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항쟁은 올해 40주년을 맞았지만 항쟁 과정에서의 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관련자 상호 간의 반목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북항쟁이 항쟁으로써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기억과 기념에도 어려움이 따르는 실정입니다. 1980년 4월 사북에서의 폭력 문제를 적절하게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하여 교착 상태를 해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연구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사북항쟁 연구자, 사북지역 연구자와 기념을 고민하는 예술가가 함께 진솔한 논의를 하고자 좌담회를 기획했습니다. 사북항쟁 내부의 폭력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도 사북항쟁을 한국현대사에서 적절하게 위치짓고 항쟁 고유의 기억과 기념 방법을 강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인권위원회는 연구소 내의 다양성을 확보하고,구성원 간의 ‘예의’를 고민하며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인권위원회가 주관하는 모든 프로그램은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20년의 인권교육은 내외의 사정으로 인해 진행이 많이 늦었습니다.그런 만큼 참석을 권하고자 합니다.강사의 한 분이신 김도현 선생님의[장애학의 도전]이란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장애학의 시좌'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그것은 인간의 위계에서 제일 후미에 위치한 이들의 자리에서,혹은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의 자리에서 이 사회의 풍경을 본다는 말일 것입니다. ...후미와 변방이라는 자리는,단지 동일한 대상의 다른 면을 보게 하는 것을 넘어,선두와 중심에서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번 인권교육은 우리가 미처 보려 하지 않은 풍경을 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연구소의 개개인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다양성이 연구소 내에서,사회 내에서'실제로'구현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계속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요?그래야 구성원 간의'예의'에 고민거리가 생길 것입니다.
인권위원회의 역할은,다른 자리에서 보이는 다양한 풍경들의 존재를 연구소 구성원들이 느끼게 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연구소라는 공동체 내의 관계가, '어제보다는 더 예의있어질수록'진지한 고민에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래 교육일정을 참고해 주십시오. 1강은 연구소에서 현장과ZOOM을 병행할 것입니다. 2강은 노들장애인야학에서ZOOM으로 송출하려고 합니다.교육 때 많은 분들의'얼굴'을 뵐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을 맞아5·18을 한국 민주주의의 기념만이 아니라, 1970년대의 에필로그이자1980년대의 프롤로그로서 바라보는 학술행사를 마련하였습니다. 5·18을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라는 위상을 넘어1970년대에 형성되고 심화된 역사적 모순 속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박정희 정권기의 불균등 발전전략은 다양한 사회적 격차를 발생시켰습니다. 5·18또한 축적된 격차가 정치적·사회적 갈등과 맞물리며 전개되었습니다.특히10·26사건부터 서울의 봄까지 상황은 박정희식 개발 드라이브가 직면한 한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5·18의 역사적 성격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197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다음으로5·18은 한국군과 군사주의,폭력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군부독재 체제 유지를 위해 사회를 유사 군대로 조직하고,각종 공안기구가 확대된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사회의 군사화는 국가의 사회통제 뿐 아니라, '국민'스스로 자위권을 활용하는데까지 나아갔습니다.무장한 시민봉기는 자위적 폭력이라는 점에서71년 광주 대단지, 79년 부마항쟁, 80년 사북 사건 등과 연동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마지막으로5·18은 한국의 민주주의,민주화 운동을 검토하는 데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민주-반민주 구도의 사회운동 속에서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해온 이른바'민주화세대'는 현재 한국사회의'민주화'담론을 주도하고 있습니다.이 담론에서5·18위상은 절대적입니다. 5·18검토는1970~80년대 정치·사회 운동을 연결하고 평가하는데 핵심입니다.
본 학술회의를 통해5·18을 광주만의 사건이 아닌 한국사회의 모순이 응축된 사건으로 바라보며,한국 현대사의 통시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하는데 일조하고자 합니다.
"일본인으로서 反일본적인 작업을 한다고 비판도 받고 외면도 받았습니다. 공공미술관은 천황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의 전쟁책임에 관한 그림에는 대관을 해주지 않고 상업 화랑은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피 해 전시회도 많이 제약을 받았지요. 그러나 작가로서 왜 그림을 그리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같은 숨겨진 역사에 대해 침묵할 수 없습니다."(토미야마 타에코)
올해 우리 나이로 백 살인 토미야마 타에코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린 일본인 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 도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한 달 동안 작업한 끝에 완성된 작품이 그녀의 대표작인 ‘쓰러진 사람들을 위한 기도-1980년 5월 광주’ 판화 연작입니다. 이 작품은 유럽 순회전시를 통해 전 세계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19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몰래 상영되어 광주항쟁의 참상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다큐멘터리 <자유광주>도 그녀의 작품입니다.
토미야마 타에코의 문제의식은 광주민주화운동과 한국문제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토미야마 타에코는 일본 미술가로는 드물게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문제의식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시도한 ‘트랜스내셔널’에 대한 비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일본이 전쟁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며, 평생에 걸쳐 전쟁에 대한 일본의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는 그림을 그렸고, 강제 연행된 조선인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주제로 작업해 왔습니다. 이 같은 작품 경향으로 인해 조국인 일본은 물론이고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한국에서도 그녀의 작품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95년 한국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한 이래 토미야마 타에코는 지금까지 주로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선택적’으로 호명되고 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하여 토미야마 타에코의 삶과 작품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를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녀의 실천적인 삶과 예술활동, 한국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와 광주민주화운동과의 관계를 2회에 걸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토미야마 타에코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그림을 그렸는지, 그리고 그녀의 트랜스내셔널한 문제의식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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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화가 토미야마 타에코의 발자취
<만주에서 제3세계로-토미야마 타에코의 저항미술>
발제 : 이나바(후지무라) 마이(광운대학교)
패널 : 서승(우석대학교)
진행 : 소현숙(한국학중앙연구원)
일시 : 2020년 10월 16일(금) 오후 6시 30분
장소 : 역사문제연구소 5층 관지헌
2회 화가 토미야마 타에코와 한국민주화운동
<쓰러진 자를 위한 기도-1980년 5월 광주>가 만들어지기까지
발제 : 서윤아(리츠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 줌으로 참여.
진행 : 이나바(후지무라) 마이(광운대학교)
일시 : 2020년 10월 30일(금) 오후 6시 30분
장소 : 역사문제연구소 5층 관지헌
[발제자 소개]
_이나바(후지무라) 마이(광운대학교 부교수)
국민대학교 미술학과 미술이론전공. 「‘정치의 계절’ 1950년대 일본의 사회참여미술에 관한 연구」(2017)로 박사학위 취득. 한일근현대미술 연구, 특히 1950년대 일본의 저항미술운동과 1980년대 한국민중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주요 논고로 「전쟁의 현실을 고발한 화가, 하마다 지메이 - <초년병애가> 시리즈를 중심으로」 ( 『일본학보』122, 2020) ; 「오월광주는 민중미술에서 어떻게 표현이 되었나?: 광주의 작가들이 전하는 것 」, 『황해문화』106(2020년 봄호) ; 「에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류인과 렘부르크」, 『인물미술사학』, 제14·15호(2018/2019) 등이 있다.
_서윤아(리츠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객원연구원)
오사카대학 문학연구과에서 『화가 토미야마 타에코의 미술/운동-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중심으로』(2020) 박사학위 취득. 토미야마 타에코를 중심으로 일본 전후의 예술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주요 논고로 「한국민주화연대운동과 문화활동 : 간사이 지역에서의 ‘광주연대’판화 순회전을 중심으로」, 『동시대사연구』제10호, 동시대사연구(2017) ; 「한국민주화운동을 그리다 : 광주항쟁과 화가들」, 『일본학보』제37호, 오사카대 문학연구과(2018) 등이 있다.
“내 이야기 해가지고 ‘어이구 그랬구나!’ ‘하이고 참 애뭇다(매먹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고 김순악 님이 마음의 병을 고백하면서 한 말)
“한 인물을 성스럽게 포장하거나 박제화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생생히 기록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박문칠 감독이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리 상을 수상하면서 밝힌 소감)
<보드랍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고 김순악 할머니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위안부’ 피해자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다큐는 기존의 ‘위안부’ 관련 재현과 달리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좀처럼 말하기 어려웠던, ‘소녀’와 ‘할머니’ 사이 누락되었던 해방 후의 ‘침묵의 삶’을 중심에 두고 전시 성폭력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다큐는 고인의 삶을 과장되게 묘사하거나 극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모순되고 충돌되는 상황도 감독 자신이 받은 느낌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순악의 증언을 현재 활동하고 있는 여성 활동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낭독하고 다큐 말미에 그들의 느낌과 감상을 듣는 인터뷰를 통해, 김순악의 이야기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로, ‘너’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현재의 우리와 ‘나’의 이야기로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큐는 고인의 삶이 강요당했던 ‘침묵의 시간’을 우리가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큐를 보고 <보드랍게>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신청 부탁드립니다.
안내글:2019년 홍콩 시민들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2015년 우산혁명 이후 일견 잠잠해졌던 것으로 보였던 시위가 더 큰 규모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홍콩 시위대는 범죄자를 중국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법안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동시에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요구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벌였습니다.
한편,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에 유행하면서 중국이 중국 바깥의 세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중국이 코로나19사태 초기에 보여준 대처는 감염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중국 정부는 바이러스 전파에 관해 정보를 통제하고 우한의 상황을SNS에 알린 언론인과 의료인들을 처벌하는 등 비민주적 통치 방식을 보여줬습니다.
코로나19사태‘이후’를 전망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의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세계적인 문제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한편으로 중국 정부는 서구가 식민주의적 시선으로 중국에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반박합니다.민주주의와 식민주의를 둘러싼 복잡한 갈등 속에서 홍콩의 민주주의는 중국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가'홍콩 국가보안법'제정을 추진하면서 홍콩의 민주주의를 둘러싼 갈등이 다시 고조되고 있습니다.이번 기획좌담회는 역사문제연구소가 홍콩의 민주화 요구에 연대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모색하고자 마련한 자리입니다.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2019년 하반기 한일 관계는 극단적인 대치 상태에 놓였습니다.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고 대법원이2018년 판결한 이래,일본 정부는 핵심 소재의 수출을 규제했고 한국인들은 그에 대해 ‘노 재팬(No Japan)’ 운동으로 맞섰습니다.일제 식민지기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가 갈등의 배경에 있었음은 물론입니다.나아가 한국의 식민지 경험을1945년에 끝난 ‘과거사’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다시금 떠올리려 합니다.부모가1945년 이전 식민 본국이었던 일본으로 건너간 후,일본에서 태어나 여전히 일본에 거주하면서 대한민국 국적,혹은 식민지기의 ‘조선적’으로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식민지 문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역사문제연구소2020년 첫 번째 저작비평회에서는 정영환 선생님의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를 통해,‘해방5년사’(1945~1950)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의 삶과 투쟁을 되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이 시기 일본에서 조선인 지배의 틀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 식민지배 경험과 냉전체제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재일조선인의 삶을 ‘민족·동포’,일본 내 ‘소수자’,‘지역민’ 등등 어떠한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그리고1945년 이후의 영토와 국민을 중심으로 설정된 한국사 및 일본사의 주류 인식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식민지’,‘냉전’,‘분단’,‘독립’을 종횡무진하게 될 이번 행사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2020년2월22일12시 한국프레스센터18층 연회장에서 열리는 『정석종,그의 삶과 역사학』출판기념회에 회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2020년은 한국 민중운동사1세대 연구자이자,역사문제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던 정석종 교수가 타계한 지2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이에 역사문제연구소는 고인이 몸담았던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총동창회와 함께 지인들의 회고를 담은 추모글과,고인의 논문 중 민중운동사 관련 논문을 골라 뽑은『정석종,그의 삶과 역사학』을 편찬하고,이를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함께 자리하셔서 그의 삶과 역사학에 대해 추억하고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시 2020년2월22일(토) 12~3시
장소한국프레스센터18층 연회장
주최역사문제연구소,영남대학교 국사학과 총동창회,정석종기념문집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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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시야에 조선 민중의 삶을 드러낸 정석종을 기억하다
―‘민중사학1세대’의 선두주자 정석종의 삶과 역사학
“종래에는 조선시대의 정치 현실을 당쟁사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였다.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것이므로 지양되어야 한다.물론 치자 계층 내부의 갈등으로서 당쟁 자체도 조선시대 정치사의 일부지만,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갈등으로 이루어지는 피치자의 사회운동이나 그 갈등의 폭발인 민란들도 정치사에 포함되어야 한다.어떠한 정치 현상으로서의 입법 조치나 새로운 시책의 결정 등은 하층 민중의 반항과 그 지향에 대한 일정한 양보 또는 타협의 산물이거나 그 지향을 억압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사실들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정석종,「조선 후기 정치사 연구의 과제II」 중에서.
“조선 후기 당쟁사를 민중과 연결시켜 해석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그 해석이 기발할 뿐 아니라 구체적인 실증 자료가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에,그의 논문들은 조선 후기 정치사,경제사,신분사,사상사 연구에 큰 획을 긋는 업적이 되었다.민중을 강조하던 정석종이 드디어 조선 후기 민중운동을 정치적으로,경제적으로,신분적으로,사상적으로,다각적으로 밝혀내 화려한 파노라마를 펼쳐놓은 것이다.”―한영우(서울대 명예교수)
1945년 이후 분단 구조와 이승만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고,한국 사학계는 대부분 왕조사관에 매몰되어 있었다.근대사의 이론이 정립되지 못한 학문 풍토에서,이를 재정립하고 타파하려는 소장 연구자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이들은 민족 문제와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이승만 독재 정권과 박정희 군사 정권 및 유신 정권 아래에서 방황과 고통을 겪었다.‘모순과 갈등의 시대에 역사가의 역할은 무엇인지,역사는 현실에 맞서 교훈과 무기가 될 수 있는지’라는 화두를 품고 치열하게 학문을 탐구했다.이들 소장 그룹의 한 멤버로서 한국 역사학계에 ‘민중사’라는 새로운 시선과 영역을 개척한 정석종은 기존의 연구에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인 이론을 제시하면서 독창적인 학문 세계를 수립했다.특히 범죄인 조사·신문·재판 기록인 『추안급국안』을 발굴하여 장길산 부대,무신난,홍경래난 등에 참가한 인물들의 정치·사회경제·사상사적 궤적을 생생한 역사적 사실로 그려냄으로써 민중운동사를 개척한 제1세대로 평가받는다.그의 사후20년,이제 동료와 후학들이 그의 삶과 역사학을 되돌아봄으로써 ‘역사학자’로서,그리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늘 눈앞의 과제를 정면 돌파하고자 했던 인간 정석종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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