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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광장

[연구소 30주년 기록하며 돌아보기] 민중사연구반 小史 (홍동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본 글은 연구소 회보 59호 창립 30주년 기념호에 실린 기사 중 하나입니다. 

연구소 회보는 연구소 후원회원들을 대상으로 배포되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의 글들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합니다.  


 

 

 
민중사연구반 小史

홍동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민중사반 前 총무

 

    2005년 민중사반이 결성되었으니, 만으로 꽉 채워서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올해 3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문제연구소와 3/1을 함께한 것이다. 연구회나 연구소가 아닌 일개 ‘연구반’이 10년이라는 역사를 간직한 경우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구소 내에서도 민중사반은 가장 큰 계파(?)를 형성하고 있다. 가끔 독립하라는 시샘 섞인 농담을 듣기도 하지만 연구소의 관심과 지원 덕분에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다.


    민중사반에 대한 略史는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이다. 연구소 회보에 전임 반장이었던 허수 선생(『회보』50호, 2007)과 이용기 선생(『회보』57호, 2013)이 민중사반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 바가 있고 민중사반이 공동으로 엮은 2권의 단행본을 통해서도 정리했다. 그만큼 주변의 관심이 크다는 증표일 테고, 한편으론 민중의 생존을 알리고픈 우리 스스로의 욕망도 작동 했을 것이다. 즉, 민중사반 내부 구성원 뿐 아니라 연구소 구성원들 또한 어느 순간부턴가 시야에서 흐려지고 있던 민중에 대한 허전함 또는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민중사반이 조직되었을 때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하면서, 때론 민중사반의 행보에 못마땅해 하면서도 관심을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연구소 30주년을 맞아 민중사반의 약사를 정리해 달라는 연구소측의 제안 또한 그러한 복잡한 시선이 함축되었을 것 같아 매우 부담이 가는 건 사실이다. 혹시 그래서 민중사반 내에서 그래도 ‘우파’에 속하는 내게 반장이 史官의 중임을 명한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도 해본다. 아무튼 나는 ‘述而不作’이라는 옛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그동안 민중사반의 행적들을 있는 그대로 정리해볼까 한다.   

 
1. 前史. 역문연과 함께 출범한 ‘19세기 민중운동사팀’ 1986년 
    잘 알려져 있듯이 2005년 민중사반의 결성은 그해 9월에 있었던 일본 아시아민중사연구회(이하 아민연)와의 교류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민중사반 略史에서는 1991년 아민연과의 첫 교류를 민중사반의 前史로 서술해 왔다. 하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과 함께 꾸려진 근현대사 세미나 1팀이었던 ‘19세기 민중운동사 세미나팀(이하 민중운동사팀)’이 민중사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直筆을 위해 사료를 뒤지던 필자는 우연히 민중운동사팀의 존재를 발견하였다. 좀더 자세히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회보』를 창간호부터 검토했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현재까지 『회보』를 통해 파악한 내용만 간략히 적고자 한다.


    우선 제1기는 역문연의 출범 이후 몇 달 뒤(1986. 6. 30)에 꾸려졌으며, 1987년 6월 21일 모임을 끝으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총 13개 주제로 매달 세미나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처음 8명으로 시작하여 거쳐 간 연구자만 2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참여했는지는 어떤 내용을 다루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이화 선생님이 2기까지 팀을 이끌어갔으며, 간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배항섭 선생님이나 우윤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1기 모임이 해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1987.6.27) 제2기 세미나팀이 새롭게 구성되었다. 2기 세미나팀은 1기의 방만함을 교훈 삼아 소수의 전문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1811년 관서농민전쟁, 1862년 임술민란, 1894년 갑오농민전쟁, 의병전쟁(1,2차)이라는 4개의 아주 구체적인 주제를 정해서 연구사 및 자료 검토 등을 통한 공동 연구 작업 형태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3기, 4기팀을 구성하여 단계적으로 그 성과를 외화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1991년 어느 순간부터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추측된다. 『회보』13호(1990.10.31)까지는 활동이 보고되지만 『회보』15(1991.7.31)호부터는 연구소 활동에 아예 제외된 것으로 보아 2기팀도 이때 즈음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미나팀이 언제 왜 어떻게 정리가 되었는지 그 단서가 될 만한 『회보』14호를 현재로서는 찾아 볼 수가 없어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배항섭 선생님 구술을 통해 보다 자세히 알아볼 계획이다. 

    이상 19세기 민중운동사팀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혁주체로서 민중을 19세기 반봉건·반침략 변혁운동에서 찾고자했으며, 방법론적으로 80년대 민중사학을 계승하고 있었다.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1991년 세미나팀의 갑작스런 증발과 함께 그 해에 일본 아민연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당시 아민연과의 교류에서 역문연측 연구자들은 상당한 간극을 느꼈던 것 같다. 이미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탈계급적, 다층적인 민중관을 모색하고 있던 아민연과의 인식차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후 1996년(서울)과 1997년(도쿄) 공동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2년 뒤인 1999년(서울) 심포지엄을 마지막으로 교류가 중단되었다. 

    모두 네 차례의 만남이 있었는데, ‘차이’라는 단어가 참관기마다 자주 등장한다. 그 차이는 민중관을 둘러싼 역사인식의 차이도 있었지만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침략당한 나라와 침략한 나라의 차이라는 시각을 도입해야 올바른 비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정태헌)”는 한국측 연구자의 발언에 한일 양측 모두 동의했다고 하지만 상당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일교류에서 긴장감은 어쩔 수 없지만 그 긴장감을 뛰어 넘기에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1999년 심포지엄을 마지막으로 양측의 교류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역문연 내부에서도 민중사에 대한 집단적인 논의는 더 이상 진전(거론)되지 않았으며, 몇몇 연구자만이 개별적으로 고군분투하며 21세기를 맞이하였다.   

 

 

2. 출발. ‘凡민중사 연구팀’ 2005년
    한일 양측은 2005년 다시 만났다. 마지막 여름 장마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9월 서울 역문연 강당에서 아민연과의 공동워크숍을 개최하였다. 1999년 당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좀더 조직적인 대응과 문제의식이 필요하다(배경식)”는 역문연 내부의 반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갑작스런 아민연측의 제안에 따라 몇몇 사람이 급조되었다. 6년만의 재회였지만 한일 양측 모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날따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지붕에서 비가 새다니 ... 워크숍 도중 양동이까지 동원해야만 했다. 여기까지는 지붕 방수공사 부실로 핑계거리라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젠장 정전이라니!!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전공 탓인지 자격지심이 살짝 발동했다. 하지만 이런 허술함이 서로의 경계를 해제시켜버린 것일까? 아니면 양측 구성원이 모두 젊었기 때문일까? 주로 30~40대로 구성된 한일 양측 참가자들 사이엔 각기 사용하는 언어 빼고는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많았다. 민중에 대한 인식 또한 기존의 단일한 민중상을 지양하고 뭔가 새로운 민중상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공유되는 부분이 많았다. 양측은 민중스럽게 새벽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만남을 정례화하기로 합의했다.

 

△ 2005년 만남을 정례화하기로 한 이래 두 모임의 교류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사진은 2016년 1월, 일본에서 열린 공통워크숍의 어떤 시점. ‘민중’들이 모여 있다.


    한편 이번 워크숍은 70대에서 20대 연구자까지 아우르고 있던 아민연의 인적구성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허전함을 크게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다. 이러한 자극은 그동안의 참았던 무언가에 대한 갈증과 욕망이 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곧바로 민중을 매개로 한 모임이 꾸려졌다. 이번 모임에는 배항섭, 허수, 허영란, 장용경, 이경원, 홍동현 등 민중운동사 또는 마이너리티 등에 관심이 있던 젊은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허수 선생을 제1대 반장으로 추대하였다. 특이한 점은 역문연 주류에서 어느날 비주류가 되어버린 배항섭 선생님을 비롯해서 역문연 내에서도 비주류로 분류되던 연구자들이 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필자는 항상 중립지대에 있었다고 생각하나, 역문연에서 한말 연구자는 어쩔 수 없이 비주류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凡민중사 연구팀’이라는 명칭이다. 당시 총무였던 필자가 제안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전히 운동사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민중이라는 용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딱히 민중운동사가 아니어도 민중사적 관점이나 관심 있는 사람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하자는 취지가 있었다. 그 덕택 때문인지 모임이 결성된 이후 생각 외로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전공, 나이 등을 따지지 않고 모두 함께 했다. 명칭 그대로 ‘凡’을 지향했으며, 민중이라는 고리로 연대해 갔다.

 

 

3. 도약. 민중사반으로 거듭나다 2008년
    2008년 2월 일본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반장이 바뀐 것이다. 도쿄의 어느 선술집 2층에서 참석인원 전원의 옹립으로 이용기 선생이 허수 선생에 이어 제2대 반장이 된 것이다. 이용기 반장 시대를 맞아 민중사반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총무가 잘렸다. 그리고 젊은 친구들이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모임 명칭도 ‘凡’을 떼고 민중사 연구반으로, 그것도 역문연 조직에 정식 등록되었다. '凡'을 떼었다는 것은 연구반 구성원 간에 민중 개념이나 방향에 대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허수 반장 체제에서 “왜 다시 민중사인가?”에 대한 물음과 함께 민중개념에 대해서 끊임없는 논의를 거듭했다. 여전히 구성원 간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80년대 민중사학에 대한 극복과 새로운 민중사에 대한 방향을 모색한다는데 대체로 공감하였다. 


    한편 2009년 12월 개최된 심포지엄은 민중사반이 암중모색하는 지하조직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계에 선 민중, 새로운 민중사를 향하여”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심포지엄은 80~90년대 변혁주체로서 민중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중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 민중사반의 의지를 표명한 자리였다. 특히 ‘경계에 선 민중’에 그동안 민중사반 내부의 치열한 논의를 담아내고자 하였는데, ‘근대와 그 너머의 경계’ ‘지배와 자율의 경계’ 등 단일하게 또는 단정적으로 위치 지울 수 없는 민중 개념을 내포하는 한편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중사를 향해 한발 내딛고자 하는 민중사반의 현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심포지엄은 민중사반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심포지엄 직후 젊은 연구자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소현숙, 한봉석, 김헌주, 문일웅, 이정선, 양지혜, 비욘티노 율리안, 김아람 등 30대 초중반 연구자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향후 세대교체를 예고하였다. 이와 함께 심포지엄 발표 논문을 비롯해서 그동안 민중사반에서 발표된 몇 편의 논문을 모아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새로운 민중사’에 대한 현재 우리의 입장을 체계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해야한다는 부담으로 인해 3여년의 산통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2013년 『민중사를 다시 말한다』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번 단행본이 민중사반의 모든 역량을 담았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현재 민중사반의 문제의식을 충실히 담고자 했다. 단행본 발간 이후 ‘새로운 민중사’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뼈아픈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용기 선생의 표현대로 민중사반은 심포지엄을 통해서 ‘새로운 민중사’를 향한 첫 깃발을 꽂았으며, 단행본 발간은 그 여정을 향해 첫발을 디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진통. 세대교체를 위한 과도기 2014년
    단행본 발간 이후 또다시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번엔 포섭이 아닌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경쟁적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어느새 반원이 30여명을 넘어섰으며, 구성원이 급격하게 젊어졌다. 전공 또한 한말에서 60~70년대까지, 민중운동에서 노동운동까지, 정치사에서 여성사·미술사까지, 뿐만 아니라 역사학을 중심으로 국문학, 사회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과의 연구자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뿐인가! 한국, 일본, 미국, 독일, 캐나다 등 다국적 출신들이 형형색색 다양한 색깔의 성깔들을 풍기면서 북적이고 있다. 이쯤 되면 ‘민중사학’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 대단했던 80년대 어느 연구집단도 민중을 매개로 이렇게 모였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강한 의구심 하나. 분명 90년대 후반부터 민중사는 침체기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21세기 들어 연구자들로부터 외면 받아 왔다고 많은 연구자들이 진단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작금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동안 그 수많은 연구자들의 진단이 틀린 걸까? 아니면 정말 민중사반의 대단한 역할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중사반에 모인 사람들이 외면해 왔던 것은 학부시절부터 강요되었던 민중이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민중사반 구성원들은 현실로부터 외면 받거나 배제를 강요당하고 있는 민중과의 연대를 고민하며 자신의 역할을 찾고자 쓰린 소주를 밤새도록 들이키며 열정을 태우고 있다. 


    2013년 반장이 교체되었다. 이용기 반장의 장기집권체제가 자진해서 붕괴되고, 장용경 선생이 제3대 반장에 옹립되었다. 소위 좌파(?)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민중사반 내부의 대대적인 변화가 예고되었으며, 실제 뭔가 요란스런 기운이 감지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노땅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반장을 중심으로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학번들이 모임의 주축이 되었다. 연구 주제도 ‘민중의 폭력’과 같은 다소 생소한 주제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역시 ‘좌파’는 태생적으로 단일한 대오를 가질 수 없는 DNA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들 비슷하고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이 달랐고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이 닮았다. 형형색색 다들 각자의 성깔을 지니고 그 성깔을 그대로 드러냈다. 정확한 지적일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민중사’에 대한 출발 지점이 서로 달라보였다. 즉, 반장을 비롯해 90년대 초중반까지는 비록 비판적이지만 80년대 민중사에서 출발하고 있었다면, 90년대 후반 소위 ‘신세대’ 연구자들에게 80년대 민중사는 이미 시야에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실에 대한 감수성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매우 다르고, 관심 분야도 매우 다양했다. 


    2014년 12월 총회에서 결국 사건이 발생했다. 신세대들의 반란! 하지만 노땅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신세대’들의 분열 덕택에 반란은 싱겁게 진압(?)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분명해졌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민중사반이 아직은 과거 민중사학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80년대 세대의 향취가 진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총회 사건 이후 쉰세대와 신세대, 그리고 신세대들 간 각각의 차이를 인정하기로 하면서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간혹 삐거덕거리는 소리도 들리지만 반장님을 중심으로 신세대들의 각자 다른 목소리들이 나름 괜찮은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노땅들은 다시 기력이 소진되어 물러나 있다. 앞으로 다가올 신세대들의 시대를 기대와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장용경 반장님의 지휘봉이 언젠가는 힘을 잃겠지만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을 부탁한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민중사반의 작은 역사를 정리했다. 한일교류 등 많은 부분들이 비어 있으나 앞서 정리한 허수, 이용기 선생의 ‘略史’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곧 그동안 한일 교류의 성과물로서 한일공동 저작물이 발간될 예정이다. 일본에서는 작년에 이미 『일한민중사연구의 최전선』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허영란 선생이 곧 발간될 단행본에 한일교류의 여정들을 잘 정리했으니 민중사반과 아민연의 교류는 허영란 선생의 글이 참고가 될 것이다.

 

△한일민중사연구의 최전선은 곧 한국에도 출간될 예정이다.

 

    이번 小史는 역문연 30주년에 맞춰 기획되었기에 되도록 역문연에 기반하여 정리했다. 민중사반이 역문연의 조직이기도 하지만 구성원들은 역문연 연구원이 半, 외부 연구원이 半이다. 역문연 연구원들 또한 비주류적 측면이 다소 있다. 한때 주류가 될 뻔도 했지만 접목이 잘 안된 듯싶다. 그래서인지 가끔 역문연 입장에서는 민중사반이 삐딱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문연의 출발 또한 주류에 대한 삐딱함으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지 않았던가! 어쩌면 민중사반이 역문연의 정통성을 계승한 적통이 아닐지 ‘착각’도 해본다. 고마운 것은 민중사반이 한시도 쉼 없이 역문연의 지원과 격려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민중사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길 바라며 역문연의 30주년을 자축하고자 한다.   

 


 


부록 1. 역대 반장 및 총무와 현재 조직

<역대 반장 및 총무>
2005. 8 ~ 2008. 2 허수-홍동현
2008. 3 ~ 2013. 2 이용기-이홍석(홍동현)
2013. 3 ~   현재  장용경-장미현·이정선(이홍석, 양지혜)

<조직>
반    장 : 장용경
내무총무 : 이정선
외무총무 : 장미현

 


부록 2. 한일 교류의 여정

정리: 허영란(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울산대)

 시점

 발표 내용

 장소

05. 9. 3

<근대이행기 동아시아 민중의 존재양태 비교와 상호관련성 검토를 위한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ㆍ모색기, 한국 ‘민중사’의 현재(허영란)
ㆍ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과제(홍동현)
ㆍ내셔널리즘을 둘러싼 상극

   -1990년대 이후 일본내 역사연구의 동향에 대해서-(檜皮瑞樹)
ㆍ일본에서의 최근 민중사 연구 동향(水村曉人)

 서울

06. 2.11

 <한일 양국의 민중사 연구동향 및 관련 개별연구>
ㆍ최근 한국에서의 ‘민중’ 및 ‘소수자’ 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장용경)
ㆍ일본근현대사연구에서 「민중」ᆞ「주체」의 현재(大川啓)
ㆍ교조신원운동기에 나타난 유교적 측면에 대한 고찰(이경원)
ㆍ전시기(戰時期)의 민중상을 둘러싸고(佐佐木啓)

도쿄 

06. 8.26

 <한국과 일본의 구관조사사업 및 연구현황 개관>
ㆍ조선총독부의 ‘구관’․‘풍속’ 조사에 대하여(허영란)
ㆍ통감부 및 총독부의 「구관조사」에 관한 연구에 대하여(鈴木文)
ㆍ일본의 「구관조사」사업 연구의 현화(檜皮瑞樹)

서울

07. 2. 3

 <한국 구관조사사업 등에 관한 개별 연구>
ㆍ학자-경찰-식민지(佐野智規)
ㆍ일제시기, 식민권력에 의한 ‘契’ 조사사업의 검토(문영주),
ㆍ구관조사자료와 上告사료에 나타나는 권력과 민중의 관계(中西崇)
ㆍ오키나와 현의 구관조사 연구 현상과 전망(高江洲昌哉)

도쿄 

07. 8.25

 <한일 민중사연구자 간의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워크숍>
ㆍ식민지 구관조사의 목적과 실태(허영란)
ㆍ민중사와 역사수정주의 비판(배성준)
ㆍ근대의 민중과 迷信(荻野夏木)
ㆍ炭鑛을 필드로 한 마이너리티 연구의 실천과 가능성에 대하여(佐川享平)

안동

 08. 2.16

ㆍ식민지 구관조사와 식민지 관습(배성준)
ㆍ'아래로부터의 民衆史' 硏究를 위한 하나의 可能性, 近代時機 洞契 硏究(이용기)
ㆍ1894년 鄕村支配層의 東學農民戰爭 認識(홍동현)
ㆍ식민통치ㆍ학문적 지식ㆍ민중 :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조선의 취락』ㆍ『부락제』에서의 안동지역 기술을 사례로(中嶋久人)
ㆍ쇼와(昭和)공황기 지쿠호(筑豊)탄광지역에서의 한일 노동자들의 관계에 대하여(佐川淳平)

도쿄

 09. 2. 1

ㆍ1870년대 유행가를 통해서 본 민중의 문명개화관과 대외관(靑木然)
ㆍ아마미 독립경제를 다시 생각함(高江洲昌哉)
ㆍ1960년대 전반 탄광촌의 현실과 탄광노동자의 대응(이홍석)
ㆍ北朝鮮史에서 民衆史 硏究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신철)

서울

 09. 9.22

 <深谷克己․安在邦夫 선생, 정년 및 고희 기념 워크숍>
ㆍ일본에서의 민중사 연구의 현황: 국민국가론과 신자유주의의 관계 속에서(佐々木 啓)
ㆍ1980-90년대 ‘민중사학’의 형성과 소멸에 대한 연구노트(배성준)
ㆍ18~19세기 일본 민중의 조선관: 淨瑠璃와 歌舞技라는 미디어를 통하여(須田努)

서울 

10. 2.21

ㆍ‘새로운 민중사’의 방향 모색과 민중사반의 포지션(이용기)
ㆍ1950年代 曺奉岩‧進步黨의 ‘피해대중론’과 민중(이홍석)
ㆍ공공권을 둘러싼 이론적 검토–일본 근대에 있어서 공공권의 전개・서설(中嶋久人)
ㆍ근대 일본의 국가와 도덕- 1900년 전후의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을 중심으로(繁田真爾)

도쿄

 11. 1.30

 <1부>
ㆍ‘한국병합’ 100년과 일본사회-2010년의 동향(太田亮吾)
ㆍ‘한국병합’ 100년과 일본사회-국제심포지엄「‘한국병합’ 100년을 묻는다」를 중심으로(田中元曉)
ㆍ신자유주의 시대 역사학의 조건과 민중사의 모색(배성준)
  <2부>
ㆍ19세기 장군 권위의 변질과 민중 : 日光社參을 사례로 하여(椿田有希子)
ㆍ식민지기 지역 주민대회에 대한 검토(한상구)

서울

 12. 2.19

ㆍ식민지기 ‘민중’ 개념(허수)
ㆍ현상의 과제들에 대한 민중사 연구자의 ‘당사자’성 –원자력발전소를 둘러싸고(中嶋久人)
ㆍ공감과 연대의 민중사를 위하여(김아람ㆍ이홍석ㆍ장미현)

도쿄

 13. 2.22

~23

 <1주제 : 한일 양국의 민중사 연구시각과 연구동향 비교>
ㆍ1980년대 이후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사—근대지향을 넘어서(배항섭)
ㆍ1980년대 이후 민중사 연구 동향과 방향전환—인민투쟁사와 민중사상사를 넘어서(須田努)
<2주제 : 마이너리티와 민중사>
ㆍ민중사 연구에서 마이너리티의 문제—폭력 문제를 중심으로(檜皮瑞樹)
ㆍ1925년 형평사 예천 사건과 형평사 해소 논쟁(장용경)
<3주제 : 민중의 다중적 경험의 재현 방법>
ㆍ1890년대 神戶의 항만 노동자와 청국 노동자의 상호 관계와 인식(青木然)
ㆍ총력전과 노동자의 신체 - ‘불량’ 공원의 세계(佐々木啓)
ㆍ식민지기 이혼소송에서 나타난 여성의 행위성과 식민지 젠더정치(소현숙)
ㆍ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의 기억과 역사화-국가사와 지역사의 사이(허영란)

울산 

 14. 2.24

ㆍ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의식에 대한 연구-경상도 예천지역 사례를 중심으로(홍동현)
ㆍ동학농민전쟁 농민군주도층의 유교적 실천윤리(이경원)
ㆍ1960년대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시행과 산재(産災)노동자(장미현)
ㆍ1950년대 한국 정상가족의 형성과 '섹슈얼리티' - 정조담론을 중심으로(한봉석)
ㆍ근대 조선에서의 경찰과 민중(이토 슌스케)
ㆍ민중사 입장에서 다나카 쇼조(田中正造)를 다시 읽는다(中嶋久人)
ㆍ아마미제도(奄美諸島) 의 「주변」형 국민문화의 성립과 전개-그 단서로서(高江洲昌哉)

도쿄 

15. 2.8 

ㆍ식민지기 소수자 연구의 동향과 민중사(소현숙)
ㆍ정신․문화․혈연적 차이, 포섭과 배제의 논리-전시체제기 일본에서의 內鮮結婚混血 문제를 중심으로(이정선)
ㆍ뱌쿠렌 사건(白蓮事件)의 신문 보도에서 보는 1920년대 일본의 '자유'관(아메미야 후미키)
ㆍ戦時期 일본의 지식인론과 그 애로(오타 료고)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