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문연 강좌/2013. 역사적 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3.12.17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및 사진후기] 4강 : 인민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노경덕, 광주과학기술원)
  2. 2013.12.03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및 사진후기] 5강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3. 2013.12.03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및 사진후기] 3강 :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이주영, 서울대학교)
  4. 2013.12.03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및 사진후기] 2강 :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한상구, 역사문제연구소)
  5. 2013.12.03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및 사진후기] 1강 : 지금 왜 민주주의인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6. 2013.11.16 11월 21일, 목, 오후7시.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 역사적 민주주의]
  7. 2013.11.15 11월 28일, 목, 오후7시.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색(이승원, 서강대학교)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 역사적 민주주의]
  8. 2013.11.08 11월 15일, 금, 오후7시. 인민민주주의란 무엇인가(노경덕, 광주과학기술원)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 역사적 민주주의]
  9. 2013.11.01 11월 7일, 목, 오후7시.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이주영, 서울대학교)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 역사적 민주주의]
  10. 2013.10.25 10월 31일, 목, 오후7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한상구 역사문제연구소)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 역사적 민주주의]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4강 : 인민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노경덕(광주과학기술원)

 

 

1. 인민민주주의의 개념의 특이성 : 민주주의의 일반적 정의와의 비교

  -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 역사의 산물

 

 

 

2. 초기 소련역사와 민주주의 : 인민민주주의 개념의 형성 과정

  - 레닌과 볼셰비키의 "민주주의"론

  - 러시아 혁명: 소위 "혁명적 민주주의"

  -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 시기: 민주주의 개념의 변화

 

 

 

3. 1930년대 국제정세의 변화와 인민민주주의의 탄생

  - 스탈린시대 민주주의의 의미

  - 파시즘의 대두와 소련 및 유럽 공산주의자들의 대응

  - 코민테른의 인민민주주의 개념 공식화

 

 

 

 

4. 제2차 대전과 그 이후의 인민민주주의

  - 전후처리: 반파쇼, 반제국주의, 반봉건

  - 스탈린(주의자들)의 역사발전 법칙과 인민민주주의의 위치

  - 인민민주주의의 체제들: 동유럽과 동아시아

 

 

 

** 주의 : 본 강의는 자세한 강의안이 마련되지 못했던 관계로, 간단한 목차만을 제공합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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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5강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80년대 변혁운동과 민주주의 : 1980~1987

 

 

 

1. ‘80년대’라는 의미


‘80년대’ 라는 시기를 보는 데 어려움(혹은 난점)

- 이번 강의를 준비하고 대면하며 마주하는 어려움은 80년대가 ‘일괴암적’(monolithic) 시기로 인식되는 문제, 시대 체험자/비체험자 간의 자의적/편의적 해석의 가능성, 80년대가 사상과 운동으로만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의구심 등


- 그럼에도 80년대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그 이전/그 이후를 구분하는 ‘사상과 운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판단. 각성의 시대, 민족민중적 학문, 혁명의 시대 등 80년대에 대한 ‘이미 전제된 이해/해석’(先理解)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80년대의 사상과 운동이라는 ‘특이했던 시대’가 출현하고 10여년간 유지된 동력을 내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


- 80년대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는 70년대에 대한 ‘반정립’으로 80년대 ‘대안적 민주주의’를 어디/어떤 역사적 체험으로부터 도출했는가(80년 광주/사회성격/계급분석-주체)란 문제와 그 결과 제기 되었던 ‘대안적 국가’(혁명노선 및 그 소시기 전술적 형태)에 대한 문제임. 다만, 80년대에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그 자체에 대한 논쟁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어떤 대안적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과학적 판단을 위한 사회성격 논쟁에기반을 둔 계급분석와 세력배치 그리고 민주변혁을 위한 조직/정치노선이 강조된 시점


- 짧은 강의에서 모든 입장을 전부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1) (70년대와 구분되는) 80년대의 의미, 2) 80년대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재해석된 80년 광주의 문제, 3) 80년 서울역 회군에서 85년 2.12 총선 시기까지 제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 4) 이른바 ‘반미론’‘반제론’이 제기한 한반도적 차원의 대안국가 형성의 문제 그리고 5) 86년 개헌논쟁 시기제기됐던 개헌의 상 - 즉 대안적 국가권력의 형태 - 과 그 근거 등에 관해 소개하도록 함(87년 이후 논쟁과 학계에서 진행된 사구체 논쟁은 다루지 않음).

 

 


80년대 사상의 특성
(1) ‘혁명의 시대’ 혹은 ‘무사상의 사상의 시대’


- 80년대에 대해 각성의 시대, 계급주체가 새로이 구성된 시대(김진균) 등 의미가 부여되고 있으나 당사자, 해석자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함. 오히려 검증될 수 없는 ‘에테르’가 난무하는 시대(예: 이념적 레테르). 80년대 지식인들은 이전 시기를 ‘무사상, 무성격’이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구성한 이론, 실천에 대한 본격적 평가는유보하고 있는 상태임.


- 2000년대 들어서 80년대에 대한 남성주의, 권위주의 등 비판이 제기되었고 수용되기도 하였으나, 정작 주체들이 이것이 80년대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연원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침묵함.


- 되돌이켜 보면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만 존재했던 것은 아님(‘부상하는 사상’). 지배적인 것은 여전히 반공주의였으며(예: 유성환 - “반공국시 사건”), 미약하지만 자유주의도 공존했음. 80년대를 특정한 사상으로 ‘규정’하는 관습적 방식이 오히려 80년대 사상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함.

 

 


왜 8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확산 되었나
- ‘확산’은 지식인과 일부 사회운동으로 제한해야 할 것이며, 이를 80년대 당대에 ‘대중화’라고 보기는 어려움(예: 대학, 대학생의 경우에 제한된 현상). 대학 사회도 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하게 마르크스주의가 쇄락한 것을 보면, 채 10년을 유지하지 못한 셈.


- 확산 이유로는 ‘반공주의’ ‘분단체제’ ‘80년 광주’ 그리고 현상유지적인 미국식 사회과학(근대화론, 구조기능주의 등)에 대한 반발 등 다양한 이유는 있을 것임. ‘80년 광주’가 그자체로 마르크스주의를 불러온 것은 아니지만, 이후 이론과 실천의 전개과정(무장투쟁, 국가권력/조직구성 등)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함. 다만 80년 광주의 ‘제도화’는 마르크스주의 퇴조와 어느 정도 맞물리는 문제로 추정 가능함.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문제
-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내외적 비판이 이미 지나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과 억압적 국가권력,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감 그리고 지식인과 노동자의 연대가 교차하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시간’ 격차는 꽤 큰 것임.


- 하지만 이를 ‘비정상성’ ‘예외성’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일면적임. 오히려 ‘세계사적 시간대’를 한국 사회/지식인들은 경험할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당해온 결과, ‘막대 구부리기’ 효과로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함.

 

- 80년대 전반이란 시간대로 보았을 때, 신군부의 등장 자체가 이전에 비해 매우 폭력적이며 그 강도가 매우 강했기에, 압도적인 폭력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명료한 대항 이론이 필요했고,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마르크스주의였음.


-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실천/현실의 대안으로 자기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한국 사운동이 인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 활동가들 내부에서 CNP논쟁 등이 전개된 지 채 10년이 못되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외적 상황(현실 사회주의 붕괴)과 내적 상황(사회운동의 약화, 동원능력의 한계 - 1991년 즈음)으로 가시화됨.


- 그렇지만 지식인들이 감지한 이론의 위기와 현장 활동가(노조운동가, 조합원 등)가 감지한 상황은 ‘시간 차이’가 존재했음. 1991~93년경 노동운동 위기론이 확산되었을 시점에 대한 활동가/조합원들의 사후적 구술자료(전노협 연구, 2012)를 보면, ‘위기는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음.

 

 


마르크스주의를 대안으로 삼은 사회 모델
-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혹은 북한. 각각을 대안으로 사유한 맥락은 무엇인가? 하나로 수렴되거나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80년대 초반 여러 가능성이 모색된 것은 사실임.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 핀란드 역까지 등 사회주의 사회를 낭만적, 영웅적으로 그린 텍스트들이 많이 읽힘. 뿐만 아니라 87년 전후로 항일전쟁 시기 혁명적 영웅 뇌봉(雷峰) 등 혁명적 영웅주의를 모델로 한 텍스트는 흔한 독서 코스였음.


- 다만 명시적으로 대안적 사회모델을 1917년 러시아혁명, 북한 사회주의 체제로 상정하기 시작한 시점은 1986년 사회운동 내 분파가 정립되는 즈음으로 판단할 수 있음(소위 NL/CA 구도). 그 이후 NL의 경우 북한을, CA의 경우 러시아혁명 모델(“제헌의회 소집”)을 명시화시켰고, 정치적 노선에 따라 읽는 텍스트, 사용하는 용어/개념 등이 구분되기 시작함.


- 왜 북한과 러시아를 대안으로 삼았는가는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85-86년 시점에 전자를 대표하는 ‘식민지론’은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동시에 매력적이었음. 역사(항일무장투쟁), 식민지론, 품성론 등 구도는 이전 사회운동 논의 구도에서 발견하기 힘든 생경한 것이었음. 그 즈음 논의된 김일성 가짜 논쟁(서대숙), 항일무장투쟁사 등은 기존 근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전변시키는 효과가 존재함(마치 50-60년대 재일조선인들의 조국[祖國]에 대한 감정이 80년대 중반 한국 사회로 뒤늦게 전이된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과도한것일지 모름; 양영희 감독, 디어 평양에 등장하는 재일조선인 1세대의 멘탈리티).


- ‘금기된 것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당시 한국 지식인들은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물리력을 지닌 국가권력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이는 아마도 당연하게도 ‘성공한 사회혁명’의 모델과 사례에 관심을 갖게 했을 것임. 80년대 중반 한국 지식인들에게 최초의 사회주의 모국 러시아를 모델로 사유하는 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임(굳이 짜르 시기 사회경제적 조건과 한국과 유사성 등에 관해 자세히 논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임).

 


대중과 마르크스주의
- 80년대 급격히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되었다고 대중의식까지 확산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움. 87년 6월 민주화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최소강령’(직선제 쟁취)가 80년대 대중의식의 평균치라고 볼 수 있음.

 

- 대중/대중운동 수준에서 지식인/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감/공포는 80년대에도 여전히 강했음. ‘노학연대’를 내세웠지만 ‘운동’ 수준에서 진행되었지 이것이 ‘기층 수준’에서 동의되고 확산되는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의 자율성을 확보한 전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함.


- 사상/운동으로서 80년대 마르크스주의(지식인)가 대중과 일상적으로 성공적으로 결합했는가는 - 지식인들의 사회변화에 대한 헌신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 차원에서 - ‘논쟁적'문제라고 볼 수 있음. 86년 5.3, 애학투련 등 사건으로 사회운동진영은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고,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직선제 개헌론’을 내세웠던 것임.

 

 

 

 

 

 


2. 광주, 시민군 그리고 민주주의

1989년과 2002년 5월 광주에 대한 두 가지 대담과 쟁점
- 1989년 역사비평(최장집 외, 「광주항쟁의 역사적 성격과 80년대의 반미자주화 투쟁」, 역사비평 No.5, 1989) 좌담의 주제는 광주 항쟁(가끔 “광주 사태”란 표현도 사용)을 둘러싼 ‘왜 광주인가’, ‘광주 5.15전야의 정치경제적 위기’, ‘신군부의 성격’, ‘항쟁의 한계’ 등 과 같은 쟁점이 토론됨. 토론 내용도 사회경제적 상황, 국가-상부구조상 위기 방식으로 논의됨.


- 반면 10여년 뒤 2002년 당대비평(정근식 외, 「광주20년-국가의 기억, 민중의 기억」, 당대비평 11호, 2000)의 좌담은 논의 의제가 크게 달라짐. 이는 “그 동안 많은 성취에도 우리는 많은 상실과 고통을 더 깊이 느끼고 있는지 그 괴리에 대한 성찰”이란 주제로 논의가 전개됨. 실제 <당대비평> 좌담은 대부분 80년대 학번들로 이뤄졌고[앞 좌담 중에 80년대 학번은 김민석 이외에 없음] 광주이후 20년을 맞아 질문이 멈추어진 80년 광주에 대해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주된 화두였음. 특히 국가기념일, 광주보상법 제정 이후 ‘광주의 과거화’‘광주의 국가화’ ‘항쟁의 사유화’ ‘학살 발생 지역의 정치적 경쟁력으로 문제 해결’ 등에 대해 강한 우려가 옅보임.


- 2002년 당대비평 좌담에서는 항쟁의 성격, 주체 등을 다루었던 89년 주제와 달리, 광주의 전국화, 광역화, 세계화(정근식), 과도한 공식적 기억으로 함몰과 그 과정에서 배제된 소수의 기억(김무용), 국가의 힘을 빌러 항쟁의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태도는 승리한 자들의 담론으로 광주가 제도화(김무용)됐다고 강하게 비판함. 또한 좌담자 내부적으로도 약간의 의견 차이가 발견되는 데, ‘운동의 산업화’ ‘새로운 과제를 광주가 포용’(예: 동아시아 평화인권 회의, 광주-부산-제주의 새로운 연대틀) ‘축제로서 광주’ ‘광주가 받은 것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 데 비해, 김무용과 문부식은 광주의 학살을 방관, 침묵, 동의했던 ‘한국사회의 구조’ 자체를 문제시 삼으며 민주주의-인권 문제가 미해결인 상태에서 동아시아 연대나 평화로 의제 이동은 과거 기억이 다시 왜곡될 가능성이 높고 억압적 국가의 인적-제도적 청산 문제의 제기는 다음 단계가 왜곡되지 않기 위한 절실한 과제. 이는 이전 시기와 구분되는 ‘질문의 전환’임.


- 한편 89년 역사비평 좌담에서 학생운동가 김민석(80년대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일 민주당 국회의원)은 토론에서 다뤄지지 않은 내용으로 광주 당시 투쟁형태, 방법, 정치노선/조직 노선 등을 언급. 이는 ‘비조직적-자생적 항쟁’으로 광주를 의미지우는 80년대 전형적 방식임(예: 조희연 - 대중의 자발적 투쟁만으로 변혁은 불가능하고, 지도역량 문제가 광주이후 제기). 또한 80년 광주, 신군부 등장 등은 ‘필연적’인 구조적 산물로 이해하는 경향이 엿보임. 뒷부분 김민석의 발언은 학생운동이 광주를 이해하는 전형적 방식임. 예를 들어 ‘최초의 무장항쟁’ ‘대중투쟁의 발전은 합법칙적’ ‘과학적 의미에서 폭력 투쟁화’ 등이 그것임(이는 이종범에게도 발견되는 데, ‘근현대사의 합법칙적 필연적 도정의 불가피한 통과점’, ‘우리 역사에서 보편성의 관철’ 등이 그런 인식)


- 광주 항쟁 당시 대중의 ‘요구사항’에 대해 “다수 대중의 생활상의 요구 수렴”(이종범,)도 존재하나, 전두환 퇴진 등 ‘자유민주주의’ 수준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임. 하지만 낮은 요구 수준에도 ‘범시민궐기 대회’를 직접민주주의의 원형(동학농민봉기시 집강소도 언급)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나, ‘민중권력의 맹아’로 이해하지는 않음(방어적인 것. 이는 80년대 주류적 이해와 다소 거리감이 존재)


- 특히 두 대담에서 두드러진 차이는 광주와 미국과 관계임. 80년대 민주주의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가 종속-신식민지성이라면 ‘새로운 민주주의’ ‘대안적 국가’의 건설이란 면에서 미국-제국주의 문제는 논쟁적인 문제임. 우선 89년 좌담에서 발언을 보면, 80년 광주는 “친미적 세계관의 지적 헤게모니가 상실되는 계기”, “대중적 반미운동으로 85년 서울미문점거”.


- 반면 2002년 좌담, 특히 문부식은 80년 반미운동의 인식상 무능력(미국 환원론)을 질타하며, 제3세계 민족주의가 지닌 역기능에 대해 경고함. 구체적으로 미국을 외부의 ‘적’으로 사고하는 외인론(外因論)을 비판하며, 우리들의 무의식/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미국적 가치를 욕망하는 민중/대중은 전혀 사유하고 있지 않다고 강하게 질타함(“미국의 가치를 한국이란 탈식민의 신체 속에 내면화시키는 일, 혹은 시민종교로서 친미주의).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인의 사람의 의미가 미국=문명=근대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고 변화되고 있는지 탐색하는 것을 촉구하는 셈임(“한국인 안의 미국”). 대표적인 예로 그는, 부산 미문화원이 반환된다는 ‘쾌거’(快擧)에 대해, “한국인의 특수하고 모순된 의식이 반영된 (사건이며-인용자) ... 끝없는 선망과 콤플렉스와 등을 댄 증오”라고 꼬집는다(91-한국인의 신체에 걸린 주술)

 

 


시민군, 절대공동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 80년 5월에 대한 고전이 된  5월의 사회과학(최정운)의 키워드가 매우 단기간 동안의 80년대 민중론과 계급론에 기반한 80년 광주해석(이른바 시민군-항쟁파-노동계급 주도설-‘새로운 국가의 탄생’-국가중심적 해석)에 반기를 든 ‘절대공동체’라면,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김정한)의 키워드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중봉기와 그 과정에서 이의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로 인해 사후적으로 부정당한 자유민주주의’(대중봉기=>집단적 주체형성
=>새로운 사회운동 테제)라고 말할 수 있음.


- 앞선 좌담에서 5.22~27을 ‘민중자치’ 시기(전반기 수습위=투항파 주도기, 후반기=항쟁파 주도기)로 파악한 데 비해, 최정운은 오히려 20~21일 간 ‘거리투쟁시’ 짧은 절대공동체 시간과 22일 이후 해방광주=대안국가 형성으로 구분한다. 이는 양자 간의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임.


- 이런 주장을 둘러싼 최정운의 ‘절대공동체’를 ‘반정치의 신화’로 비판하는 것임. 김정한은 계급, 재산, 지위 등이 공동체에 용해된 시간인 ‘사랑의 공동체인 절대공동체’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명했고, 그 원인을 최정운은 80년대 광주 논의의 중심인 대안국가(항쟁파/시민군 중심의 조직과 위계구조)로 지목했지만, 사랑-절대정신-휴머니즘으로 절대공동체를 설명하는 것은 80년 광주에서 ‘정치를 소거’시키는 주장이라고 최정운의 논지를 비판함.


- 또한 80년 광주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대안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고(태극기, 애국가 및 기타 슬로건 및 요구), 오히려 80년 항쟁과정에서 참여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긍정했던 것은 기존의 ‘대한민국’이었다는 것임. 그의 주장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80년 광주의 사후효과(“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후 복수”)로 형성된 80년대 광주 해석 속에서 ‘광주 폄하’의 가능성 속에서 ‘차마’ 발화되지 못한 것(80). 오히려 80년대에 5.18의 효과로 드러난 덧은 “대중봉기의 사후 효과로서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 있음.


- 시민군의 주체성으로 김정한이 지적하는 ‘형제 공동체’는 유사가족의 형태로 이후 80년대 사회운동에서 반복되어서 나타났고 이는 80년대 민주변혁운동 주체의 모델이 됨. 대표적인 것이 열사-전사-투사라는 의미 계열임. 시민군의 죽음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탄생을 낳았고, 이는 80년대 변혁운동과 사상의 형태로 반공주의/자유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게 됨.

 

 

 

 

 


3. 민주변혁과 혁명 담론의 등장 : 1980~1985년

 

- 80년 광주 이후 민주변혁 논쟁은 제1단계인 85년까지, CNP에서 보여 지듯이 운동 주도이념, 주체, 운동방법, 사회성격과 그 방법론 등을 둘러싸고 (종속이론, 주변부자본주의론으로부터 탈각해서) ‘마르크스주의’의 획득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감. 이 시기에 초보적인 민주변혁의 분화인 CNP논쟁, 학계에서 제1단계 사구체 논쟁 등 ‘원칙’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짐. 이는 70년대 소시민,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정상화라는 민주주의의 방향을부정하고 대안적 민주주의, 민주변혁을 위한 자기 정체성을 모색하는 단계.


서울역 회군을 둘러싼 논쟁과 평가
- 그 시작은 아마도 서울역 회군에 관한 문제로 추정됨. 80년 5.15~16 서울역 회군과 비상계엄 확대는 분명 민주화 운동의 패배임. 그렇다면 어떤 상황과 조건이 이런 ‘민주화의 좌절’을 낳았는지 시계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함. 그랬을 때 80년 5월 중순 사회운동의 ‘선택’ ‘전략’이 지닌 한계를 파악할 수 있음.


- 서울역 회군, 5.17 비상계엄 확대, 5월 광주항쟁 이후 80년 하반기 학생운동 세력79년 하반기와 서울의 봄 시기 운동 세력에 대한 자기 평가를 무림, 학림 각각 수행함.

 무림

 학림 (<전망>)

 

- 광주를 무력진압한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규정하며, 당시 학생운동은 적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민중과 괴리, 전체 역량의 효과적 발휘에 실패,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안이한 정세인식을 지녔다고 자기 비판- 전두환 정권의 본질: 국내매판자본, 매판관료, 군부 등으로 구성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정치적 외피로 “파시즘”


- 미군의 본질은 “영원한 우방”이 아님


-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 : 국가자본화, 중소자본의 하강분해로 노동수탈 강화


- 학생운동의 목표 : 통일된 민족국가, 이를 위한 광범위한 민중연합과 반파시즘 투쟁에서 ‘전체운동의 주도체’


- 운동의 주체 : 근로민중

 

- 그러나 시위만능식 투쟁관은 타개해야하며, 학생운동의 민중운동으로 수렴을 집단화, 체계화(“현장론”)

 

- 70년대 각 부문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반정립’(낮은 조직수준, 현장준비론 비판)


- 학생운동=문제제기집단, 노동운동=문제해결 집단으로 정식화


- 무림 현장준비론 비판 : 학생운동의 정치투쟁 부대로서 역할을 경시, 민중에 대한 잘못된 우상화, 결과적으로 무림의 준비론은 대중의 정치투쟁 요구를 억제하는 데 급급하다고 비판


- 동시에 80년 5월 주전론(主戰論)도 왜 투쟁을 해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제기하지 못했고, 학생회에 영향력을 관철시키지 못 했고 가두시위 지도도 방기했다고 비판


- 80년 5월 투쟁 평가 : 전술적 유연성 결여(김재규 규명, 야당 연합 등), 전두환의 본질 파악에 불철저, 시간은 민주화운동 편이라는 식의 안이한 정세관


- 학생운동의 과제 : (1) 민중운동의 기반으로 ‘선도적 정치투쟁’을 주도, (2)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으로 대중과 괴리됐다는 ‘무림’의 주장은 현실 학생대중의 의식을 무시하는 견해라고 비판

 


80년대 광주 직후 운동의 도래 : 70년대 사회운동의 ‘부정’
- 81~83년 시기는 70년대 민주회복, 부르주아/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극복 등이 운동주체, 반외세 등 측면에서 나타나지만, 그들 과제가 나열되는 형태였지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라는 평가/판단 속에서 구체화된 것은 아님.


- 초기 전면적 투쟁론 대 단계적 투쟁론은 광주를 경과하면서 1) 4.19와 같은 대중봉기에 의한 민주화의 환상 등 낭만적 시대의 좌절, 2) 한국 사회 모순적 구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필요성


- 82년 소책자 야학운동 비판(야비)의 등장 : 1) 무림의 입장을 계승, 2) 학생운동이 전체 사회운동 지도역량을 형성하는 주도체 역할이 중요하므로, 소모적 시위 중심의 투쟁보다 학생대중의 일상공간, 학생대중 조직 강화 강조, 3) 선진적 학생의 노동현장 이전
<=> 학생운동의 전망(학림 후신)의 야비에 대한 비판 : 선도적 정치투쟁의 필요성 강조, 사회운동의 선도체로서 학생운동을 강조(그러나 이런 비판도 학생시위만으로 사회변혁이 불가능, 학생운동 중심적 사고라는 반비판에 직면) -> 이후 학림노선이 학생운동의 헤게모니 장악(학생=문제제기집단, 노동운동=문제해결 집단)


- 84년 깃발 논쟁 : 1) 깃발 그룹(MT-선도투쟁과 민중지원 투쟁의 결합) : (1) 학생회만으로 선도적 투쟁을 불가능하므로 반공개 투쟁조직 건설 주장(“지도부의 올바른 투쟁노선으로 대중을 주체로 만듬”) => ‘반독재민주화투쟁위원회’(민투, MT), 삼민투를 조직, 85년미문화원 농성투쟁 => 하지만 깃발 그룹은 역설적으로 선도투쟁으로 학생회 무력화(학생회=투쟁의 도구/대중의 대상화) 및 투쟁위원회만 투쟁을 하는 기형적 현상이 초래 (2) 2.12총선시 초기 보이코트 입장에서 참여 전술로 변화


2) 반깃발 그룹(MC-대중투쟁론) : (1) 공개대중조직인 학생회, 학회에 기반한 대중 활동 강화를 주장, 광주학살진상특별위원회 등 단기 투쟁기구 조직으로 정치투쟁 전개(단계론[대중조직->대중설득->대중수준에 맞는 투쟁 식] (2) “타오르는 분노를 구체적 실천으로”문건을 통해 총선의 중요성을 주장하다가, 야당과 제휴투쟁은 환상만 불러일으킨다는 정반대 입장으로 전환(“선주체형성론”)

 

 

 

유화국면의 성격과 1985년 2.12총선에 대한 대응
- 2.12 총선에 대한 태도는 중간계급, 야당과 제휴/연대라는 통일전선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후 민주변혁의 갈래가 되는 CNP논쟁의 맹아


- 초기 논쟁 과정에서도 호국단 폐지, 졸업정원제, 이철희/장영자 사건 규탄, 일본 교과서 왜곡 규탄, 레이건 방한 반대 등 민주화운동이 지속 => 83. 12 유화국면이 대두(학원자율화) : 이를 둘러싸고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하는 입장과 사회운동의 강화에 따른 전두환 정권의 후퇴를 주장하며, 합법적 공간에서 새로운 투쟁 조직을 주장하는 입장이 각각 제출


- 유화국면이 대두된 원인에 대한 입장 : 1)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미중일 유착), 2)사회운동 강화로 인한 군부독재의 기만적 양보 정책, 3) 제한적 활용론 등이 공존함.

- 그럼에도 84년 상반기 학생운동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약칭 학자추)의 대중집회를 통해 학생회 직접 구성 추진(“학생회 부활 투쟁”) => 학회 활성화, 민중연대(민주생활조사위원회 등), 대학간 연합투쟁 전개


- 2.12 총선에 대한 사회운동 진영의 입장 : 1) 83년 상반기까지 선거보이코트론(선거=
배층의 정당성 강화 수단) => 83. 12 유화조치 이후 민청련 등 야당을 활용해 민정당 반대를 내거는 선거의 ‘전술적 활용론’이 지배적인 입장으로 정리(사회운동 헤게모니 하에 ‘제휴투쟁론’) => 총선에서 신민당의 승리는 운동진영에게 자유부르주아/야당에 대한 태도(연대, 타격, 분할 견인 등) 정립을 요청

 

 


CNP에 대한 평가 : 83년 유화국면~85년 상반기
- CNP를 통해 비로서 3가지 형태의 구분되는 대안적 국가-민주주의가 존재하는지 확인이 되는 시점. 단, CNP역시 사회성격에 입각한 논의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존재함. 이 논쟁


- 논쟁이라기보다 ‘의제 논쟁’pseudo debate(3가지 입장 간 논쟁이 부재) - 의 배경은, 1)83년 유화국면 후 열려진 자유화 공간에서 민주화의 내용을 체계화/사회운동 이론의 ‘과학화’, 2) 2.12 총선을 통한 자유부르주아(신민당) 다수 의석 확보로, 이들에 대한 대중의 환상/한계를 밝히고 사회운동의 독자적 방향을 차별화시키기 위한, 3) 유화국면 아래에서 1983. 5 김영삼 단식이 계기가 되어 민청련(9월),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등 야당과 독자적인 사회운동이 조직됨에 따른 70년대 재야운동과 다른 대중운동/조직운동 원칙이 관철되는 운동노선 정립의 요구(민중민주협의회/국민회의 간 통합에 반대한 민청련의 자기 입장 정당화)

 

- CNP론을 둘러싼 논의(1984~1985년 봄/1985. 10월경)는 조직적 주체에 의해 논리가 정교한 주장이라기 보다는 ‘이념형’에 근사한 논의로, 이미 NDR 입장을 정해놓고 나머지 2가지 입장을 비판하는 과정임. 공식적 논의는 1984. 4 민청련 운동론 세미나 과정으로 추정됨. 민청련이 NDR론으로 수렴했던 주요 내용은, 1) 신식민지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2) 주요모순으로 제국주의/독점자본/군부 대 민중으로 상정, 3) 종속적 독재 권력에 대치하는 민족민주적 민중연합을 창출한 뒤 사회변혁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에서 성장 전화론), 3) 주도 역량으로 노동계급, 학생, 인텔리는 선도역량


- 이 논쟁을 평가해 보자면, 1) 과학적 운동론 정립의 시초, 2) NDR 정식화를 통한 민족문제의 중요성을 이론적 차원에서 심화, 3) 사회운동에서 모순, 주체 설정에서 노동계급헤게모니에 입각한 민중주체론을 정립 등임. 반면 한계로 지적되는 바는, 1) PDR과 구별정립이 어려움(NDR은 변혁의 성격을 지칭한 것이지, 그 주체를 설정하지 못함[민족이 주체인지 불분명?], 2) 민중의 헤게모니 구축에서 자유주의와 차별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점

 

 

 


4. 반미론과 한반도 민주변혁 : 1986년 민족해방론의 수용

80년대 ‘반미’가 의미하는 지점 : 반미감정 혹은 반미주의?
- 한국에서 반미주의는 여러 차원이 존재. 1) 미국 정책에 대한 불만(60년대부터 일상적으로 존재), 2) 미국 전체에 대한 획일적 반대(80년대 일부 존재), 3) 미국이라는 존재의 부정(80년대 급진화된 민족해방론), 4) 미국, 미국인, 미국문화 등에 대한 감성적 차원의 반대(속칭 반미감정, 2000년대 촛불집회 흐름 중 일부 등)


-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 수준은 1) 정책조정(군사, 경제 지원 규모 등), 2) 분단국가의 주권 확보(미군군사작전지휘권, 대민군사력 사용계획 수락여부 등), 3) 남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동북아 지역 현안(핵무기 등)으로 구분 가능.


- 전민족적 차원에서 자주권 확보 요구 등장 : 1984년 예속과 함성(속칭 예함, 1985년 구미간첩단 사건 김성만 저)에서 신식민지론, 미제국주의와 투쟁 전개, 민족의 생존을 담보로 삼는 반핵투쟁 제기 => 민족전체의 안보 담보 요구. 예함에서 충격적 방식으로 서술한 한미관계사는 ‘역사[민족해방운동사]가 억압된 기억[반공주의, 제국의 지식에 의해 침묵된 기억]이란 방식을 통해 현재[80년대 광주와 미국의 핵위기]를 위한 내면적 에너지를 간직한 과거를 보존하고, 또 분출한 것“ => 80년대 반미운동도 이런 식으로 해석도 가능 -> 예속과 함성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전한반도 차원의 민족적 생존을 이슈로 반미투쟁이 전개


- 86년 반제론에서 미국=제국주의로 파악한 근거는 군작권 장악, 경제침략, 분단 고착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난한 다소 ‘선언적인 것’. 또한 미국이 직선제를 수용할 수 없기에 미국의 군부정권 지원의 실체를 폭로, 반미자주화 투쟁을 대중적으로 고양(高揚)시키는 계기란 ‘직선제 전술’(속칭 “미제의 약간고리”론)도 사후적으로 현실과 달랐음(애학투련 신민당에게 보내는 공동투쟁 시안 참조).

 

 

 


80년대 반미가 등장하게 된 원인
-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가 등장하지 않는 몇 안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에서 반미가 ‘사회’에서 ‘의제-주장’ 혹은 ‘신식민지’라는 사회성격의 형태로 등장한 것은 분명히 80년대 => 구조적/역사적으로 본다면 1948년 분단 국가의 수립은, 민족국가 수립의 결과로 당연히 성립되어야 마땅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의 ‘괴리’를 초래함.

- 폭발적이고 충격적인 측면에서나, 광주 이슈를 대중화시킨 ‘첫 번째 사건’은 ‘부미방’. 다만, 부미방을 포함, 이 시기 반미는 민주주의 표방, 군작권(군사작전지휘권)을 지닌 미국은 민주화운동/광주 학살 방관에 대한 비판 수준, 남북간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한 비판은 아님. (85년 미문화원 점거 투쟁도 광주학살에 대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애써온] 미국 책임 사과 및 군부독재 지원 철회, 양심적 미국인에게 양국의 주체적 자주권 존중 촉구 수준)
=> 정리하자면 “비대칭적 이중성”(미국의 군사/경제적 이익의 유지를 위한 가치 vs 민주주의를 위한 군사독재의 퇴진) 가운데 ‘후자’를 지키지 않은 점을 비난한 셈.

 

- 전환의 계기로서 1983년 : 1) 주한대사 워커의 발언(한 국가의 독립은 외국과 연대의 회피가 아니며, 절대적 주권은 비현실적임. 한미동맹체제 하에서 주권 공유의 필요성 강조)

2)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신냉전체제) : 79년 중반 - 특히 이란 샤 정권 붕괴 이후 - 부터 개시된 군사주의 노선, 즉 군비팽창, 동시보복전략, 저강도 전략, 중동 산유국에 대한 소련 개입시 북한 공격 천명 등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를 방어 중심에서 (북한 붕괴를 전제로 한) ’적극적 공세 전략‘으로 변화 => ’핵무기‘는 한국 사회 비판적 지식인, 사회운동 세력에게 위기감 고조(’미소간 핵대리전쟁장‘ => 핵무기 통제 능력의 부재)
3) 한미일 군사동맹 체제 구축 :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장기적인 전략인 3국간 군사동맹으로 귀착, 북한과 적대적 관계/분단구조 영속화, 제3국(일본)에 의해 군사 분쟁 가능성을 높임.


- 80년 광주와 핵무기 위협이 증폭되며 군사안보적 측면에서 ‘주권 확보’의 필요성을 제기 : 80년 광주가 군사주권 공유(대민간 군사력 사용권)가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수준이었다면 85년 예함을 전후로 등장하는 구도는 핵무기는 군사주권 공유가 남북한 전체(한반도)의 자주권과 연관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외적 계기(애학투련 투쟁선언 - 팀스피리트, 군사력 증강, 핵전쟁 도발 위협, 남북비밀회담, 유엔 남북한 교차승인 등) => 미국의 의도와 달리, 정반대로 한국 내에서는 남북간 ‘상호주권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시점

 

 

 

80년대 반미운동이 지닌 의의와 한계
- 80년대 초반 그리고 외세론, 제국주의론 등이 심화되며 86년 초반 학생운동 중심으로 확산된 민족해방론은 80년대 이전에는 발견되기 어려웠던 현상. 특히 한반도내 주요 모순을 미제국주의와 민중 간으로 상정하고, 이를 민주변혁이라는 실천과제로 상정. 다만, 86~87년 사이에 민족해방론은 사상-이론-방법적 측면에서 전일화된 것이라기 보다, 문제의식이 구체적으로 부각된 수준.


- 80년대 반미운동의 특성은 분단국가 주권 확보 수준에서 제기되던 대미비판과 단절한
1)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신민당, 대통령 1회 중임, 비상조치권 약화, 국정감사권 부활, 지자체 직접 선거 등)
2) 군사독재 타도를 위한 민주제개헌론(85. 9-10월. 학생운동 주류, 민청련 제기. 개점. 즉 반미자주화를 ‘민족자주권’ 차원에서 제기. 과거에 ‘주권국가로서 동등한 지위’ 차원과 달리, 한반도, 미국을 포괄하는 ‘상호의존적 주권’ 영역을 인식.


- 하지만 80년대 중반 미국의 제3세계 개입 방식 변화 : 커트패트릭 노선(전략/경제적 이익을 위해 미국은 제3세계 반미, 공산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면 독재정권도 지지 가능, 미국리버럴들의 죄의식 비판) => ‘전제정치’에 대해 반대(신개입주의 노선)로 변화함. 실제 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은 초기 내각제 개헌을 모색하다가 중산층의 이반을 파악하고 전두환 정권에 직선제 수용 압력


- 86년 민족해방 노선의 반미운동이 지닌 한계 : 1) 남한=미국의 식민지라는 인식(반제투쟁의 필연성)은 운동의 당위성을 선동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미국, 남북한, 일본 등 주권국가 간 상호의존적 주권 문제를 다루는 데는 ‘비현실적’, 2) 수령관을 중심으로 한 주체 사상의 수용은 ‘북한=운동의 이념/노선을 지도하는 존재’로 인정해서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저해, 3) 절대적 주권 확보(제국주의로부터 해방 등)를 강하게 주장하는 주체사상은 60년대 중반, 중소분쟁 과정에서 주권국가로서 위상을 공고화하기 위해 탄생한 지배이데올로기(‘자력갱생’ ‘자주노선’ 등)이기에 다른 사상보다 배타적이고 절대적 민족주권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함 => 이는 결과적으로 선언에는 편리하나 상호주권적 영역이 확대되는 동북아 질서에서 주권을 현실화하는 데는 근본적 제약이 존재

 

- 미국의 한반도 정책결정이 군사경제적 이익이라고 ‘간명하게’ 설명되기보다, 그 선택을 둘러싼 특정한 조건, 정책집단, 정치세력적 배경과 인식의 특성의 복합적 결과(카터 자유주의 인권외교의 ‘이중성’[자유주의적 냉전주의])라면, “미국의 활용과 미국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80년대 중반 이후 반미론(그것이 변혁론으로 전화한 민족해방론)의 양극단의 중간에 놓여있는 ‘열린 가능성’이란 무엇일까”란 숙제가 여전히 남음.

 

 

 

 

 

 


5. 개헌, 사회성격 그리고 민주변혁

 

개헌논쟁과 운동진영의 분화
- 85. 2.12 총선에서 야당 공약인 ‘대통령 직선제’가 매개가 되어 개헌논쟁이 가속화(야당 : 민주화=국민에게 정부의 자유선택권을 부여) => 개헌논쟁의 중심은 야당인 신민당과 관계 설정의 문제


- 개헌문제를 둘러싼 입장 분화 :

 1)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신민당, 대통령 1회 중임, 비상조치권 약화, 국정감사권 부활, 지자체 직접 선거 등)


2) 군사독재 타도를 위한 민주제개헌론(85. 9-10월. 학생운동 주류, 민청련 제기. 개헌투쟁=군사독재 퇴진이 중심).

 


3) 삼민헌법쟁취투쟁론(85년 말~86년 2월/서노련 등 노동운동, 예속국독자에 입각해서 한국 사회를 제국주의, 국내독점자본, 파시즘이 대등한 위치에서 결합해 지배하는 사회로 파악하고, 제국주의와 한국 민중 간 모순은 ‘외적 모순’ => 제국주의 모순은 파시즘을 매개로 자신을 관철 => 대통령 직선제 부정하고 대체권력으로 삼민과 삼반세력 간의 반파쇼민주화투쟁 => 헌법제정의회 소집 주장)

 

4) 파쇼헌법철폐투쟁론: 학생운동의 주류적 입장, NDR론-> 개헌을 매개로 한 민중의 주체적 정치권력 참여 주장=> 11.18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농성),
=> 1985. 12 민정당이 국회 개헌특별위원회 설치안 거부, 정당 간 협상이 좌장되면
서 개헌운동은 ‘논쟁’에서 ‘실천’ 차원으로 이동


5) 외세 식민지 재편 국면(86년 3월 이후/NL, 개헌투쟁 무용론. 개헌 운동=지배권력의 정치게임에 불과, 전방입소반대, 시장개방, IBRD 대회 등 반미투쟁 집중) 

 

 

 


제2단계 사회성격 논쟁과 민주주의
- 반제국주의 직접 투쟁론(반제직투론)과 NL론의 등장 : 1) 기존 사회운동의 한계로 타국의 이론적 성과를 무비판적으로 한국에 적용시킨다는 문제의식(식민성/반봉건성의 결합), 2) 사회운동의 ‘반국’(半國)적 한계를 지적하며 식민지 시기 항일무장투쟁 이래 자국의 전통을 강조(이른바 ‘민족자주’ 이념), 3) 사회운동에서 ‘북한’의 위상의 문제가 대두. 즉 남북한의 통일적 변혁 문제가 대두됨(한국 사회운동의 중요한 주체로 북한을 설정하기 시작-> 그 근거는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 민족해방전쟁으로서 한국전쟁, 미해방지역으로서 한국 등 논거), 4) 반외세자주화, 반독재민주화, 조국통일이란 3가지 과제의 공명(共鳴)을 강조

 

 - 반제직투론/반전반핵론의 급진화(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 1) 86년 상반기 IMF/IBRD 개최 반대,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 등 ‘헌법의 예속적 성격 폭로’를 주장, 2) 「반제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 문건을 통해 1948년 이후 식민지 대리통치의 지속, 한국 사회는 미국의 대리통치세력(=마름)으로 간접통치가 됐으나 그 본질은 제국주의에 의한 민족적 지배, 3) 신민당 개헌현판식과 달리 팀스피리트 반대, 문무대/전방입소 반대, 반전반핵, 미제 용병교육 거부 등을 이슈로 이재호/김세진 분신 투쟁 등 급진화

 

- 86년 인천 5.3사건, 애학투련 사건(개헌 이슈보다 반공이데올로기 분쇄, 조국통일촉진투쟁 등을 중심이슈화), 구학련 사건 이후 대중성 확보라는 문제가 제기되면 그간 선도적 반미투쟁을 자기반성, 학생회 중심의 대중노선을 강조(‘직선제 개헌 쟁취’로 전술 슬로건 변화) => 직선제의 근거로 제시했던 것은 (1)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대중적 투쟁,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현실대안, (2) 직선제는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식민지재편 음모에 파열구 가능(식민지=개량의 물적 토대가 부재하다는 인식)

- 제헌의회론의 등장 : 1) 「혁명운동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혹은 「무엇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 막는가」) 문건에서 신식민지론을 통해 지배집단이 국내 예속 독점자본으로 변화(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자본주의 물적 토대 인정, 정치권력의 대외적 자율성), 2) 혁명적 정세와 혁명의 사회심리적 조건 고양을 주장, 3) 1905년 러시아혁명 당시 제기된 제헌의회 소집을 ‘전술적 슬로건’으로 도입해 정치의식과 권력의지를 고양시켜야 함을 강조(‘계획으로서 전술론’), 4) 삼정립(三定立)론을 통해 반동부르주아지-자유주의 부르주아(야당, 중소자본가)-민중을 주장, 야당에 대한 ‘주격타격방향’을 설정, 이들에 대한 무력화 주장 => 혁명의 좌절과 승리 여부는 자유부르주아지(LB)의 헤게모니를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로 대체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림.

 

 


제2단계 논쟁의 쟁점 : 자민투와 민민투 간의 논쟁
* 사회구성체와 사회성격 :
- 한국 사회를 자본주의로 이해한다는 문제는 특정 사회구성체를 분석하는 구체적 이론적 태도의 선택, 운동에서 변혁주체가 되어야 하는 계급을 부각시키는 문제를 포괄함. 더 나아가 특정 사회를 사회구성체로 파악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의 민족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문제임.


- 사회성격 논쟁은 자본주의화 이후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변혁주체의 확산, 주체 인식의 심화)의 반영물. 이른바 객관적으로 존재했지만 상실했던 이론적 전통의 복원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 및 이를 바탕으로 한 모순 간의 성격, 위치, 상호연관성을 밝히고 이를 해결하려는 민주변혁의 성격, 방향을 정초하려는 집단적 시도


- 2단계 논쟁은 운동의 과제(민주변혁의 성격)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룸. 결국 사회구성체(혹은 토대)의 성격과 운동의 과제 간의 매개 고리로서 ‘한국 국가권력의 성격’이 무엇이고 이를 어떤 대안적 국가로 대체할 것인가로 집약


- 1단계 논쟁(1985년 창비 논쟁)이 종속성을 신식민지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했다면, 2단계 논쟁에서는 경제이외에 정치, 군사적 종속의 총체적 성격에 대한 의문이 제기, 또한 사회분석에서 반국적 차원이 아닌, 한반도적 차원의 시각의 필요성이 대두 그리고 식민지성과 반봉건성을 통한 자본주의 발전의 질적 제한(NL론) 등이 문제 제기됨.


- 분단 문제 역시나 현실 속에서 두 개의 국민국가/독자적인 사회구성체 간의 관계의 문제인데, 두 개의 사회구성체를 한데 묶어서 이론화하며 운동과제를 설정하는 것은 모순적(운동세력과 민족국가 간의 동맹?) => 분단은 제3세계 민족문제가 동아시아/한반도 차원에서 ‘하나의 독특한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민족/계급모순과 동질의 것은 아님

 

* 민주변혁에서 쟁점 :
- NL론은 제국주의가 한국 사회를 국내 자본축적과 무관하게 지배하고 있으며, 식민지반봉건(식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와 달리 제국주의가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모든 면을 지배한다고 주장함


- 사회성격에서 중요한 것은 정권의 소유관계이며, 한국의 경우 국가주권을 제국주의와 국내매판세력이 장악(대리정권), 제국주의-대리정권-민중을 “지주-마름-소작관계”로 비유
=> 독자적인 국민국가의 실체를 부정하는 결론(“매판군사파쇼독재체제”)


- 한국경제는 농촌에 온존한 지주-소작관계, 매판자본의 팽창으로 성장, 비정상적이고 전근대적 자본축적, 전근대적 족벌체제 등으로 구성된 파행적, 기형적인 성격


- 즉 탈식민이 아닌, 식민지배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점을 강조함(식민지 본질론) => 이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동력으로 노급, 농민, 청학, 지식인, 애국적 민족자본가, 애국적 군인, 양심적 종교인 등 전 민족의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한 자주성을 지닌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닌다고 주장


- 민주변혁의 목표는 민족자주정권의 수립이며, 이를 위한 전술적 과제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조국통일 투쟁 3대 투쟁의 공명(共鳴)을 주창함.


* 이에 반해 (앞서 소개한) CA론은 구식민지/신식민지 간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특히 「성격과 임무」에서 한국 사회성격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칭하고, 그 특징으로 1) 신식국독자는 산업자본주의 이후 이어지는 국독자의 단계가 아닌, 세계자본주의 일반적 위기하에서 구체화된 독점자본주의의 특성(식민주의의 새로운 형태로서 신제국주의/신식민주의를 국독자의 세계체제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 위기론)
2) 한국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낮은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발전

3) 한국 자본주의 발전은 축적이 심화될수록 예속이 심화되며, 그 이유는 낮은 생산력 때문임
4) 낮은 생산력으로 인해 한국 민주변혁은 사회주의 혹은 PDR이 아닌, (자본주의 토대를 침식하지 않는 전면적 계투의 발전을 제약하는 물질/정치적 조건의 미비로부터 해방되는) 부르주아혁명인 NDR (NDR=>PRR 연속2단계 변혁론)

 

 

 

 

 

 

6. 80년대 민주변혁에 대한 약평
- 80년대 민주변혁 논쟁은 미해결의 근대국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복원을 넘어서는 문제설정을 취함. 85년 제기된 삼민의 경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민중이 지배하는 민중 민주주의 건설이라는 구상을 전면에 제시하며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지도력 확보를 강조. 즉 형식적 의회주의 도입만으로 민주화가 달성될 수 없으며 소시민적 민주화를 넘어서는 주체의 설정과 구상을 내포하는 것.


- 즉 종속적 자본주의 발전이 진행되던 민족국가가 선진 자본주의국가와 구별되는 ‘고유한 민주주의의 문제’가 대두된 것. 당시 민주변혁에서 제기된 민주주의는 사구체 발전단계속에서 구체적 정세에 따른 변혁과제를 포함하는 동맹세력을 규합해내는 프레임.

- 러시아 혁명의 모델의 경우, 취약한 부르주아지, 억압적 통치체제와 정치적 민주주의의미실현, 개량적 운동의 공간 부재 등은 표면적으로 80년대 한국과 유사하다는 효과를 주었을 수 있음. 즉 정부교체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혁명을 요구하는 흐름을 지식인들에게 갖게 했고 이것이 정통 맑스주의와 친화성으로 귀결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 그러나 한국은 불구적이고 진입장벽이 존재했지만 40년에 걸쳐 민주주의 제도가 외부로부터 이식, 이 속에서 대중들은 정치적으로 훈련되었음. 즉 대의제가 불충분하지만 그 자체를 파괴하고 대안을 만들도록 설득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음. 단적인 사례로 노동계급의 독자성/헤게모니에 민주주의 투쟁이 귀속되거나, 타른 계급과 연대보다 타격/폭로를 통한 구별 짓기에 집중함. 민주변혁에서 민주주의는 변혁의 ‘수단’이상으로 진지하게 사유되지 못한 면이 적지 않음.


- 더불어 민주변혁을 둘러싼 간 논쟁은 실천적 검증, 사상이론적 수준이 높지 않은 조건 속에서 ‘논리적 완결성에 대한 욕구’가 높았던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됨. 사상이란 면에서 기반이 취약한 사상에서 특정 사상으로 전환이 실천의 요구 속에서 급박하게 이뤄졌으며, 입장이 다른 사상 간의 논쟁 역시 zero-sum적 방식으로 전개되어 ‘차이’ 등을 전혀 인정하지 않음(노급의 독자성이 선언, 다른 계급에 대한 폭로 등으로 실현 가능, 상대 조직의 파괴/장악을 위한 논쟁 혹은 자신의 정당성을 현실에서 찾기보다 ‘이론’의 권위에서 찾으려는 식민주의/지식권력도 일부 발견)


- 역설적으로 80년 광주, 전두환 정부의 정당성 부재 등 ‘현실’이 70년대보다 근본적인 사회/국가 변화를 요청했고 집단적으로 현장진입과 새로운 주체 형성을 위해 ‘과학’으로서 이념을 도입했으나, 정작 ‘정치적 노동운동’이 진행은 현실/대중과 거리가 존재하는 모순이 지속적으로 나타남. 이는 현실에 대한 편향적인 이해, 즉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던 데서(혹은 주어진 현실과 자신들의 주관적 의지를 혼동) 기인한 것은 아닌지(현실의 중층성/복합성의 간과, 노동자 내부에서 반지성주의가 현재까지 지속되는 맹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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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3강 :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이주영(서울대학교)

 

 

배 경

 모든 제도와 사상이 그러하듯 미국의 민주주의 역시 여러 모습들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계속 변화해왔다. (공화주의 vs.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 국가주의 vs. 개인주의 / 엘리트 vs. 대중)

1.     기본적으로 시민권이 확대되어 오는 과정 - 젠더와 인종 문제가 지속적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여성들은 20세기 초에 투표권을 얻었고 흑인들은 1960년대가 되어서야 투표권을 얻었다.

2.     한편, 미국 민주주의는 공공의 선을 목표로 공동체와 자치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사이에서 항상 갈등이 존재해왔다.

-       이러한 두 흐름의 긴장과 갈등은 건국 초기 제퍼슨의 공화주의와 해밀턴의 연방주의 사이에서 이미 드러났고 프랑스 정치가이자 정치학자였던 알렉시스 토크빌이 1830년대 미국을 관찰하고 얻은 결론이기도 함

-       냉전 초기에 공산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집단적이고 국가 중심적 가치들이 강조될 때에도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3.     또 하나의 중요한 갈등의 축은 엘리트들과 대중들 사이에 존재해왔다.

-       미국 독립전쟁 중에 영국과 대결하는데 있어 엘리트들은 대중들의 힘을 이용하면서도 대중들의 힘을 두려워했고

-       개인들이 적극적으로 공공선을 위해 희생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했던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이 제대로 미국 건국 초기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개인과 개별 주에 대해 중앙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한 미국 헌법을 만들게 된다.

-       듀이-리프만 논쟁에서도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가 민주주의 안에서 대중들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4.     19세기 후반 이후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면서 민주주의에 관한 다양한 논쟁이 나타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경제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됨 à Political Economy의 흐름 변화

-       자유방임주의 of the late 19th century vs. Regulatory State of the Progressive Era

-       Government’s reduced control of economy and the rise of individualism in the 1920s vs. Welfare State in the New Deal

5.     결국 미국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개념들 및 실천들 사이의 갈등의 과정이었고 생활 속의 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다양한 실험 과정에서 나타난 민주주의 형태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찾고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

  

 

     Democracy as a way of life

1. 20세기 전반기에 나타난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으로 민주주의를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일상에서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일들에 직접,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하면서 공동체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적인 의사 결정에 반영하는 과정 자체라고 보는 관점과 그에 바탕을 둔 실천

2. Key words - 작은 단위의 공동체, 참여, 토론, 의결조율, 타협, "과정"

3. 이론가 - John Dewey, Sidney Hook

 

기원 및 역사적 맥락

1.     식민지 시기에 시작되고 19세기 초반 잭슨 민주주의 시기에 토크빌이 목격한 타운 자치에서의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해본 경험 à 미국 건국 이념이자 미국 초기 발전을 이끌었던 공화주의

2.     19세기 후반 혁신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 à 독점 자본주의에 의한 민주주의 쇠퇴의 우려에 대한 반응

-       특히 그 시초 및 핵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Settlement Houses Movement (사회 복지관 운동) – 이민자들을 미국화(Americanization)하려는 시도 àEmbraced democracy as a social ideal and practiced on the grassroots level (in their own communities)

-       John Dewey의 민주주의론

-       우드로 윌슨의 “New Freedom” (새로운 자유) – 독점이 민주 정치를 방해하고 자치에 필요한 인격적 성질들을 침식한다고 주장 à 솔루션: 독점의 해체, 즉 경제를 탈중앙화해서 지역의 정치 단위들에 의한 민주적 통제하에 있도록 함

-       시오도어 루즈벨트의 “New Nationalism” (신국가주의) – 독점의 규제 à 국가 권력을 강화하여 대기업 규제를 통해 문제 해결하려 함 (공화주의 정치 사상과 결별)

3.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전체주의의 확장에 대한 위기 의식 à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à Council for Democracy

4.     냉전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 개혁 (Civil Rights Movement) 국제적으로는 민주주의 전파 시도

 

이론의 이해

1.     John Dewey – 공동체와 교육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2.     Sidney Hook – 생활 속에서의 민주주의

 

적용 사례들

1.     Council for Democracy (2차 대전 참전 이전의 국제주의 단체)

2.     미국 교육 사절단 (American Education Mission, 1950년대)

3.     Postwar Era Progressive Educators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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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2강 :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한상구(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우리의 민주주의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답1. 이식론 : 서양에서 들어왔지. 우리한테 언제 민주주의가 있었어. 해방이후부터 민주주의!

==> 대체로 그렇게들 느끼고들 있는데, 이게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해방후 미군정이 남산 서울방송국에서 내보낸 민주주의 교양방송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식의 편벽한 생각과 별로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이 문제가 될 걸? 아닌게 아니라 결국 -->

cf) 뉴라이트의 주장 =? 미군정, 아니면 이승만이 우리나라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들여왔다. 보통사람들은 그냥 주워 먹은거다!

 

답2. 부회론(경강부회한다는 것) : 왜, 신라시대 화백제도 있잖아! 이것은 곧바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합리화하는, 실로 견강부회의 주장으로 흘러간다. 화백제도가 민주주의면 나도 장동건이다!

==> 부회론이 좀 어리숙하고 많이 불순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자체 내부에서 뭔가 민주주의에 관한 것을 찾아보는 것을 아주 웃기다고만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역사학자들은 뭐하우? 좀 잘 찾아서 알려주지. 그런 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는 게 없잖나!

 

답3. 운동치환론 : 기원은 모르겠고, 면면한 반봉건, 반식민, 반독재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는 고심참담하게 획득된 거야.

==> 이거야 말로 반박할 수 없게 맞는 말이긴 한데, 이렇게만 얘기하다 보면 그 투쟁가, 운동가만 중요하게 보이고, 보통사람들, 대중들, 인민들이 잘 들어나지를 않는 문제가 좀 껄끄러운데? 보통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획득하고 완성해가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일까?

 

 

 

◆ 우리의 민주주의(국민<시민·인간>주권과 반전제 정치제도의 확립) 탐색을 유도해주는 빵부스러기 증거들

 

1. 해방 이후 시기의 큼직한 빵쪼가리들

- 급속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의 수립과 같은 것은 좀 차치해두고...

- 왕정복고운동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이거 흔지 않은 일일 수 있다.

- 해방 5년, 지주와 자본가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과 지배력은 실로 형편없었던 것. 그들은 참 많이 눈치보고 다녔다. 좌우 운동가들과 정치가들을! 그런데 기실은 보통사람들이 무서웠던 것이고, 아니면... 주권재민, 국민주권에 대한 투항적 동의!

cf) 이게 해방이후 남한사회, 대한민국에서 근 40년을 넘어서야 지배력을 명실이 상부하게 실현하게 되는 것인데....

-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동시 실현은 하나의 사회적 합의였었다.

- 1948년 제헌의회 선거의 무리없는(?!) 실시, 무소속의 절반 진출, 보통·비밀·직접·평등선거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나 몰이해는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여성참정권에 대한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사실!! 이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로 그 이유를 우리는 찾아보아야 한다.

- 1952년의 지방자치 실시. 그것도 전쟁통에. 이건 이승만의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전격적으로 실현된 것이지만, 그러한 읍·면단위 수준에서까지 대의기구가 아무런 무리없이 수립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제도에 대한 이전 시기의 어떤 경험축적과 사회적 동의가 없다면 결코 작동될 수 있는 게 아니다.

- 그리고 그렇게 참혹한 전쟁이 끝난지 7년만에 대통령을 쫓아내는 4.19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 거대한 민주주의 쟁취투쟁을 누가 지휘했는가? 누가 조직했는가? 어떤 정치조직이 이들 거대 투쟁을 지도했는가? 실로 아무도 없었다. 무지렁이 사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와 가치실현체계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는가? 세대를 이어온 어떤 사회·역사적 전사(前史)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2. 망국 전에 흩어져 있는 좀 작지만 중요한 빵부스러기들

- 사람들이 자꾸 모인다! 군중의 출현! 군중은 근대의 상징이었다.

- 이리저리 이런저런 과정의 민회(民會) 설립시도. 그 형식은 지금 보기에도 모던하다. 물론 한계는 있는 것이지만.

- 한번 온나라가 크게 움직인 적도 있어요. 국채보상운동! 필부필부가 양반, 관리와 함께 같은 포인트로 신문지상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것도 20만명이!! 그렇게 자기이름이 찍힌 신문을 쥐고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 ...

==> 이러한 꼭 완전히 새로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청 새로운 경험들은 그 뒤에 어디로 갔을까. 일본얘들에게 완전히 발렸을까? 참 3.1운동이 있잖나?

cf)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동아일보 창간사 1920. 4. 1.

cf) 애비를 애비라 부르지 못하는 그들! ‘대정 데모크라시’라는 일본 정치사 용어가 가지고 있는 슬픈 이야기 하나.

 

3. 훨씬 전시기부터 적어도 우리나라에 내려 깔려 있는 빵냄새들

- 위민사상, 민본사상! 어허? 견강으로 갈까요?

- 우환의식, 지식과 지식인류의 독특한 위상. 지식인과 민 사이에 이론적으로는 정치사회적 위계가 없다는 것이 유학사상의 특징.

- 공적 행위를 보편성의 실현으로 간주하는 사고. 그렇지 않으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부스러기를 쫓아가면서 주위를 살펴보다가 찾아다! 빵덩어리!!

==> 일제시기의 주민들!!!

또 cf 하나. 역사적 경험축적을 살펴볼 때, 염두에 두면 좋은 것, 시간의 길이.

개항~망국 34년 / 일제시기 35년 / 해방~서울의 봄 35년

 

 

 

 

 

식민지 시기, 지역주민의 민주주의 실천경험

 

1.

  일제시기 하면 우리는 상해임시정부와 삼일운동을 제일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또 민립대학설립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조금 더 나아가서는, 암태도소작쟁의, 원산총파업, 적색농민조합운동.... 조선공산당, 신간회 등등이 뒤를 잇는다. 일제시기는 국내외 각종 항일운동, 사회운동이 실로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기를 이와 같이 민족․사회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이해는 이들 운동들은 크게 한번 일어났었다더라는 식의 뭉뚱그려진 인상, 아니면, 각각 운동을 조직하고 주도했던 인물들, 굳은 신념으로 형형히 빛나는 눈빛을 가진 엄숙한 얼굴의 지사, 운동가, 주의자 또는 그들의 조직만을 떠올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제시기에 대한 인상이나 인식에서는 그만 사그라져버리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운동들이 조직되고 분출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본 바탕, 즉 당시 보통의 조선 사람들(이하 일단 조선의 ‘민<民>’이라고 하자) 속에서 광범위하고 심도있게 확산되고 축적되고 있었던 ‘민족적 자의식(민족의식)’과 ‘근대에의 감수성(근대적 가치에 대한 전향적 수용)’의 구체적 내용과 수준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민족적 자의식과 근대에의 감수성은 어떤 선각자, 민족주의 지사, 사회운동가들이 이끌어 계몽하고 심어준 것도 많다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 선각자, 운동가들의 역량과 의도를 뛰어넘는 수준의 주체성과 감수성을 보통의 일반 조선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 또한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민’들의 민족적 자의식과 사회적 각성에 따른 생각과 행동들은 당시 전개되었던 전국차원 또는 주류적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곧바로, 일관하여 수렴되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꼭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의 형태로 표출될 필요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동시에 민족․사회 운동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즉 즉물적 이해관계에 따른 조선인차별의 시정요구나 노골적인 자본주의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그러한 수준에서 맴도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2.

  일제는 엄청난 자부심과 우월감으로 조선의 통치를 시작했다. 봉건적 누습과 악폐의 도탄에 빠져있는 조선을 그들이 구원하여 ‘새로운 정치’ 즉 ‘신정(新政)’을 배풀어 준다는 것이다. 실로 근대적(!?) 법과 제도, 시설, 조직을 마치 융단폭격처럼 조선 사회에 투하하였다. 제국주의의 독이빨임은 분명하였으나 절대적 그리고 상대적으로 봉건 조선왕조의 그것보다는 근대적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무도(無道)한 착취와 수탈은 유도(有道)한 그것으로 바뀌어갔다. 물론 그 ‘유도’는 식민과 근대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폭력성을 분식하는 근본적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이에 대해 조선의 민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느냐일 것이다. 어쨌든 근대적 겉모습의 ‘신정’에 압도되어 버렸을까? 구래의 봉건적 악폐가 사라졌으므로 일제의 통치를 겉으로야 아니더라도 내심으로는 반기고 있었을까? 아니면 거꾸로 다만 인종적 감정에서 이민족의 통치 전반을 무조건으로 거부하거나 반발하였을까? 학교에 나오라고 하여도 나가지 않고 길을 뚫는다 하여도 모두 싫다고 하였을까? 극단적인 예로 조선인의 풍속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었던 묘지령의 실시가 3.1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였을까?

 

  적어도 3.1운동 이후에는 근대적인 것, 근대적인 법과 제도, 시설, 기구 등등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은 어떤 집단이나 계층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유림조차도 여자야학을 세우고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에 나서고 있는 것은 허다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명 생각과 사고의 시계추가 바뀐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일제의 통치‘만’를 공개적이고 명시적으로 찬성하고 인정하는 어떤 형태의 언사도 사회적 백안시의 대상이 된 것은 어쩌면 1910년대보다 더 강화된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일제의 통치에 맞선 조선 ‘민’의 지향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근대적 법과 제도를 실로 근대답게 실현하는 것, 그것도 ‘민’ 스스로 주체적으로 실현하는 것 그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조선 ‘민’의 지향은 근본적으로 일제의 통치와 배치된다. 일제는 근대의 체현자, 선도자로서 조선의 ‘민’으로부터 권력과 권위를 동시에 취하려 하였지만, 근대의 진실한 구현자로서의 제국주의 식민권력이라는 것은 분명 형용모순인 것이다. 조선의 ‘민’이 그것을 몽롱한 수준으로 보았다거나 무지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선의 ‘민’이 봉건사회 속에서부터도 지속적으로 축적해온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역량을 지극히 폄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식민권력은 폭력에 기초한 권력은 있었지만 동의와 참여가 있어야만 가능한 권위를 가질 수는 없었다.

 

3.

  일제의 각종 제도와 시설은 조선 ‘민’의 생활 전체를 엄습했다. 동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이러한 엄습은 정치적 사회적 지향을 갖고 있는 조선 ‘민’의 거부와 저항을 부른다. ‘민’ 스스로의 거부와 저항은 조직력과 운동력을 갖춘 형태로 들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민’의 거부와 저항은 ‘민’의 생활공간 모든 단위와 부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민’은 생활공간 속에서는 민족자체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동심원적인 각종 지역단위 즉, 리-면-군-군연합-도의 행정적 사회적 역사적 공간의 ‘지역주민’으로 현상한다. 각급의 지역주민은 지역을 단위로 시행되는 일제의 제도와 시설, 조직에 대하여 일상적이고 총체적으로 대응하여야 하였다. 삼일운동 이후 상당기간 각급의 지역에서 일제 식민권력이나 지역주민에게나 각자의 권위와 권리를 도모하고 상대방에 관철하려고 하는 각양각색의 밀고 당기기, 실랑이, 위협과 양보, 과시와 차선적 수용이 교차하는 만화경적 광경이 연출되었다.

 

  관청이 제방관리를 잘못해서 커다란 수재가 일어났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주민들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주민들이 반대하는 수리조합을 만들어놓고서는 엄청난 수세를 거두어들여서 도저히 영농이 어려워진다면? 한참 바쁜 모내기철에 도의 지시라고 도로부역을 나오라고 한다면? 생면부지의 타지역 사람을 면장으로 갑자기 앉힌다면? 군수가 돈을 받아먹고 면장이나 면서기를 임명한다면? 면장이나 면이 지역의 공공사업에 솔선하여 나서지 않는다면? 공립학교를 세워주지 않으니까 강습소나 야학을 열어 교육하려 하는데 이를 허가해주지 않거나 폐쇄명령을 내린다면? 우리 군이나 도에 고등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은데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면? 세금을 불평등하게 부과한다면? 우체국의 배달이 계속 지체된다면? 곡물검사소 등 각종 기관들이 합리적인 지역배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일본인들이 몰려사는 시가 쪽은 도로포장도 잘되어 있고, 수도도 들어오는데 조선인 쪽 시가지는 몇 년이 가도 개선이 없다면?

 

  지역주민들은 이러한 식민통치, 식민행정의 모든 부면에서 발생하는 각종의 문제들, 현재의 우리의 눈으로 보면 민원사항 등속으로 일괄하여 쉽게 보아넘기기 쉬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실로 눈물겨운 분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식민행정의 모든 문제는 모두 조선인의 무권리 상태, 식민적 상태의 반영이며 결과인 것으로 지역주민에게 파악된다. 무권리 상태는 관권정치, 전제정치의 귀결이다. 식민권력의 ‘신정’은 결국 관권정치이고 전제정치인 것이다. 행정에 대한 민원은 이렇게 식민통치의 본질 속으로 신속히 파고들어간다.

 

  일제가 이러한 무권리 상태에 대한 반발을 완화하기 위하여 면협의원 등 사이비 대의기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무마하려 하였지만 지역주민들은 상당기간 이 기구를 무력화시키고 스스로 의사의 집결과 과시, 조직의 제반 노력을 광범위하게 시도하였다.

 

4.

  지역주민들은 의사와 요구는 지역의 특정한 유력자들을 경유하여 식민행정당국에 전달되는 방식만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각급 단위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 수렴, 조직하는 일련의 과정을 갖추려고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직접 참여 및 적절한 대표성 확보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의 진행은 본질적으로는 민의(民意), 민주(民主)의 실현, 체험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주민들의 이러한 집단적 조직적 행동은 3.1운동 직후부터 30년대 중반까지 전국 각지에서 빈발하였던 리민대회 면민대회 군민대회 등 각급 행정단위의 ‘주민대회’에서 명료하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각급의 지역에는 주민들 속에서 그들의 동의를 획득하여 그들의 의사와 행동을 대변하고 대표하게 된 사람들 즉 ‘유지(有志)’들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특정한 계층이나 우월한 신분, 일정한 재력을 갖춘 자들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기본적으로 이들은 주민 위에 군림하고 통제하는 능력과 자원을 가진 ‘유력자(local influential)’로서가 아니라 ‘有志=자원자(volunteer)’로서 주민들 속에서 탄생하고 ‘형성(making)’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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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1강 : 지금 왜 민주주의인가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왜, 지금 민주주의를 다시 고민해야 하는 걸까? 20131024() 저녁 7시 역사문제연구소 민주주의 연속 강좌 제1왜 민주주의인가?’라는 강연(김동춘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성공회대 교수)은 이러한 궁금증에 답변하기 위해 마련된 강좌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국정원 댓글 파동, 국가기관, 여당과 관련사회단체의 유착 (십알단과 드위터 교환), 국정원 국방부, 보훈처 등 국가기구와 검찰의 정치구도화, 표적수사, 사법부의 권력편향 판결, 국가기구의 국민 불법 사찰( 총리실, 기무사), 공안기구의 대통령 직속기구화(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 등 일일이 거론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각종 사건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폭주기관차처럼 급속도로 확대되는 걸까?

 

 

새로운 파시즘, 전도된 전체주의의 경향?

 

  이명박 정권 이후 파시즘적인 현상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과거와 냉전반공주의처럼 위기에 몰린 정권이 국가기관을 동원해서 진행되는 점이 있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나 정치세력이 세를 얻고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에서는 과거와 차별적이다. 과거의 경우 안보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동원한 우익 조직이 위로부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선진 자본주의의의 다른 나라들처럼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무기력, 심각한 경제위기와 양극화 등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우선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으며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 활성화된 현재 한국에서의 파시즘적 경향은 우선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붕괴 이후 독일과 유사한 점이 있다. 특히 아렌트가 말했듯이 이것은 부르주와 문화, 즉 개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즉 그녀가 말했듯이 극히 경쟁적이고 성취주의 문화가 공공영역에 대한 무관심을 낳았고, 그것이 파시즘의 온상이 되었다는 지적이 자본주의 문화, 개인주의가 훨씬 사회 내 깊이 착근해 있는 현재 시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Arendt, p 307)

 

  이 점에서 한국의 박근혜 정부의 유사 공안통치, 극우반공주의의 재연은 유럽에서의 인종주의, 특히 최근 프랑스에서의 극우정치세력의 지방정치에서 압승한 것과 유사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다. 교육받는 중산층보다 훨씬 더 심한 권위주의 퍼스넬리티(authoritarian personality)를 가진 몰락한 자영업자, 하루하루를 약육강식의 시장에서 전쟁을 겪듯이 살아가야하는 빈민과 하층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는 무관심하지만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을 희구한다. 그들은 강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폭력을 찬양한다. 일베에 환호하는 청년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사회에서 실패자(loser)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 위에서 파시즘은 독버섯처럼 피어난다. 인간 심성의 가장 악마적 본능, 지역차별주의, 남성중심주의가 매일 드러나는 국정원 댓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이 헌법에 명시된 진정한민주공화국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삼권분립, 대의제, 주기적인 선거, 정당정치가 형식상 유지된다고 해서 그러한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행정권이 입법권과 사법권에 깊숙이 개입하고, 행정부 위에 대통령과 공안기관이 국가적 의제나 정치적 논의를 좌우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행정권과 선출되지 않은 공안기관이 국민의 생명권,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러한 체제는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정보기관이나 공안검찰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을 표적으로 지목하여 편파적으로 수사하고, 경찰이 정치적 반대세력을 으로 몰아서 진압한다면, 이러한 권력의 행사는 과연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경제적 민주주의의 결여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부유한 자들이 법과 법의 집행을 농단하고 가난한 자들만이 법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 기업권력의 강화와 노동자, 소비자, 주주의 영향력 상실은 법인체의 주권 탈취로 이어지고, 시민은 단순한 소비자로 호명되고 있다. 하루하루를 전쟁터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부대끼는 하층 노동자들, 중산층에게 정치는 남의 일이 되고, 참여의 의지는 상실되고 있다.

 

  대중,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적 지향과 감수성의 변화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문화적 요인이다. 기존의 반독재정치계급정치로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정치성()? 대중소비사회의 출현, 지식정보사회의 출현, 탈산업사회의 출현, 포스트 모던적인 문화의 등장 등.

 

 

대안을 위한 고민

 

  이 위기를 극복할 대안은 무엇일까? 한국적 민주주의의 길을 고민했던 독립운동가 조소앙은 20세기 등장한 다양한 민주주의의 역사적 실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두 특정 계급의 독재다. 프랑스나 미국은 군주의 독재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 백여 년간 시험해 본 결과 식지파(識智派), 유산자의 독재에 머물러 의회제도가 전 민중을 대변한다는 전 민중을 물과 불 가운데 빠트렸다.... 러시아는 경제민주화를 균등하게 추구했으나 교육민주화도 정치민주화도 불가능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민주화는 형해화 화석화되거나 교육과 경제의 민주화는 꿈에도 볼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조소앙이 생각한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조소앙이 주도해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1941)은 한국 민주주의가 추구해야할 이상적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민족이 지킬 최고의 공리는 자유가 아닌 사회의 각 계급의 지력과 권력과 부의 향유를 균등하게 하는 것

 

  70년 전에 제시한 이 명제가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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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5강 : 변혁운동 속의 민주주의

1121() 19:00~21:00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주화운동 속에서 구호 차원에서는

'민주주의''독재'의 반대말이었다.

그런 한에서는 운동 진영에서 '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회변혁, 즉 신 사회 건설이라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민주주의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1970~80년대 변혁을 꿈꾼 이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 유산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강연자 대표논저

 

여공 1970, 그녀들의 역사(이매진, 2006)

876월 항쟁(책세상, 2009)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기억,사건 그리고 정치(현실문화연구, 2011)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1980년대 대학의 하위문화와 대중정치(이매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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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6강 :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색

11월 28(목) 19:00~21:00 이승원 (서강대학교)

 

 

 

 

21세기 한국사회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는가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과잉 속에 빠져있다.

민주주의는 정치체나 거대가치수준에서,

수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일상 속 '설득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최근 회자되는 '민주적 현상'들과

그 속에서 갈등하는 다양한 '민주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왜 여전히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그 갈망은 어떤 행동을 필요로 하는지를 찾아본다.

 

 


 

 

 


강연자 대표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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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4강 : 인민민주주의란 무엇인가

1115() 19:00~21:00 노경덕(광주과학기술원)

 

 

코민테른에서 '인민전선 전술'이 채택된 1930년대 중반은

소련에서 스탈린 체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애국주의'가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인민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했으며

소련이 전후질서를 구상하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북한에서도 건국의 기본노선으로 채택된

인민민주주의의 역사적 기능과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강연자 대표논저

 

  • 「냉전사와 소련연구」, 『역사비평』 101, 2012.
  • 「중·러 관계의 역사적 전개」, 『중·러 관계와 한반도』 (한울, 2012)
  • 「스탈린 시대 소련의 대외관계, 1926-1953: 해석사」, 『슬라브학보』 27(1), 2012.
  • 「냉전연구의 새로운 시각과 관점」, 『통일과 평화』 35, 2011.
  • 「스탈린 시대 소련공산당과 학계 관계 재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의 사례,1927-1947」, 『서양사론』 110(3), 2011.
  • "Rethinking the Varga Controversy, 1941-1953," Europe-Asia Studies 63, no. 5 (July, 2011).
  • 「세계경제대공황과 스딸린주의 경제학 담론, 1929~1936: 바르가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115 (3), 2010.
  • 「알렉세이 가스쩨프와 소비에트 테일러주의, 1920-1929: 이론적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서양사연구』 27,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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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강 :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117() 19:00~21:00 이주영(서울대학교)

     

    미국은 해방 후 한국에 민주주의를 전파했지만

    미국 내에서의 민주주의 개념 역시 단일하거나 안정적이지 않고

    역사적으로 여러 논의 속에서 다양하게 변해왔다.

    그 중에서 특히 20세기 전반기에 미국 내에서 새롭게 등장했던 민주주의 개념이

    '생활방식(way of life)으로서의 민주주의'였다.

    이 새로운 개념의 민주주의가

    유럽의 전체주의 확산에 대응하여 등장하는 과정과 그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나아가 한국에 수출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강연자 대표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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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2강 :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1031() 19:00~21:00 한상구 (역사문제연구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시작을 해방 이후로 보는 경우가 많다.

    황제가 주권자인 나라에서 바로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제도면에서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은 식민지에서도 주민대회 등을 통해

    집단적 의사를 형성하고 표명하는 실천은 존재했다.

    해방후 전국 각지에서 형성된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가능케 한

    민주주의 실천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강연자 대표논저

     

    1926~28년 신간회의 민족협동전선론(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1993)

    일제시기 지역주민운동 연구(서울대 국사학과 박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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