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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광장

[시사토론] '촛불 민주주의', 과거·현재·미래 : 공범의 전복 –세월호 참사와 ‘촛불 민주주의’



* 이 글은 지난 2017년 1월 24일 <'촛불 민주주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제목으로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에서 진행된 토론회의 발표문입니다. 






공범의 전복 – 세월호 참사와 촛불 민주주의


 장미현



1. 우리는 왜 촛불을 들었는가?

 

광화문 촛불집회가 13주 째 이어오고 있다. 늦가을에 시작한 촛불집회는 해를 넘겨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참가인원은 매번 다르지만 121, 혹한의 폭설 속에도 35만 명이 광화문으로 나왔다. 사실, 놀랍지 않은가?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촛불이 이어질지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런데 촛불은 애초 국정농단 진상규명에서 시작하더니 이제는 언론, 경찰, 검찰 개혁을 거쳐 한국 권력의 핵심인 사법부와 삼성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각주:1] 지금까지 다들 어떻게 참고 적응하며 살았는지 놀라울 정도로 정치제도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문제를 다들 진단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나름, 바꾸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한국과 같이 삶을 유지하기 위한 강도가 센 사회 구성원들에게 무엇인가를 바꾸기 위해 지속적인 시도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말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일상의 노동에서 빠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주말에만 할 수 있는 혼인/비혼/가족생활에서 예외를 인정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이유들이 존재해도 나가지 않으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은 어디서 왔을까?


이제 3년이 다 되어가는 20144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그 이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목도했다. 피해 학생들의 가족이 조롱당하고 고립되며 책임져야 하는 정부와 기득권 세력이 진상규명과 참사 기억 활동을 탄압하는 과거의 작태가 벌어졌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청와대 관계자들의 실상을 접하고야 수많은 의문이 풀렸다. 그렇다면 광장의 감정은 분노였을까?

 



2. 떠도는 죽음에서 느끼는 가해의 충격[각주:2]


분노는 주로 피해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식민지와 분단, 승자독식이 강한 한국의 역사와 사회문화 속에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분노를 느낀다. 세월호 부모님들이 가장 많은 느낀 감정도 특정인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희생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단원고 희생자들의 부모님들은 이준석 선장부터 박근혜까지 증오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안에 세월호를 기억하겠노라고 약속하고는 곧바로 자식 팔아 돈 받아먹는파렴치한 부모로 낙인찍는 데 앞장 선 우리들(사회)도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 집권 기간 중 우리가 가장 자주 느낀 감정 또한 분노였다. 언론의 편파, 파행 보도가 싫어 언론사에 취직해 월급 받고 사는 친구들이 싫어지던 때, 단원고 기억교실 철거 중에도 침묵하는 단원고 교사들이 싫어져 교사 하는 친구들을 원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자고 대학의 강단에서 얘기하고 싶었지만 수강생들의 평가가 두려워 침묵했던 시절을 나 또한 함께 보냈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모욕을 참고 분노를 참고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야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내부 분열을 만들고 무기력을 만들어 세월호 부모님들을 고립시키고 있었던 시간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고립된 분노는 무기력 그 자체였다. 그 시간 안에서 나는 박근혜 정권의 피해자였고 피해자이기에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피해자 위치에 안주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피해자 의식은 낯설지 않다. 식민지 경험과 국가에 의한 상시적 폭력, 학살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우리에게 피해를 보상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라는 요구야말로 도덕적으로 가장 정당한 요구였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는, 나는 이 피해자 집단에 속해 있을 권리가 있는가? 적어도 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 해보고 싶다.


세월호 참사 이전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던 사안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8년 광우병 수입 소 반대등은 피해자의 위치에 선 집회 참가자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이 사건들은 모두 사건의 발생 과정, 그 자체를 우리가 목도한 것은 아니었다. 2008년 촛불은 오히려 은폐의 과정 그 자체가 분노의 원인이었고 대상이 우리 스스로가 아닌 외부의 을 향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세월호 침몰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볼 수밖에 없었고 우리 모두 함께목격한 최초의 참사였다.[각주:3] 세월호 참사는 sns를 통한 드러내기와 참여하기가 활성화 된 이후에 발생한 사건이며 언론과 교육과 자본의 모순이 복잡하게 중첩해 발생하고 그 상태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사건 자체가 총체적인데다 이미 모두가 봐 버린 이후 누구나 이 사건과의 직접 관련성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참사 이후 ‘416 운동[각주:4]은 중앙 집중적·위계적이 아닌 분산적·개별적 활동 방식을 통해 확산·유지되었는데 다른 운동들과는 달리 초기부터 이런 운동의 방식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관련성을 목격자인 우리들이 부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봤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가 느낀 죄책감은 사실 희생’-죽게 했다- 그 자체에서 연원했다기보다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비롯해 피해자로서 동일 집단에 속해 있을 것이라 쉽게 짐작했던 참사 당사자들의 위치 변화에서 연원했을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 학생들의 인터뷰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단어가 미안함과 죄책감이다. 이러한 감정은 마치 그들만의 리그처럼 내부에서 맴돈다. 생존학생과 생존학생의 부모님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죄책감을 가진다. 유가족분들은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촛불을 만들어 준 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가장 분명한 피해자가 피해자 집단에서 나와 자신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을 통해 또한 확인했다. 후지이 다케시가 인용한 이시하라 요시로[각주:5]의 글에 나와 있듯이 확고한 가해자를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충격, 나는 이것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이 우리에게 준 충격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의 직접적 당사자들이 자신의 가해성을 그것도 아이들을 죽게 한 부모라는 개인적 가해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에 무관심한 자신의 생애가 아이를 죽게 했다는 사회적 가해로 인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집단적으로 자신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가해자로 만드는 위치에서 벗어날 것을 선택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성을 드러내고 그 위치를 벗어나려는 고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나 자신이 피해자로서 당당할 수 있을까? 이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가해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행위는 나 자신의 행위이지만 이런 위치 변화는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 전복(顚覆)의 역설


 

세월호 참사 이후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가운데 불안과 고통으로 인해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가해자로 자신을 설정한 후 자신을 가해자로 만드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교육계와 학계는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한국 사회의 특성상 이러한 위치 변화를 시도하기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어머니들도 이 고투에 서서히 동참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이 취한 위치 변화를 쫓아 각계각층이 변화를 시도 중이다.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단과 방법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자기를 바꿈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줬다. 2014416일 이후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은 20161029일 시작했지만 촛불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촛불과 함께 세월호 참사 당사자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에서 내리지 않은 채 좀 더 천천히 침몰하도록 밧줄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배를 침몰시키고 있는 우리들이 반대편으로 와 그 밧줄을 함께 쥐고 뒤집힌 배의 전복(顚覆)에 함께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 : 장미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1. 이재용 구속영장 청구 기각 판결을 둘러싸고 사법부 내에서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참고할 수 있는 글로 차성안(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 「현직 판사의 일주일을 공개합니다.」, 『시사인』(제418호), 2015. 9. 21 차성안 판사는 판사들의 업무 환경과 개혁 방안에 대해 sns를 통해 활발히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더 자세한 논쟁에 대해서는 페이스북 Sungan Cha, 류영재 참조. [본문으로]
  2. 이 구절은 후지이 다케시, 「(세상 읽기)명복을 빌지 마라」, 『한겨레』, 2015.4.12.에서 인용. [본문으로]
  3. 이 변화의 기제가 또 하나의 언론이자 여론 창구인 sns 인 것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4. 세월호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에 직면한다는 의미로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가들은 이 활동을 ‘416운동’ 으로 부른다. 2014년 6월 후지이 다케시는 세월호 참사 이후 이미 우리의 일상 또한 깨졌다는 점에서 ‘4·16’ 이 ‘그들’의 시간이 아닌 우리의 시간임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후지이 다케시, 「(세상 읽기)멈춘 세월, 흐르는 시간」, 『한겨레』, 2014.6.1). [본문으로]
  5. 각주 2번에서 언급한 칼럼에 나오는 이시하라 요시로는 1939년 만주에서 징병되어 근무하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8년을 시베리아에서 보낸 시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