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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강좌/2013. 역사적 민주주의

[역사적 민주주의 강의안 및 사진후기] 2강 :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한상구, 역사문제연구소)

 

 

2013 역사문제연구소 연속강좌

역사적 민주주의 :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2강 :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한상구(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우리의 민주주의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답1. 이식론 : 서양에서 들어왔지. 우리한테 언제 민주주의가 있었어. 해방이후부터 민주주의!

==> 대체로 그렇게들 느끼고들 있는데, 이게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해방후 미군정이 남산 서울방송국에서 내보낸 민주주의 교양방송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식의 편벽한 생각과 별로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이 문제가 될 걸? 아닌게 아니라 결국 -->

cf) 뉴라이트의 주장 =? 미군정, 아니면 이승만이 우리나라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들여왔다. 보통사람들은 그냥 주워 먹은거다!

 

답2. 부회론(경강부회한다는 것) : 왜, 신라시대 화백제도 있잖아! 이것은 곧바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합리화하는, 실로 견강부회의 주장으로 흘러간다. 화백제도가 민주주의면 나도 장동건이다!

==> 부회론이 좀 어리숙하고 많이 불순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자체 내부에서 뭔가 민주주의에 관한 것을 찾아보는 것을 아주 웃기다고만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역사학자들은 뭐하우? 좀 잘 찾아서 알려주지. 그런 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는 게 없잖나!

 

답3. 운동치환론 : 기원은 모르겠고, 면면한 반봉건, 반식민, 반독재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는 고심참담하게 획득된 거야.

==> 이거야 말로 반박할 수 없게 맞는 말이긴 한데, 이렇게만 얘기하다 보면 그 투쟁가, 운동가만 중요하게 보이고, 보통사람들, 대중들, 인민들이 잘 들어나지를 않는 문제가 좀 껄끄러운데? 보통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획득하고 완성해가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일까?

 

 

 

◆ 우리의 민주주의(국민<시민·인간>주권과 반전제 정치제도의 확립) 탐색을 유도해주는 빵부스러기 증거들

 

1. 해방 이후 시기의 큼직한 빵쪼가리들

- 급속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의 수립과 같은 것은 좀 차치해두고...

- 왕정복고운동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이거 흔지 않은 일일 수 있다.

- 해방 5년, 지주와 자본가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과 지배력은 실로 형편없었던 것. 그들은 참 많이 눈치보고 다녔다. 좌우 운동가들과 정치가들을! 그런데 기실은 보통사람들이 무서웠던 것이고, 아니면... 주권재민, 국민주권에 대한 투항적 동의!

cf) 이게 해방이후 남한사회, 대한민국에서 근 40년을 넘어서야 지배력을 명실이 상부하게 실현하게 되는 것인데....

-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동시 실현은 하나의 사회적 합의였었다.

- 1948년 제헌의회 선거의 무리없는(?!) 실시, 무소속의 절반 진출, 보통·비밀·직접·평등선거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나 몰이해는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여성참정권에 대한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사실!! 이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로 그 이유를 우리는 찾아보아야 한다.

- 1952년의 지방자치 실시. 그것도 전쟁통에. 이건 이승만의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전격적으로 실현된 것이지만, 그러한 읍·면단위 수준에서까지 대의기구가 아무런 무리없이 수립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제도에 대한 이전 시기의 어떤 경험축적과 사회적 동의가 없다면 결코 작동될 수 있는 게 아니다.

- 그리고 그렇게 참혹한 전쟁이 끝난지 7년만에 대통령을 쫓아내는 4.19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 거대한 민주주의 쟁취투쟁을 누가 지휘했는가? 누가 조직했는가? 어떤 정치조직이 이들 거대 투쟁을 지도했는가? 실로 아무도 없었다. 무지렁이 사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와 가치실현체계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는가? 세대를 이어온 어떤 사회·역사적 전사(前史)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2. 망국 전에 흩어져 있는 좀 작지만 중요한 빵부스러기들

- 사람들이 자꾸 모인다! 군중의 출현! 군중은 근대의 상징이었다.

- 이리저리 이런저런 과정의 민회(民會) 설립시도. 그 형식은 지금 보기에도 모던하다. 물론 한계는 있는 것이지만.

- 한번 온나라가 크게 움직인 적도 있어요. 국채보상운동! 필부필부가 양반, 관리와 함께 같은 포인트로 신문지상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것도 20만명이!! 그렇게 자기이름이 찍힌 신문을 쥐고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 ...

==> 이러한 꼭 완전히 새로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청 새로운 경험들은 그 뒤에 어디로 갔을까. 일본얘들에게 완전히 발렸을까? 참 3.1운동이 있잖나?

cf)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동아일보 창간사 1920. 4. 1.

cf) 애비를 애비라 부르지 못하는 그들! ‘대정 데모크라시’라는 일본 정치사 용어가 가지고 있는 슬픈 이야기 하나.

 

3. 훨씬 전시기부터 적어도 우리나라에 내려 깔려 있는 빵냄새들

- 위민사상, 민본사상! 어허? 견강으로 갈까요?

- 우환의식, 지식과 지식인류의 독특한 위상. 지식인과 민 사이에 이론적으로는 정치사회적 위계가 없다는 것이 유학사상의 특징.

- 공적 행위를 보편성의 실현으로 간주하는 사고. 그렇지 않으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부스러기를 쫓아가면서 주위를 살펴보다가 찾아다! 빵덩어리!!

==> 일제시기의 주민들!!!

또 cf 하나. 역사적 경험축적을 살펴볼 때, 염두에 두면 좋은 것, 시간의 길이.

개항~망국 34년 / 일제시기 35년 / 해방~서울의 봄 35년

 

 

 

 

 

식민지 시기, 지역주민의 민주주의 실천경험

 

1.

  일제시기 하면 우리는 상해임시정부와 삼일운동을 제일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또 민립대학설립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조금 더 나아가서는, 암태도소작쟁의, 원산총파업, 적색농민조합운동.... 조선공산당, 신간회 등등이 뒤를 잇는다. 일제시기는 국내외 각종 항일운동, 사회운동이 실로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기를 이와 같이 민족․사회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이해는 이들 운동들은 크게 한번 일어났었다더라는 식의 뭉뚱그려진 인상, 아니면, 각각 운동을 조직하고 주도했던 인물들, 굳은 신념으로 형형히 빛나는 눈빛을 가진 엄숙한 얼굴의 지사, 운동가, 주의자 또는 그들의 조직만을 떠올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제시기에 대한 인상이나 인식에서는 그만 사그라져버리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운동들이 조직되고 분출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본 바탕, 즉 당시 보통의 조선 사람들(이하 일단 조선의 ‘민<民>’이라고 하자) 속에서 광범위하고 심도있게 확산되고 축적되고 있었던 ‘민족적 자의식(민족의식)’과 ‘근대에의 감수성(근대적 가치에 대한 전향적 수용)’의 구체적 내용과 수준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민족적 자의식과 근대에의 감수성은 어떤 선각자, 민족주의 지사, 사회운동가들이 이끌어 계몽하고 심어준 것도 많다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 선각자, 운동가들의 역량과 의도를 뛰어넘는 수준의 주체성과 감수성을 보통의 일반 조선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 또한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민’들의 민족적 자의식과 사회적 각성에 따른 생각과 행동들은 당시 전개되었던 전국차원 또는 주류적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곧바로, 일관하여 수렴되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꼭 민족운동이나 사회운동의 형태로 표출될 필요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동시에 민족․사회 운동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즉 즉물적 이해관계에 따른 조선인차별의 시정요구나 노골적인 자본주의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그러한 수준에서 맴도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2.

  일제는 엄청난 자부심과 우월감으로 조선의 통치를 시작했다. 봉건적 누습과 악폐의 도탄에 빠져있는 조선을 그들이 구원하여 ‘새로운 정치’ 즉 ‘신정(新政)’을 배풀어 준다는 것이다. 실로 근대적(!?) 법과 제도, 시설, 조직을 마치 융단폭격처럼 조선 사회에 투하하였다. 제국주의의 독이빨임은 분명하였으나 절대적 그리고 상대적으로 봉건 조선왕조의 그것보다는 근대적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무도(無道)한 착취와 수탈은 유도(有道)한 그것으로 바뀌어갔다. 물론 그 ‘유도’는 식민과 근대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폭력성을 분식하는 근본적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이에 대해 조선의 민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느냐일 것이다. 어쨌든 근대적 겉모습의 ‘신정’에 압도되어 버렸을까? 구래의 봉건적 악폐가 사라졌으므로 일제의 통치를 겉으로야 아니더라도 내심으로는 반기고 있었을까? 아니면 거꾸로 다만 인종적 감정에서 이민족의 통치 전반을 무조건으로 거부하거나 반발하였을까? 학교에 나오라고 하여도 나가지 않고 길을 뚫는다 하여도 모두 싫다고 하였을까? 극단적인 예로 조선인의 풍속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었던 묘지령의 실시가 3.1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였을까?

 

  적어도 3.1운동 이후에는 근대적인 것, 근대적인 법과 제도, 시설, 기구 등등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은 어떤 집단이나 계층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유림조차도 여자야학을 세우고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에 나서고 있는 것은 허다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명 생각과 사고의 시계추가 바뀐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일제의 통치‘만’를 공개적이고 명시적으로 찬성하고 인정하는 어떤 형태의 언사도 사회적 백안시의 대상이 된 것은 어쩌면 1910년대보다 더 강화된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일제의 통치에 맞선 조선 ‘민’의 지향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근대적 법과 제도를 실로 근대답게 실현하는 것, 그것도 ‘민’ 스스로 주체적으로 실현하는 것 그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조선 ‘민’의 지향은 근본적으로 일제의 통치와 배치된다. 일제는 근대의 체현자, 선도자로서 조선의 ‘민’으로부터 권력과 권위를 동시에 취하려 하였지만, 근대의 진실한 구현자로서의 제국주의 식민권력이라는 것은 분명 형용모순인 것이다. 조선의 ‘민’이 그것을 몽롱한 수준으로 보았다거나 무지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선의 ‘민’이 봉건사회 속에서부터도 지속적으로 축적해온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역량을 지극히 폄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식민권력은 폭력에 기초한 권력은 있었지만 동의와 참여가 있어야만 가능한 권위를 가질 수는 없었다.

 

3.

  일제의 각종 제도와 시설은 조선 ‘민’의 생활 전체를 엄습했다. 동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이러한 엄습은 정치적 사회적 지향을 갖고 있는 조선 ‘민’의 거부와 저항을 부른다. ‘민’ 스스로의 거부와 저항은 조직력과 운동력을 갖춘 형태로 들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민’의 거부와 저항은 ‘민’의 생활공간 모든 단위와 부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민’은 생활공간 속에서는 민족자체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동심원적인 각종 지역단위 즉, 리-면-군-군연합-도의 행정적 사회적 역사적 공간의 ‘지역주민’으로 현상한다. 각급의 지역주민은 지역을 단위로 시행되는 일제의 제도와 시설, 조직에 대하여 일상적이고 총체적으로 대응하여야 하였다. 삼일운동 이후 상당기간 각급의 지역에서 일제 식민권력이나 지역주민에게나 각자의 권위와 권리를 도모하고 상대방에 관철하려고 하는 각양각색의 밀고 당기기, 실랑이, 위협과 양보, 과시와 차선적 수용이 교차하는 만화경적 광경이 연출되었다.

 

  관청이 제방관리를 잘못해서 커다란 수재가 일어났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주민들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주민들이 반대하는 수리조합을 만들어놓고서는 엄청난 수세를 거두어들여서 도저히 영농이 어려워진다면? 한참 바쁜 모내기철에 도의 지시라고 도로부역을 나오라고 한다면? 생면부지의 타지역 사람을 면장으로 갑자기 앉힌다면? 군수가 돈을 받아먹고 면장이나 면서기를 임명한다면? 면장이나 면이 지역의 공공사업에 솔선하여 나서지 않는다면? 공립학교를 세워주지 않으니까 강습소나 야학을 열어 교육하려 하는데 이를 허가해주지 않거나 폐쇄명령을 내린다면? 우리 군이나 도에 고등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은데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면? 세금을 불평등하게 부과한다면? 우체국의 배달이 계속 지체된다면? 곡물검사소 등 각종 기관들이 합리적인 지역배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일본인들이 몰려사는 시가 쪽은 도로포장도 잘되어 있고, 수도도 들어오는데 조선인 쪽 시가지는 몇 년이 가도 개선이 없다면?

 

  지역주민들은 이러한 식민통치, 식민행정의 모든 부면에서 발생하는 각종의 문제들, 현재의 우리의 눈으로 보면 민원사항 등속으로 일괄하여 쉽게 보아넘기기 쉬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실로 눈물겨운 분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식민행정의 모든 문제는 모두 조선인의 무권리 상태, 식민적 상태의 반영이며 결과인 것으로 지역주민에게 파악된다. 무권리 상태는 관권정치, 전제정치의 귀결이다. 식민권력의 ‘신정’은 결국 관권정치이고 전제정치인 것이다. 행정에 대한 민원은 이렇게 식민통치의 본질 속으로 신속히 파고들어간다.

 

  일제가 이러한 무권리 상태에 대한 반발을 완화하기 위하여 면협의원 등 사이비 대의기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무마하려 하였지만 지역주민들은 상당기간 이 기구를 무력화시키고 스스로 의사의 집결과 과시, 조직의 제반 노력을 광범위하게 시도하였다.

 

4.

  지역주민들은 의사와 요구는 지역의 특정한 유력자들을 경유하여 식민행정당국에 전달되는 방식만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각급 단위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 수렴, 조직하는 일련의 과정을 갖추려고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직접 참여 및 적절한 대표성 확보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의 진행은 본질적으로는 민의(民意), 민주(民主)의 실현, 체험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주민들의 이러한 집단적 조직적 행동은 3.1운동 직후부터 30년대 중반까지 전국 각지에서 빈발하였던 리민대회 면민대회 군민대회 등 각급 행정단위의 ‘주민대회’에서 명료하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각급의 지역에는 주민들 속에서 그들의 동의를 획득하여 그들의 의사와 행동을 대변하고 대표하게 된 사람들 즉 ‘유지(有志)’들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특정한 계층이나 우월한 신분, 일정한 재력을 갖춘 자들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기본적으로 이들은 주민 위에 군림하고 통제하는 능력과 자원을 가진 ‘유력자(local influential)’로서가 아니라 ‘有志=자원자(volunteer)’로서 주민들 속에서 탄생하고 ‘형성(making)’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