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교과서를 논하다/'뉴?라이트'교과서 사용설명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그 오류의 끝은 어디인가?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그 오류의 끝은 어디인가?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2013.12.18

 


  12월 17일 교육부는 수정명령 승인을 내린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대해 재차 표기상 오류 수정사항을 접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논란이 됐던 대부분의 문제가 전부 해소됐기 때문에 이제 학교에서 교과서를 채택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지 일주일 만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육부 관계자는 "출판사들이 맞춤법, 띄어쓰기 등 표기 오류를 자체적으로 바로 잡을 것이 있다고 해 내용상 변경을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표기 오류를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23∼24일 이틀간 내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교과서 검정 이후 829건을 수정 권고한 데 이어 수정 명령까지 내리고서 또 자체 수정을 허용한 것은 수정명령조차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다.

 

 

  “내용상 변경을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표기 오류를 수정하겠다?”
  교육부의 이 발표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교육부의 꼼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직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무수한 사실 오류를 지난 번처럼 속시원히 ‘훈수’를 둘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수정최종본으로 공개된 교학사 교과서는 교육부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몇 차례의 ‘특례수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류투성이의 엉터리 불량 교과서일 뿐이다. 단순히 표기 오류를 수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앞으로 조목조목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이번에는 한 가지 사례만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수정최종본으로 공개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왜 아직도 총체적인 부실교과서인지는 293쪽에 서술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활동에 관한 서술만 읽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교과서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1939년 민족 연합 전선 운동에서 이탈한 조선 의용대는 (2)한인들이 비교적 많이 활동하고 있는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3)김두봉을 중심으로 화북에 모인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4)태항산 지역에서 국민 혁명군 제8로군에 소속되어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을 전개하던 무정 등 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하였다. 여기에 일본군에서 탈주하였거나 포로가 된 한국인 청년들이 가세하여 (5)김두봉을 주석으로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1942). (6)이어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여 (7)조선 독립 동맹의 당군으로 만들었다.
  조선 독립 동맹은 처음에는 공산주의적인 색체를 드러내지 않고 중국 화북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한인 청년들에게 조국 광복의 대업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래서 명칭도 (8)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9)곧 조선 독립 동맹으로 개칭하여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옮겨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였고, 조선 의용군도 중국 공산당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였다.

 

  밑줄 친 부분이 사실 왜곡이나 오류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13줄에 불과한 본문 서술에서 무려 9개의 서술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가운데 김두봉이 독립동맹의 ‘위원장’이 아니라 ‘주석’(5번)이라는 것과 ‘조선 청년 연합’의 명칭이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8)’라는 간단한 사실 오류 2개는 역사단체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수정했다. 그러나 역사단체가 지적하지 않은 나머지 7개의 서술 오류는 최종수정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1) 조선의용대의 화북 지역 이동 시점

  조선의용대가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1939년이 아니라 1941년 3-5월 무렵이다. 1940년 11월에 열린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화북이동을 결정한 뒤에 각지에 흩어져서 활동하던 대원들은 낙양에 집결하여 4개 그룹으로 나뉘어 1941년 3월 중순부터 5월 하순에 걸쳐서 황하를 건너 중국 공산당 지역인 화북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중국 국민당 보고서와 광복군 지도자 김학규 등의 보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염인호,『김원봉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3, 224-247쪽 ; 한시준,『한국광복군 연구』, 일조각, 1993, 58-64쪽]

 

  조선의용대가 1941년 초에 타이항산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교학사 교과서 289쪽 오른쪽에 실린 ‘조선의용대의 분할과 북상’이라는 지도에 정확히 서술되어 있다. 지도에는 이처럼 정확히 서술된 내용이 왜 본문에는 이렇게 엉터리로 서술되어 있는 걸까? 아마도 이런 작업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본문을 집필하는 필자와 지도와 시각 자료를 편집하는 출판사 직원이 분업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소통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집필자가 제대로 된 지식만 가지고 있었어도 본문 서술 오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오류를 바로 잡을 시간은 많지 않았나?

 


2)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 이유

  조선의용대가 “한인들이 비교적 많이 활동하고 있는 화북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도 정확한 서술이 아니다. 화북 지역은 행정구역명이 아니라 한반도 보다 몇 배나 넓은 중북 북부 지역의 통칭이다. 한국의 영남, 호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조선의용대가 북상해서 도착한 목적지는 화북 산서성 진동남 타이항산(태항산) 기슭이었다.
  중국의 그랜드캐넌으로 불리워질 정도로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하는 타이항 산맥은 남북길이 약 600km, 동서길이 250km에 걸쳐있는 험준한 산맥이다. 한국의 소백산맥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영남과 호남이 갈라지듯이 중국은 타이항 산맥을 경계로 산서 지방과 호북, 산동 지방이 갈라진다고 한다. 타이항 산맥 일대는 산세가 워낙 험해서 예부터 중국 고대 문명의 중심지인 서안과 낙양 일대의 중원을 지키는 최후 방어선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의용대는 이렇게 험한 타이항산으로 이동했을까? 전략적 요충지인 타이항산에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최전방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만주지역은 만주국을 세운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원들은 중국 공산당과 연합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타이항산으로 이동한 것이다.

 


3) 김두봉의 독립동맹 합류 시점

  주시경의 제자인 김두봉은 한 때 공산당 조직에 이름을 올린 적도 있었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역사와 한글연구에 심취한 민족주의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가 상해에 머무를 때 한인학생들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는 사실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는 김구의 아내가 1924년 1월 병으로 사망했을 때 그녀를 애도하는 뜻에서 한글로 된 비문을 써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중경을 떠나 공산주의자들의 근거지로 가서 독립동맹에 가담했다는 것은, 당시에도 논란거리였지만, 지금까지도 역사연구자들 사이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김두봉은 1941년 초에 북상한 조선의용대와 함께 타아항산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1942년 4월 무렵 10여 세의 딸을 데리고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중경에서 연안까지 걸어서 갔다.(김오성,「김두봉론」,『지도자군상』, 대성출판사, 1946, 52-53쪽 ; 심지연,『조선신민당연구』, 동녘, 1988, 36쪽) 조선의용대와 동행하지 않고 조선의용대가 북상을 완료한 지 1년이 지나서야 화북으로 간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김두봉을 중심으로 화북에 모인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서술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 성립될 수 없다.  김두봉은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조직인 독립동맹의 지도자였다. 조선의용대를 확대 개편해 조직된 조선의용군의 총사령은 무정이었다.

 


4) 태항산의 명칭 표기 문제

  외국 인명이나 지명은 외국어 표기 규정에 따라 현지음으로 서술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교학사 교과서 본문에서도 ‘상해’는 ‘상하이’로, ‘중경’은 ‘충칭’으로, ‘연안’은 ‘옌안’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는 ‘태항산’을 현지음인 ‘타이항산’으로 표기하지 않고 ‘태항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일관성도 없다는데 있다. 두 페이지 앞쪽인 289쪽 조선의용대의 북상과정을 그린 지도에서는 ‘타이항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게 많이 지적당하고 고치고도 단순한 지명 표기 오류하나 아직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5)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조선의용군 개편 시점

  본문에서는 “이어”라는 표현을 써서 독립동맹 결성에 뒤이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서술대로라면 독립동맹이 결성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조선의용군으로의 개편은 독립동맹 결성과 같은 날 같은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 10일 제2차 대표대회를 열어 청년연합회를 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다는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결정했다. [심지연, 『조선신민당연구』, 동녘, 1988, 32쪽]

 


6)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당군’인가?

  본문에서는 ‘당군’이라고 표현했지만 조선독립동맹은 통일전선체를 지향한 연합조직이지 단일한 강령과 이념을 중심으로 결집된 정치적 결사체인 ‘당(黨)’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용군도 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조선의용군을 독립동맹의 ‘군사조직’ 혹은 산하 무장세력, 무장부대라고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굳이 명칭과 관련해서 서술하고자 한다면 ‘당군’이 아니라 ‘연맹군’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군’이라는 표현은 어디서 나온 걸까? 교학사 집필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무차별적으로 인용한 위키피디아 조선독립동맹 항목에 적혀 있다. 위키피디아의 조선독립동맹 항목 서술에는 오류가 수두룩하다. 조선독립동맹이 특정 당파와 계급을 초월한 통일전선조직체 조직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 형태의 결사체” 조직이라고 서술하고, 동맹의 최고 지도자인 김두봉을 주석이 아닌 ‘당수’라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용군도 동맹 산하의 무장부대가 아닌 “당의 군사조직”이라고, 무정이 총사령인 조선의용군도 ‘조선의용대’라고 표기하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이런 오류투성이의 위키피디아를 주자료로 인용해서 교과서를 편찬한 집필자들도 대단하지만, 그런 교과서를 망나니 자식 감싸듯이 두둔하는 교육부의 태도는 차라리 애처롭다. 이쯤에서 교학사 집필자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당신들은 위키피디아를 인용할 때 사전 초기 화면에 적힌 다음과 같은 ‘경고’ 문구도 읽지 않았는가?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서를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주석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위키피디아 측은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고, 그래서 신뢰할 수 없다고 분명히,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교학사 필자들이 인용한 조선독립동맹 관련 설명에는 참고 문헌이나 출처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인터넷의 한 카페에는 “'출처 필요(citation needed)' 표시가 붙어 있거나, 아예 인용 출처가 없는 경우 가급적이면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위키피디아 올바르게 쓰는 법’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위키피디아 자료를 인용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웬만한 인터넷 사용자들은 다 알고 있지 않는가? 교학사 교과서 집필자들은 정녕 눈뜬 장님들인가?

 


7) 독립동맹의 연안 이동 문제

  본문에서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조선독립동맹으로 조직의 명칭을 변경하고 나서 곧바로 옌안으로 이동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산서성 진동남 태항산 일대에서 조직된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이동과 조직 개편을 거듭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후퇴한 것은 1944년 초 무렵이다. 독립동맹이 결성된 지 2년이 지나서야 옌안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런데 289쪽에 실린 ‘조선의용대의 분할과 북상’이라는 지도에는 조선의용군이 옌안으로 이동한 것이 1944년 9월이라고 적혀 있다. 교과서 집필자들이 자신들이 집필한 내용만 꼼꼼히 검토했어도 이런 오류는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문제제기에 이어 역사단체의 전문적인 분석 결과로 교학사 교과서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된 지도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 귀중한 시간동안 고친다고 고친 것이 역사단체에서 지적한 딱 두 가지뿐이다. 그때 역사학자들이 미처 지적하지 않고 ‘숨겨둔’ 나머지 일곱 개의 오류는 왜 고치지 못했나? 역사학자들이 ‘친절하게’ ‘안내 싸인’을 보내주지 않아서? 이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교육부 책임자님 내용상 변경을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표기 오류를 정말 수정하긴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13줄 서술에서 7개의 사실 오류나 왜곡을 고치면 어떻게 될까? 누더기 기운 옷이 되지 않을까? 이쯤에서 작은 결론 하나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검인정 취소. 이 쉬운 길을 두고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

 


부록에서 드러난 오류들

  이번 글을 마무리하면서 본문 이외에 부록과 관련된 사소한 실수들을 몇 가지 짚어보자.
  교과서 말미에는 검인정을 통과한 모든 교과서에는 집필자의 현재 소속과 약력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교학사 교과서에 참여한 6명의 집필자도 현직 소개를 포함한 집필자 약력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수정최종본에는 논란이 되었던 교학사 교과서 집필자 중 한 사람인 김도형의 약력 가운데 “(현) (사)통일미래사회연구소”라는 현직 소개가 출판사 자체 수정의 형식으로 슬쩍 빠졌다. 도둑이 제발 지린 것인가?
  “(현) (사)통일미래사회연구소”를 빼고 나니 김도형이라는 집필자만 현재 소속을 밝히지 않은 유일한 집필자가 되었다. 검인정을 통과한 8종의 한국사교과서 집필진은 대부분 현직 교수와 교사들이다. 그렇다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난 뒤 뚜렷한 연구단체나 학교 소속도 없는 사람이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건가?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교과서를 수정한 본인들은 정작 그 ‘어색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혹시 이제 최종본이 통과됐으니 이 문제도 그냥 넘어가기를 가슴조이며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부록과 관련해서 교학사 교과서의 ‘사소한’ 실수를 하나 더 지적해 보자.『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글을 [탐구 활동] 자료로 교과서에 실었다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수정권고 지시를 받고 삭제했다. 8월 31일 검인정본이 공개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로부터 벌써 세 달이 훨씬 지났다. 왜, 아직도 400쪽의 ‘사진 및 인용자료 출처’ 목록에 [“사상계 1961년 6월호”, 사상계, 1961, -328쪽(장준하의 5·16 선언에 대한 평가)』]라는 자료 출전에 버젓이 남아 있는가? 도대체 교학사 집필자들은 무엇을 고치는 걸까?

 

  그런데 ‘사진 및 인용자료 출처’를 보다 보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점이 눈에 띈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교과서 자료 출전 코너의 주인공인 구글, 네이버, 네이트, 다음, 위키피디아, 티스토리 같은 인터넷 자료 출처를 모두 수정했다. 교학사 교과서 내용이 얼마나 바뀌었고, 또 출판사측이 얼마나 교과서를 열심히 고쳤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분들은 단언컨대 교과서 본문을 보지 말고 교과서 제일 끝의 ‘사진 및 인용자료 출처’(395-400)를 살펴보시기를 권한다. 인터넷 인용 자료 목록이 장난 아니다. 얼마나 고쳤기에 그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는 5쪽 분량이 6쪽 분량으로 늘어났을까. 본문을 무수히 고쳤지만 편집의 문제를 고려해 쪽수를 바꾸지 않는 선에서 수정했다. 그런데 ‘사진 및 인용 자료 출처’만은 그 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과감히 고친 것이다.

 

  얼마나 고쳤는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교학사 집필자들이 좋아하는 수치로 한번 계산해 보자. 검정본을 기준으로 ‘사진 및 인용 자료 출처’에 적힌 출전 항목수는 총 538개. 이 가운데 인터넷 인용 출처는 모두 321개. 기타 자료 인용 출처 226개를 가뿐이 넘는다. 전체적으로 60%가 넘는 수치다. 근현대 부분만 놓고 보면 인터넷 자료의 인용 비율이 압도적이다. 인터넷 : 기타 자료 비율이 4단원(개항기) 78:29, 5단원(일제강점기) 108:42, 6단원(현대) 73:14였다. 눈이 아파서 2번만 카운트한 숫자라서 다소 수치의 차이는 있더라도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수치 기록 분석을 통해 교학사가 사진 및 인용 자료 작업을 얼마나 안일하게 진행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작업한 것을 불과 2달 남짓한 시간 동안 다 고쳤으니 요 몇 달 사이에 얼마나 고생들이 많았을까. 시각 자료가 많이 들어가는 책을 만들어 본 사람은 잘 안다. 이런 사소한 자료와 출전 하나를 새로 찾고 고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사실 역사단체와 시민단체 등의 ‘훈수’에 국사편찬위원회와 교육부가 친절하게 수정을 도와 준 본문을 고치는 것은 인용 자료 출처를 고치는 것에 비하면 누워서 식은 죽 먹기가 아니었을까. 유경험자로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이 많은 인용 자료를 다시 찾고 수정하느라 고생했을 교학사 출판사 편집자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조급하게 너무 많은 양을 고치다 보니 코미디 같은 실수도 더러 눈에 띈다. 그래도 교과서 집필진의 ‘본문 횡포’에 비하면 양반이니 애교로 봐 주고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팁이 하나 더 있다. 검정본에서 ‘한국역사연구회’를 ‘한국역사연구원’으로 잘못 표기한 것도 아직 고치지 않았다. 한국역사연구회는 한국사 최대의 연구단체로 이번 교학사 교과서 오류 분석에도 ‘큰 공을 세운’ 단체가 아니던가? 이런 사소한 실수마저 최종본이 공개될 때까지 수정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그 중요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무엇을 고친 건가?
  그런데 어쩌나. 내일 오전 11시 당신들이 단체 이름도 제대로 표기하지 못했던, 바로 그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한 7개의 역사학회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검토 결과를 발표한다고 한다. 16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교학사 교과서 수정최종본을 검토한 결과 밝힌 개항기 100건, 일제강점기 200건, 광복 이후 현대사 100건 등 총 400건의 오류보다 더 많지 않을까? 내일이 기다려진다.

 

  교학사 교과서, 그 오류의 끝은 어디인가?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