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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5. 16:27 역문연 광장

파주 답사기

김은정

 논밭 메꾼 땅 위에 무언가를 세우고 또는 산을 깎아내며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골내음 물씬 풍기는 곳도 많은 파주가 올해 민중사반 여름 워크숍의 장소가 되었다. 가까워서 좋긴 한데 다들 한 번 씩은 답사로 다녀왔다는 파주에서 더 이상 무얼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는 파주로 향했다.

폭염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던 8월 중순이라 날씨는 무척 더웠다. 총무 역할 맡고 있다고 모인 인원이 적을까 취소 인원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약속된 인원이 다 채워져서 다행이다. 만나기로 한 일시장소는 815일 오후 2시 운정역.

파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10년 이상 파주에서 살았던 까닭에, 나는 운정역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운정역은 금촌역과 일산역 사이에 있던 세모지붕의 작고 작은 간이역이었는데, 아니 운정역이 이렇게 커졌다니. 늦어서 바쁜 와중에 왠지 모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충격적인 운정역을 뒤로 하고 반원들을 만나 첫 번째 답사 장소인 파평 산골에 위치한 평화를 품은 집(평품집)으로 이동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는 평화와 관련된 도서관과 소극장, 자료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근대 이후 발생한, 희생자 수가 30만 명이 넘는 큰 규모의 제노사이드 사건 등을 나라 별로 분류하여 사진과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 전시한 공간인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에서 대부분의 반원들은 가이드 님의 설명과 함께 오랜 시간 머물렀다. 해외와 국내 학살 현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지 관계자와의 협력 속에서의 자료 확보를 통해 이 공간을 구성하는 일이 가능했지만, 특히 연구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가이드 님은 설명을 덧붙였다. 학살 관련 연구자를 찾기 힘들다는 얘기.

학살 관련 자료를 보고 나니 석사과정 때 한국전쟁 당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오래된 사진을 마주한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학살의 기록 앞에서 어느 누가 마음이 가벼울 수 있을까.

제노사이드 전시를 둘러본 반원들은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2016.7.14.~2016.6.15.) 설명에 집중하는 반원들과 전시된 사진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시는 가이드 님. 다들 표정이 심각하다. 광경은 아래와 같다.

본래 여유를 갖고 답사를 진행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답사는 항상 시간이 촉박하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소극장과 예쁘게 꾸며놓은 평화도서관도 구경하고 싶지만, 일단 다음 답사 장소로 서둘러 가야하는 시간이 되었다. 다들 밖으로 나오는 채비를 하는 찰나 홍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무농약 우리밀 빵을 사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속으로 박수를 치며 빵을 하나 얻어 차를 탔다. 파주는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답사 장소 간 이동시간이 만만치 않다. 기본 20분 이상. 평화와 학살의 관계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는 운전자 옆에서 빵을 우걱우걱 먹으며 도착한 곳은 파주 답사를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 곳 중 하나인 칠중성(七中城). 그런데 올라가는 길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앞 차량이 움직이지 않아 차에서 내려 올라가보니 심각한 상황이다. 난관에 직면한 당시 상황은 아래 사진과 같다.

답사 당일 전 왔던 비 때문인지 차바퀴가 움푹 파인 흙길에 빠지고 만 것이다. 몇몇이 바퀴 앞뒤에 돌을 넣다 빼기를 반복하는 등 차를 빼내기 위한 시도를 수차례 반복하며 운전자가 핸들을 요리저리 꺾는 사이 차는 구출되었다, 라고 간단히 쓰고 있지만 긴 시간 동안 다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아반떼의 구출 광경을 돕거나 바라보았다.

안도하며 그러나 더 더워진 것만 같은 날씨를 절감하며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오르니 그곳에 칠중성이 있다.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142m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라고 한다(칠중성 안내판 발췌).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에는 영국군과 중공군이 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삼국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였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임에도 불구하고 뒤로는 감악산, 앞으로는 임진강은 물론 멀리 북녘 땅까지 보이는 곳이자 교통의 요충지가 될 수 있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그 전경.

저기 굽이굽이 흐르는 임진강을 감상하며 파주를 향한 나의 무한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다음 답사지인 적군묘지로 서둘러 이동하였다.

율곡로(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5번지) 어디쯤에 내려 땡볕 속 두렁길 옆을 잠시 걸어가면 적군묘지가 나온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중국군과 북한군, 그 이후에 수습된 북한군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북한군이 있는 1묘역과 북한군과 중국군이 있는 2묘역으로 나누어져있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1묘역을 가보진 못하고 2묘역에서 잠시 머물렀다. 안내판에는 북한군/중국군 묘지로 나와 있다. 도착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니 화강암으로 보이는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위에 북한군, 무명인(이름이 없음) 등이 새겨져있다. 비석들 사이를 걸어보며 저마다의 이유로 죽음에 이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무명인들에게 구천을 헤매지 말고 고향집 들러 좋은 곳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념. 이곳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후에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얻을 요량으로 인터넷에서 적군묘지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니 비석 위쪽을 북을 바라보도록 놓았다고 한다. 지도를 찾아보니 정말 북으로 향하고 있다.

칠중성과 적군묘지를 막상 가보니, 파주에 답사오기로 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곳곳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고 싶은데, 늦었다. 숙소 측과 약속한 시간은커녕 다시 전화해서 잡은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숙소로 가면서 오후 스케줄이 걱정되기 시작.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헤이리예술마을 안에 있는 헤이리 논밭예술학교라는 곳이었다. 주인장에게 예약한 방 세 개를 소개받고 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방 세 개 중 하나는 에어컨이 없었던 것. 그 방에서 처량하게 홀로 우뚝 서있는 청록색 선풍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매우 심란해졌지만 어차피 다들 술 먹고 잘 텐데 에어컨을 켜겠다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그곳에서는 아무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숙소 회의실에서 한숨 돌린 우리는 곧바로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파주 시민이자 이번 답사를 책임진 조형근 선생님의 발표(주제: 계획 없던 공동체의 뜻하지 않은 진화: 파주의 한 마을을 사례로)와 홍종욱 선생님의 토론이 이어졌다. 발표는 파주 지역,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사례인 교하도서관에서의 지역주민활동, 세월호파주시민모임과 파주시민참여연대의 결성 등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토론은 파주 지역공동체 운동의 특성 등을 묻는 몇 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여러 의견과 질문이 오갔다. 공동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소위 북파주남파주의 갈등, 아이들 교육과 집값 문제까지.

예상보다 세미나는 오래 지속되었고, 다들 배가 고파보였지만 쉽사리 밥 먹자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이제 언제나 그렇듯을 붙여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정말 배가 고플 수 있는 8시가 다되었으므로 우리는 세미나를 마무리하고 근처 두부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뒤 술과 안주를 곁들여 뒷풀이를 즐기거나 전투적으로 보냈다. 중간에는 지척에 사시는 이이화 선생님이 방문하셨다. 마침 선생님의 생신이라 하여 케이크를 사와 촛불도 켜고 노래도 불러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다른 사람이 끓여주는 맛있는 라면을 먹고 남은 일정을 시작하였다. 우리가 찾은 곳은 파주시청 건너편에 위치한 성공회 파주이주노동자센터 샬롬의집. 도착하니 신부님이 시원한 커피와 함께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래 샬롬의집은 고양시에서 지원을 받으며 일산에서 운영되었으나, 이주 노동자가 많은 파주로 옮겨왔다고 한다. 예전부터 파주에는 이주 노동자가 많았다. 현재 파주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은 13,000명이 넘는다고 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산업연수생 제도가 폐지되고 고용허가제로 대체되면서 한국 이주 노동자 정책은 변화하였지만 그 제도는 한국인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는 점, 외국인 노동력의 단기 활용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 등이 이주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문제임을 신부님의 설명을 통해 이해하며 나는 잠시 옛날 생각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우리 동네 두부공장에서 일하던 방글라데시 사람과, 일산 가는 길에 있던 비닐하우스에서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마늘을 뽑던 가나(기니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 사람들이 밤낮없이 일만 한다는 얘기를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아빠는 나에게 얘기해주곤 했다.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 파주까지 온 게 신기했고, 그리고 조금 더 컸을 무렵 그 방글라데시 사람이 나에게 한국말로 뭔가를 얘기했을 때 도망쳤다. 부끄러운 기억.

기억을 밀어내고 다시 신부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니 이곳에서는 임금체불이나 재해, 직장 이직 등에 관련된 노동 상담 외에 건강 상담 등 의료지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외에도 한국어교육 등 각종 문화행사가 때때로 열린다고 한다. 특히 봉사활동 차 찾아오는 중고등학생들로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의 지역주민으로서의 관계 정립을 위한 활동에 대한 아이디어 등을 듣기도 하고 때때로 중고등학생들이 그러한 아이디어들을 직접 실천한다는데, 신부님은 매우 뿌듯한 얼굴로 설명하신다.

샬롬의집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다시 교하로 향했다. 교하 주택단지에 지역 주민을 위해 마련된 마당이라는 공간이 있다고 해서, 잠시 들러보기로 하였다. ‘마당에도 신부님이 계셔서 잠시 자리에 앉아 마련해주신 다과와 담소를 나누었다. 이곳의 정체성이 궁금하여 마당 브로셔를 살펴보니 소개 글에 치유와 회복을 위한 마을 소통 공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모임이나 휴식 공간 등으로 쓸 수 있다고 한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어느 동네에나 쉽게 생길 수 있는 공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마당을 나섰다.

그나저나 교하가 이렇게 변하다니, 이제 교하에 와서 교하 쌀떠올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교하는 행정 구역 상으로는 파주시에 속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파주에서 분가한, 파주와는 다른 곳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말 다르다. 여기가 파주라니.

 

생각보다 매우 맛있었던 만두전골을 먹으며 답사는 마무리 되었다.

 

사진: 김세림, 김아람 제공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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