이 지연됨에 따라 북의 피해는 늘어만 가고 여론도 악화되고 있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조선은 전쟁으로 생긴 사상자 이외에는 아무런 피해를 본 것이 없다”고 궤변을 펼쳤다. 소련에게는 미군을 동북아시아에 묶어두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폐허에서 경제를 재건하고 동유럽을 공고화할 시간이 필요하던 당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회였다.

  모택동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정전이 되면 소련이 공여하던 군사원조가 감축되거나 중단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스탈린은 “미국이 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절대로 대만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라며 중국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모택동도 전쟁이 계속되면 미군이 한반도에 묶여 다른 데 관심을 돌릴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는데 동의했다. 모택동은 김일성이 정전협상을 조속히 종결짓자고 종용하자 이를 스탈린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그 날 스탈린에게 정전협상의 조속한 종결에 반대한다는 전문을 보내기까지 한다.

  트루만에게 한국전쟁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2차대전 종식과 함께 세계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1950년 전후 세계전략으로 NSC 68을 채택했다. 전세계적 규모에서 공산권을 군사적으로 봉쇄한다는 이 전략은 한 가지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론이 군대의 증강과 국방예산의 증액을 지지하지 않고 있었고, 국방예산은 계속 삭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1950년 GDP의 5%였던 국방예산이 1953년에는 14.5%로 3배가 증액됐다. 애치슨의 말대로 “한국전쟁이 [NSC 68]을 구제해준 것”이다. 거기다 정전협상에서 공산권 포로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많은 이들이 자유세계를 선택했다고 선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한국전쟁을 세계적 냉전으로 진화시키는데 결정적인 것이었다.

  각국의 이해관계로 정전협상이 지지부진 2년을 끄는 동안 피해를 본 것은 군인과 민초였다. 이 기간에 유엔·국군과 공산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대부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엔군과 국군은 12만 이상, 공산측에서는 25만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기간 북은 미 공군의 폭격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었다.

  주변강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2년이나 더 전쟁을 치룬 끝에 정전조약이 체결되기는 했지만, 이 조약 4조 60항이 요구하는 “평화적 해결”은 60년이 되도록 이뤄지지 않고 있다. 평화적 해결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이익을 본 건 누구고 피해를 입은 건 누구일까? 정전협정 60주년을 앞두고 그 협상과정을 되새겨 봐야 할 이유이다.

2013년 6월 10일, 서재정(존스홉킨스대학)

서재정 대학 교수
출생1960년 00월 00일
출생지대한민국
경력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서재정 교수님께서는

 7월 6일(토) 14시부터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학술토론회> 끝나지 않은 전쟁 60년, 평화의 길을 묻다'에서

발표를 하실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신고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평화에세이]  김동춘, 평화는 바로 우리의 일상의 문제 

  사람들은 평화는 자신과 관계없는 아주 고상한 가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국가들 간의 전쟁과 갈등에 무력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가 간의 전쟁은 국회조차도 통제하기 어려운 최고 권력자들의 고도의 정치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이 그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노무현 정부 당시 이라크 파병 결정과정에서 보았듯이 애초 이라크 파병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대통령이나 정부조차도 결국 전통적인 한미관계의 틀을 넘어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실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 간 전쟁과 갈등 문제에 관한 한 더욱 무력감을 갖고 있고, 그 사회의 민주주의의 수준이 낮을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인간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고, 최고권력자들의 생각과 판단, 그러한 권력자들을 선출하는 국민들의 판단과 생각이 바뀌면 세상은 변하게 된다. 전쟁이 나서 죽고 죽이는 존재는 주로 군인이지만, 전선이 없는 현대전에서는 민간인들이 군인보다 훨씬 많이 죽는다. 그렇다면 민간인들은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을 지지하거나 그것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셈이다. 이 점에서 권정쟁 선생님이 2004년 당시 이라크 전쟁 발발 후 김선일씨의 사망을 보고 쓴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는 글은 일상적 삶과 전쟁의 관계를 잘 밝혀준 에세이였다. 그는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를 했다. 즉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미국은 이라크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을 감행했고, 우리는 그 전쟁의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풍요를 지속하고 싶어서 미국 군대가 한국에 주둔해야 한다고 엎드려 빌면서, 우리의 주권을 미국에 양도하고 남북한 간의 전쟁상태를 부끄럽게 여지기 않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승용차를 버리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니고, 아파트 평수를 줄여서 좀 불편하게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아까운 젊은 목숨이 죽은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권정생 선생의 주장은 미국의 평화주의자 니어링(S. Nearing)의 주장과도 통한다. 20세기 들어서 미국이 전 세계에 모든 분쟁과 전쟁에 개입한 것은 바로 오늘의 자본주의 유지 발전의 피라고 할 수 있는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미국의 정치가들이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들을 선출한 미국인들이 좋은 집, 좋은 차를 굴리면서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계속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중산층이 누리고 싶어하는 삶을 모든 미국인과 전 세계 사람들이 누리게 된다면 지구가 6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풍요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면서 전 세계 거의 천 곳 이상에 미군 기지가 설치되어 모든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나 전 세계의 모든 분쟁에 개입하는 일을 용인하거나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인들이나 유럽 부자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의 부와 일자리를 위해 지난 시절의 냉전, 오늘날의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전 세계에서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인들은 지난 60년 동안 지속되는 중동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원인제공자가 바로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에 주로 기인한 것이며, 사우디를 비롯한 중공 여러나라의 독재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인권탄압을 묵인한 것도 자신들의 부와 일자리의 요구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동아시아나 전 세계의 군비경쟁의 강화나 아프리카 여러나라에서의 종족들 간의 분쟁과 학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등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유럽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줄이고, 그러한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는 세력을 제압할 정도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945815일의 남북한의 분단 역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 소의 패권전략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지난 1950년의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 세력의 무력통일의 열망과 상황 판단 착오에 주로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분단을 지속시킨 내외적인 조건은 바로 미국과 한국, 그리고 북한의 권력자들의 기득권 유지와 이해관계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이해를 국민의 이해와 요구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미국과 남북한 국민들의 판단과 의식은 전쟁이 실제 가져온 비참성과 그 주요 피해 집단, 그리고 사실상의 전쟁상태인 분단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하는 비용들과 비용의 실제 부담자들에 대한 무지에 기초한 것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그 전쟁의 희생자가 된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만 충분히 알고 있어도, 누가 이 전쟁으로 이득을 보았는지에 대한 자료나 정보가 충분히 공개되고 그것이 교육된다면 한국사람들의 분단과 전쟁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정전 60년을 맞아, 교육과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북한 탓으로만 돌리는 데, 익숙한 한국인들은 이 분단 전쟁 체재를 유지하는 데는 한국민들의 몰이해,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계속 추구하고 싶어 하는 태도도 중요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한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을 권력권에 진출시키지 못한다면, 군사력에서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위에 있는 남한이 왜 막대한 예산을 미국 무기도입에 지출해야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의문을 품고, 또 정치가들에게 묻지 않는다면, 자신과 자신의 자녀가 또 다른 전쟁과 갈등의 희생자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김동춘 대학 교수
출생1959년 09월 29일
출생지대한민국 경북 영주시
경력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부교수

신고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