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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광장

[집담회] 젊은 역사학자들, 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 그 1/3.

 

[집담회]

젊은 역사학자들, 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

 

일시: 2015313() 19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참석: 김헌주(고려대), 백승덕(한양대), 전영욱(서울시립대), 최우석(성균관대)

 

일러두기

1. 이 글의 토대가 된 집담회는 평소 『제국의 위안부』(뿌리와 이파리, 2013)에 비판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던 4명의 젊은 연구자가 자유로운 토론을 위해 소집한 것으로 2015313일에 열렸다.

2. 집담회는 김헌주, 백승덕, 전영욱, 최우석이 각자가 생각하는 논쟁거리를 사전에 정리하여 공유한 후, 당일 이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3. 녹취록은 전영욱이 작성하였고, 이를 4명이 공통으로 검독한 후 주제별로 재정리하였다. 각 꼭지의 제목은 내용에 따라 새롭게 붙였다.

4. 집담회 중 제시되는 이미지는 4명이 논의하여 선택했다.

5. 본 내용은 역사문제연구 33호에 실린 것과 동일함을 밝힌다.

   


 

 

 

다시 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

 

전영욱 : 안녕하세요. 오늘 제국의 위안부(이하 『위안부) 집담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를 포함해서 여기 계신 3명은 이미 작년 623일에 작은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어요. 당시 모임의 목적은 꽤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해보자 라는 소박한 것이기도 했고, 사회적인 논쟁에 참여해보자 라는 거창한 것이기도 했는데, 이야기를 정리해보니까 이미 시의성이 적어지기도 했고, 대화의 내용 자체도 내세울 만한 것 같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서 그냥 접기로 했죠. 이후에 이 대화를 사실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다시 화제가 되었고, 논쟁도 예전보다 첨예해져서 이전 모임에 대한 기억이 다시 생겼어요. 어쨌든 여러 논쟁들을 보면서, 지식인 또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 고민을 각자 공유하고 있다가 이럴 바에는 다시 모임을 갖자고 제의를 했고 오늘 모임이 성사된 겁니다.

  오늘 대화는 『위안부』를 둘러싼 갖가지 상황들에 대한 고민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모임에서 한 번 얼기설기 진행한 바가 있으니까 오늘 모임에서는 텍스트의 환기라는 맥락에서 이야기를 해 보고, 더 나아가서는 여성학의 지평을 비교한다거나 이 상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의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또는 역사학의 역할이나 기능 등, 어쨌든 각자가 생각하고 있던 논점들을 하나하나 제기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면 되겠죠. 일단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김헌주 : 고려대 박사수료 김헌주입니다. 2012년부터 진행했던 위안부 프로젝트 때문에 위안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눔의 집에서 2013년 초에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유품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한 할머니가 자신의 옷가지를 깨끗하게 정리했던 것이 인상에 남네요. 또 여름에는 마산 지역에 가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뵈기도 했고요. 그래서 정서적으로 좀 민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유하(이하 저자’)도 지적했지만, 정대협의 운동 방식에 약간은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정대협의 운동이 쌓아올린 성과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가 비판적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이 책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도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논문을 썼고,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기 전에는 부당하게 탄압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많은 문제를 느꼈고, 동시에 이 책을 둘러싼 상황을 보면서 두 가지 면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인의 서술 범위는 때로 권력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서술 범위,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하는 문제가 하나고요. 다른 하나는 이 책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식민주의가 소거된 민족주의 비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해방적이고 진보적인 문제의식이 없는 민족주의 비판이 얼마나 위험할까 하는 것이었어요. 역으로 저 자신을 반성할 수 있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백승덕 : 저는 백승덕입니다. 다들 한국사를 하시는데, 저는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20138월에 애인이 보자고 해서 권효 감독의 <그리고 싶은 것>을 우연히 봤거든요. 그때만 해도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 안 하고 버티고 있어서 그렇지, 이미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을 부끄럽게 만든 영화였어요. 이 영화는 한일 양쪽이 서로가 지배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사이에서 위안부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곤혹스럽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다시 공부해야겠단 생각을 했고 이 책도 출간 소식을 듣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이 책이 제시할 이야기가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읽어보니 별로 동의할 수 없더라고요. 왜 거부감이 드는지 고민하던 차에 책의 서술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인터넷 언론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청탁했기에 그러한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기고했습니다.

 

최우석 : 저는 성균관대 박사수료 최우석입니다. 저도 위안부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었어요. 그러던 중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년 전 역사문제연구소 평화기행 마지막 일정으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방문하면서부터입니다. 『위안부에 대한 이슈가 터지고나서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와 별개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맨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겠고, 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는지도 알 것 같다는 평가를 했었는데, 다시 읽고나니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많아서 예전보다 더욱 비판적으로 바뀌었어요. 이것이 저자의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본인이 해석하고자 하는 방향성에 상을 맞추기 위해 해석한 측면이 많다고 생각해요. 또 저자가 정말 언어를 다루는 학자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를테면 수많은 역접을 통해 수많은 안전장치를 했죠. 그럼에도 개념 활용이 폭력적이고 신중하지 못합니다 반면교사가 되는 것 같아요.

 

 

전영욱 : 저는 서울시립대 박사수료 전영욱입니다. 저는 식민지시기를 공부하는데, 그 중에서도 그 시기의 법에 관심이 많아요. 소위 근대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오늘 날의 법체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중이죠. 그렇지만 법의 속살까지 공부를 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식민지기 법사가 제도사에서 머무르고 있는 지형을 비판하고, 정치사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하고 있어요. 나중에 식민지기 사람들의 삶을 법을 토대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요. 어쨌든 이런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을 틈틈이 읽고 있고, 저자의 책 역시 그런 책읽기의 일환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대를 하며 읽었습니다. 이 책이 젠더사를 추구했다고 선전이 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순결한 민족으로 표상되던 위안부를 어떻게 해석했을까가 궁금했는데, 다 읽고 보니 이런 감상이 들어요. 막연하게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상대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상대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각자의 소개는 이렇게 끝내고, 논지를 시작하는 차원에서 우선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죠.

 

 

식민성비판 없는 여성주의

 

최우석 : 다시 읽으면서 첫 장이 저자의 논지에서는 절대 바뀔 수 없는 부분이고, 이를 토대로 모든 논리가 다 진행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제연행이 없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그것의 근거를 포주, 업자가 데리고 간 것으로 제시하죠. 이 전제가 있기 때문에 뒤의 법적 책임 문제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거고, 정대협 등의 지원단체의 요구가 너무 과도한 것이며,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 수준의 보상이 일본의 최선이었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때문에 다시 한 번 문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포주라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을 의미화하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 책에서 다루는 포주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이하 『증언집[각주:1])을 통해 등장하는데, 증언집에서 등장한다는 것은 위안부와 포주 관계를 바라볼 때는 적절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자는 업자와 군의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연결고리를 절대 추적하지 않으려고 하죠. 그러니까 당연히 업자만 문제의 실질적인 책임자이고, 군은 구조적 책임자, 따라서 일본 제국은 구조적 책임자, 이런 식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자가 구조적 책임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우리가 이해하는 그것과는 다르게 사용해요.

 

백승덕 : 책임을 너무 추상화한다고 할까요? 사실 일본 정부에 구조적 책임을 묻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전후 일본을 과거 제국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죠.

 

최우석 : 법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업자는 범죄자이고, 구조를 제시한 군이나 국가는 죄를 지은 것으로 표현하면서 법적인 책임은 업자, 도의적 책임은 국가로 구분하고 있어요.

 

김헌주 :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이해되지 않는 서술은 이런 것입니다. 이 책은 한국의 가부장제를 비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포주를 등장시키는데, 이때의 포주는 한국인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일본인 포주의 비율이 최소한 50%이거나 그 이상이에요. 물론 이 일본인 포주도 민간인이죠. 그러나 그들이 들어왔던 맥락이 식민주의적인데, 이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는단 말이죠.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왜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또 한 가지는 이 사람이 동원의 문제를 얼마나 나이브하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존 연구에서 위안부 동원의 문제는 협의의 동원이 아니라 광의의 동원을 문제시하죠. 그런데 물론 센다의 책에 나오는 업자처럼 이 직접 업자에게 위안부 모집을 의뢰한 경우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기나 유인까지 해가면서 마구잡이로 끌어오라고 지시했다는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마구잡이로 모집하는 것을 금지한 자료라면 존재한다”(25)고 하면서 그 다음 페이지에 자료를 제시하는데, 하지만 이 자료야말로 광의적 동원의 증거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최근의 연구에서, 예를 들어 식민지 수탈론에 서 있는 연구자라도 일본이 무조건 끌고 갔다고 이야기하는 수준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대중들의 생각이 수탈론적이라고 해서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데, 도대체 어느 쪽을 겨누고 있는지 애매합니다. 대중서인지, 연구서인지 포지션이 애매해요.

 

최우석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www.hermuseum.go.kr)에 올라온 자료 중에 『일본군 위안부증언 통계 자료집이 있어요. 위안소 주인 중 29.2%가 일본인 민간인, 조선인 민간인이 17.7%, 모르겠다가 33.9%, 부대가 16.6%로 나오는데, 부대와 일본인이 거의 50%에 가까운 것이죠. 가장 낮은 단계에 있던 위안부들은 50%가 일본인과 군이 직접 관여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거죠. 이것을 무시합니다. 따라서 조선인 업자가 더 많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위안부 광고가 실린 문제도 마찬가지에요. 저자는 이것이 공개적이라는 점에서 강제연행이 아니라고 하는데, 당대에 이 두 신문에 광고를 실을 수 있는 존재가 누구냐 라는 첫 번째 문제가 있고, 이 신문을 볼 대상이 누구냐 하는 두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고려했을 때 이 광고를 여성들, 위안부 모집에 실질적으로 응할 사람이 본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죠. 오히려 위안부 모집을 할 사람들이 보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위안부 모집을 해 달라고 지역에 광고를 하는 것이지 이 조건을 보고 여성에게 직접 오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 신문을 주로 보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유지, 촌장, 면장 이런 사람이나 브로커일 거예요. 1920년대에도 노동자를 일본으로 데려가는 브로커들 굉장히 많았거든요. 이런 맥락이 20년대, 30년대, 40년대로 똑같은 구조로 전이되는 것이고, 이것이 전시체제기가 되면 󰡔경성일보󰡕󰡔매일신보󰡕를 통해 드러난 것뿐인데, 이것을 저자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또 특이한 것은 광고를 보면 연령 18세 이상 30세 이하, 17세 이상 22세 이하 이런 식으로 나오고, 행선지도 군부대에요. 사실 나이도 저자가 부정하는 이른바 소녀에 가깝죠. 정대협이 소녀상을 세운 것이 소녀를 끌고 갔다는 이미지 뿐 아니라, 성적으로 유린당했다는 의미도 있죠. 다시 말해 위안부 이전의 존재로서, 소녀를 내세운 거예요. 위안부는 소녀가 아니었다는 식의 비판은 부적절한 거죠.

 

백승덕 : 저자가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녀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성녀만 보호받아야 한다는 가부장주의의 시각을 비판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위안부 스스로가 충분히 판단하고 자원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 같아요. ‘여성은 성녀 아니면 악녀라는 가부장주의 인식구도를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저자는 지원, 자원, 합의 등을 강조하려고 이야기하려는 듯이 느껴져요.

 

김헌주 :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서 여성주의를 이용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백승덕 : 심하게 이야기하면, 저자의 여성주의 관점은 현 정부의 여성부와 비슷한 입장에만 머물고만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부르주아 여성들의 성과 노동력만 보호하는, 심지어는 제1세계 부르주아 여성들이 제3세계나 식민지 여성들의 위치나 경험마저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는 식민주의가 빠진 여성주의라는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저자는 식민지 경험을 강조해요. 한국사회에서는 한 번도 식민지 경험을 직시한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본인만 식민지 경험을 직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근거도 없고 관점도 문제죠.

 

 

동지적 관계라는 명명의 불편함

 

최우석 : 저자가 식민지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식민지 경험 속에서 협력했던 것이라든가 구조적 존재를 다시 보고 우리 스스로 반성을 하고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 포커스일 것입니다. 그런데 위안부 경험을 했던 사람들한테 이런 반성과 비판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는데도 저자는 이 비판을 그녀들에게 집중하죠. 예를 들어 “70세가 되어가도록 과거의, 전 인생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다면, 그건 과거의 상처가 깊어서라기보다는 상처를 직시하고 넘어서는 용기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혹은 우리가 아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보듬는 자신에 대한 사랑 대신 타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더 큰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34)는 표현처럼요. 용기의 부족, 미성숙 등으로 몰아세우고 있어요.

 

백승덕 : 본인이 위안부의 경험을 대변하고 있다는 거죠. 이런 식의 서술이 왜 자꾸 반복하는가, 그것은 결국 저자가 취하고 있는 관점이나 입장 때문일 텐데, “그런데도 다른 나라에서는 기억되고 있는 이런 사실들이 우리 안에서는 공적 기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식민지의 현실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90)라는 구절에서도 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있어요. 조선인을 제국 내 두 번째 위치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같은 위치의 주체처럼 이야기하는 거죠. 식민지 내부의 위계를 고려하지 않다보니 제국은 이야기하지만 식민지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두 번째 위치는 매우 애매한 위치죠. 이 애매함이 갖는 독특함을 지워버리니까 제국의 책임을 아무도 묻지 못하는, 말 그대로 예전에 존재했던 제국은 지금 사라진 것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죠. 한국도 제국의 일원이었으니까 책임을 균질적으로 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최우석 :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비동등성인 것 같아요. 사실 한국전쟁 때 경영했던 위안소의 위안부는 ‘5종 보급품이라 불렸어요. 이런 관념이 식민지기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맥락에서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김헌주 : 동지적 관계를 저자가 발견한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제국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하죠.

 

전영욱 : 이 책의 가장 큰 모순이라고 느꼈던 부분인데요. 이 책의 문제의식은 민족의 이름으로 단일한 표상이 되어버린 위안부들을 개인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일 텐데, 만약 이 책을 여성사 연구의 일환으로 위치시킬 수 있다면, 저자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논증한 다음에 하는 일이 참 이상하죠. 이렇게 돌려놓은 개인들을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위해 동원하고 있거든요. 이는 지금까지 여성주의가 쌓아왔던 많은 업적들을 모조리 무너뜨리는 모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이야기지만 이 지점에서 한국의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왜 이 책을 상찬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최우석 : 화해가 일어날 것이라고 저자가 생각하는 순간은 대통령과 총리가 만나는 순간이예요. 하지만 이럴 경우 당사자의 입장은 다시 한 번 소거되는 것이죠. 작년 세월호 문제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의원이 유가족들의 의견을 배제했던 행동처럼 말이죠.

 

백승덕 : 저자의 입장에서만 읽어보면 군인과 위안부 사이에 연애로 표상되는 동지적 관계라는 것은 결국 둘 다 애국하는 국민으로서 자기 정체화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건데, 이로써 제국을 상위에 두고 군인과 위안부가 같은 위치에 놓이는 삼각 구도가 등장하죠. 군인과 위안부는 제국에 대해서는 동등하다는 겁니다. 애국을 한다는 면에서 동지이니까요.

 

전영욱 : 프레시안 인터뷰를 보면 저자는 동지적 관계에 대해 오히려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책에서는 군인과 위안부의 관계가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제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국민으로서의 남성, 국민으로서의 여성이 갖는 역할이 무엇인지가 질문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답이 군인과 위안이었다고 말하죠. 다시 말해 싸우고 위안한다는 이 두 가지의 행위를 수행했다는 측면에서 양자는 국민이었고 동지였다는 것, 더 나아가 제국의 국민이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우석 : 그렇게 봤을 때 남녀의 관계, 군인과 위안부 간에 설정된 관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 같고, 이보다 더 문제인 것은 위안부와 동지적 관계인 군인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면서 그 대척점으로 포주를 등장시킨다는 점이예요. 포주는 폭력을 가하고, 강제노동을 가하고, 돈을 갈취하고, 인신매매를 하는 존재라면 군인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식으로 구분이 되거든요. 군인 개개인에 대한 인식과 군이라는 단위에 대한 인식이 달라야 하는데, 이를 연결시켜놓고 책임에서 군을 빼버리죠.

 

전영욱 : 이런 면에서 또 모순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은 읽기가 굉장히 피곤한 책이지만, 반면에 읽으면 읽을수록 모순을 발견하는 게 너무나 쉬운 책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저자는 스스로를 젠더사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하는데요. 사학사적으로 젠더사가 가장 중시했던 것은 여성을 남성이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만 등장시키는 것을 비판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동지적 관계에 있어 군인과 위안부의 관계는 군인이 위안부를 보호하는 것이거든요. 다시 말해 국가가 여성을 보호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페미니즘에서 가장 배격하려는 이미지 중 하나였던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동지적 관계에서 양자가 국민으로서 동등하다고 일컬어지는 순간에 국가-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남자국민’-‘여자국민이 있게 되고, 둘 사이는 기본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제국이라는 것을 해체하지 않은 상태에서 둘 사이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겁니다.

 

백승덕 : 이런 생각도 듭니다. 유사 정상가족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자의 상상에서 전장의 위안소는 유사 정상가족 모델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현모양처와 정상가족이 존재한다면, 전장에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모델이 있다는 것 같아요. 저자의 묘사에 따르면 위안소는 너무나 평화로워요. 그런 면에서 저자의 가장 큰 문제는 대문자 아버지인 국가에 대한 비판이 너무나 없다는 것이죠. 남성의 추상적인 상징이 결국에는 국가가 될 텐데, 거대한 페니스는 절대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낭만화하고 있거든요. 베네딕트 엔더슨은 민족주의가 이기주의와 달리 자기의 이익과 배반되는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성스러운 모습이 민족주의에 대한 숭고함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하는데, 저자의 서술 방식이 그런 것 같아요. 낭만주의를 서술 저변에 강하게 깔고 있죠.

 

김헌주 : 그런 면에서 33쪽의 이미지는 너무나 의도적이에요. 그래서 매우 불편했습니다. ‘20만 명의 위안부, 하루에 수십 명씩 손님을 받았다는 이미지가 과장되었다. 실제로는 20만 명보다 훨씬 적은 숫자이고 손님도 3~4명에 불과했으며 그들은 때로는 연애도 하는 존재였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대목에서 이 사진이 나오거든요. 이 의도는 누가 봐도 명백하지 않을까요? 이런 방식이 너무 불편했고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웃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

(출전 : 『제국의 위안부』33쪽)

 

전영욱 : 텍스트 곳곳에 서술의 비겁함들이 산재하고 있어요. 이에 대해서는 메이지대학의 정영환 교수가 잘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각주:2]

 

  

박유하 교수의 위안부 재현과 배제의 정치

 

백승덕 : 젠더사와 포스트식민주의의 비판이 겹쳐 있는 것 중에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은 어떻게 재현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죠. 그간 들리지 않았던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저자는 이를 다루고자 하면서 본인이 그 재현되지 않은 서발턴인 위안부를 재현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러한 접근이야말로 서발턴 연구자들의 방법론에서 가장 조심하는 것이죠. 저자는 여성이자 지식인이고 준주변부의 대학교수인데, 그녀가 지금껏 재현되지 않았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말을 본인이 영매 역할을 하겠다고 하면서 한껏 하얀 이를 드러내고 행복해하는 위안부의 사진 속 이미지가 진짜고, 소녀상으로 대표되어 정대협이나 나눔의 집과 함께 하고 있는 할머니들은 권력화된 할머니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런 식으로 구별하면서 지금까지 재현되지 않았던 할머니들의 경험을 대변한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나 젠더사가 가장 비판하려는 접근법입니다.

 

김헌주 : 제가 희화화시키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자는 지금 자기 자신이야말로 서발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백승덕 : 사실 저자를 바라보며 우리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서발턴 연구자들이 풀어야 하는 아포리아이기도 한 것 같아요. 1세계에서 성공한 여성들이나 심지어 오바마처럼 주류에 속한 흑인 등도 서발턴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모호함 때문이죠. 저자가 그렇게 주장했을 때 서발턴 연구자들은 과연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부터 우리의 질문이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헌주 : 모두가 서발턴이라는 식으로 가서는 안 되겠죠. 그렇게 되면 원래의 문제의식이었던 소외된 주체에 대한 재현이라는 것이 너무나 흐려질 여지가 있으니까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국면에서 저자가 자기 자신을 서발턴이라고 인식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규정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백승덕 : 이 책을 비판하면서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역사학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물음인데, 여기에는 아직 답이 없는 것 같아요. 당사자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죠. 저자는 당사자는 지금 나눔의 집에 있는 할머니들이 아니라 자기가 접한, 자기가 알고 있는, 국민기금을 받았지만 말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당사자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관점이 일단 점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사자를 어떻게 재현할 것이냐 할 때 저자처럼 동지적 관계로 재현하고 이런 성격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짜 모습이라고 하는 식의 서술방법이 가장 큰 문제인데, 역사학도 이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전영욱 : 실증주의 역사학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일 수도 있죠. 진실을 대변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순결한 소녀로 고착화된 위안부상을 각각의 개인으로 돌려놓아야겠다는 문제의식은 명제만 놓고 봤을 때는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명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겠죠. 책을 통해 유추하건대, 저자는 위안부가 민족에서 개인으로 돌아갔을 때의 파급효과는 거의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늘날 사회구성원의 정체성 속에서 민족개인이 완전히 구별될 수 있다는 무심한 사고방식도 그렇고요. 위안부 할머니들이 말 그대로 개인이었을 때는 망각된 존재였다는 역사적 감수성의 부재도 그렇고요. 현실 세계에서 할머니들을 무턱대고 개인으로 호명했을 때 부각될 수 있는 폭력들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역사가 복수화(複數化)’된다는 것은 일견 좋은 일이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의식이기도 하죠.

 

백승덕 : 그런데 저자가 집단 주체를 제국의 위안부란 개념으로 재구성할 때 배제하는 위안부 생존자들이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죠. 저자도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집단 주체를 설정할 때 언제나 배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서 나눔의 집에서 활동하고 증언하는 생존자들을 배제하니까 깔끔한 집단 주체가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저자는 위안부 피해자 개별의 얼굴을 다 드러내야 한다고 하지만 수요집회에서 참여하고 있는 할머니들은 배제하고 있습니다.

 

전영욱 : 배제라는 것은 이 책의 숨은 키워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배제가 전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최우석 : 지속적으로 이분법적인 글쓰기를 하니 배제가 등장하는 것 같아요.

 

김헌주 : 흥미로운 것은 정대협을 좋아하는 다수의 위안부 할머니를 배제하고, 다수의 일본인 포주를 배제하고, 다수의 폭력적이었던 일본인 군인들을 배제해 버린다는 겁니다. 소수를 가지고 다수를 배제하고 있어요.

 

백승덕 : 그러니까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제가 왜 이 책에 관심이 있었냐 하면, 저는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을 공부하니까 제가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건데, (웃음) 오히려 제가 조심해야 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보이더라고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라는 것도 워낙 방대한 범주로 이름을 붙여서 문제이지만, 예컨대 이런 것도 있을 것 같거든요. 예전에 한참 유목주의가 뜰 때 문화연구 중 어떤 것들은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보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노마드다’ ‘몇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니까 굉장히 탈주를 하더라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이것은 정말 몇 사람들의 사례만 가지고 보편화하는 거잖아요. 이런 식의 부풀리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굉장히 문제일 수 있는 거죠. 이 사람들이야말로 여태껏 민족이나 계급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집단이라고 하면서 일반화하는……. 저자의 문제도 이런 것 같아요.

 

전영욱 : 이를테면 정대협이 정신대와 위안부를 의도적으로 혼동했다는 점을 그 단체의 정치성이라면서 비판하는데, 사실 일본의 전쟁 범죄나 책임 문제가 위안부에 치중되거나 국한되어서는 안 되죠. 이렇게 되면 또 배제가 발생해요. 저자가 정대협을 이런 방식으로 비판하면서 배제하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은 정신대라는 큰 범주 안에서 위안부를 제외한 나머지, 강제징용된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 거죠. 저자의 시각에 그런 사람들이 놓일 자리는 없어지죠. 동원이나 징용이라는 개념 전체 속에서 위안부를 바라 볼 필요도 있는 건데…….

 

백승덕 : 저자가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가, ‘저자가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이런 제목으로 하나의 글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헌주 : 연결되는 이야기일 수 있어요. 저자가 배제하는 사람들을 알려면 저자가 관계 맺는 기준을 보면 돼요. 사실 기준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역설인데, 기준이 없거든요. 저자의 문제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느꼈던 사건이 있습니다. 작년 세월호 논쟁이 한창일 때 SNS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자기는 항상 진보에 가깝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뉴라이트 성향의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개체화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민족주의 비판을 받아들여요. 또한 상당히 극우적인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저자를 옹호하는 것도 받아들여요. 예컨대 『조선일보』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너무 꼴통이라서 저자나 문창극 같은 제대로 된 지식인을 몰라본다는 취지의 사설을 썼어요. 그런 걸 누가 인용해서 저자 SNS에 링크를 걸었더니 그것 또한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저자가 배제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자기가 연합하고자 하는 대상은 자신의 이야기를 긍정해주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깜짝 놀랐었죠.

 

(2/3에 계속)

 

  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은 한국정신대문제협의회와 정신대연구회(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 편으로 1993년에 1권이 나왔고 2001년에 5권까지 발간했다. [본문으로]
  2. 메이지학원대학 부교수 정영환(鄭栄桓)은 2014년 6월 21일부터 2015년 2월 25일 사이에 총 7회에 걸쳐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해(朴裕河 󰡔帝国の慰安婦󰡕の「方法」について)’라는 제목으로 󰡔위안부󰡕를 비판했다. (정영환 개인 블로그 日朝国交「正常化」と植民地支配責任(http://kscykscy.exblog.jp/)) 이에 대해 박유하가 자신의 SNS 계정에 ‘나의 “방법”’이란 제목의 짤막한 반론을 올렸으며(2015년 2월 28일), 정영환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에 대해 재반론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