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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9. 08:52 역문연 광장

 

위 그림 출처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http://sewolho416.org/3910)입니다.

저자 의도와 별개로 블로그 편집자가 가져왔음을 알려드립니다.


세월호 사건의 고통을 함께한 안산 방문기

고려대 임동현

 

  2월 9일 아시아민중사연구회와 함께하는 학술대회의 마지막 일정으로 안산답사를 떠났다. 안산시는 일제시기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안산, 시흥, 과천군이 합처져 시흥군이 되었다. 현재의 안산지역은 시흥군 수암면과 군자면으로 편제되었다. 1970년대만 해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은 반월이었다. 하지만 반월공업도시 기공식에 참여했던 국회의원 오학진(吳學鎭)이 반월이라는 명칭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반월이라는 명칭이 일제가 임의로 만든 명칭이고, 역사와 유래가 있는 안산으로 명칭을 바꾸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결국 수차례의 청원 결과 정부에서는 1986년 반월지구의 명칭을 안산시로 바꾸었다.

 

  공업도시로 성장한 안산시는 1988년 현재 인구의 85.5%가 40세미만으로 구성된 젊은 노동자 도시였다. 1990년대 말부터는 아시아 각국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2011년 현재 이주노동자들의 인구비중이 전체인구의 6.5%를 차지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외국인이 많은 도시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아파트와 전철 노선 건설로 젊은 연령의 중간 소득 계층 가구의 이주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안산으로 답사를 간 이유는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안산의 도시적 특징은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적다. 하지만 재난사고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상층계층보다는 노동자를 포함한 하층계급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이 노동자의 도시 안산시민들에게 벌어진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아파서 찾아간 병원 로비 티비에서 속보로 세월호 사건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티비 속 배는 1/3정도 기울어진 상황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당시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티비에 영상이 나온다는 것은 주변에 이미 구조대가 출동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스의 어조도 심각하지 않았다. 여타 있는 해난사고처럼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 뉴스 속보로 배에 타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잊지 못할 4월 16일이 시작되었다. 급격히 감소하는 구조자의 수, 증가하는 실종자의 수, 아니 아예 파악되지 조차 못하는 피해자의 숫자들. 사건이 일어난지 몇시간이 지났지만 정확한 상황파악 조차 하지못한 체 이루어지는 정부조치들.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 학생들의 면전에 폭력적으로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 보험료를 계산하는 언론. 사건이 일어난 팽목항에서 사진 찍고 인증하기 바빴던 정치인들. 그렇게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304명이라는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면서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버스는 어느새 안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첫 목적지는 416기억저장소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3곳의 단체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기록을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기록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세월호 추모기록 자원봉사단이었다. 이 세 단체가 합쳐지면서 현재의 416기억저장소가 탄생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7월부터 피해자 가족들은 기억투쟁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하늘로 간 수학여행, 아이들 휴대폰 미공개영상 공개, 416TV 제작 등이 그것이었다. 현재 416기억저장소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은 1000여박스이다. 현재 직면한 문제는 어떻게 이 기록물을 영구보존할 것인가와 어떻게 각종 학계에 제공할것인가하는 문제라고 했다.

 

  416기억저장소는 기억국, 교육문화국, 공동체사업국으로 구성되어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억국은 기록물 수집 관리를, 교육문화국은 시민소통, 전시, 예술활동 등을 맡아서 하고 있으며, 공동체사업국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416기억저장소가 위치해있는 고잔동에만 81명의 아이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많은 가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고통을 잊고자 마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런 분들이 함께 마을에서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체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1호관은 사무실 겸 사랑방으로, 2호관은 현재 건설 중인데 40여평의 공간으로 304명의 기록물을 배치해서 전시와 교육을 담당하려고 하고 있다. 3호관은 문화예술전당으로 기획하고 있고 예술가들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4호관은 서고인데 모아진 기록물들로 채우려고 하고 있다. 완성시점은 3년을 예상한다고 했다.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님의 설명이 끝나고, 간단한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현재 수집하고 있는 자료는 크게 3부류인데, 첫 번째가 진실과 정의에 관한 자료이다. 이 자료들은 정부가 가진 자료를 비롯해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공적인 자료들이다. 자료들은 진상조사위원회에 넘기고 있다고 했다. 두 번째는 가족, 시민들의 흔적에 관한 자료이다. 그 대표적인 자료로 진도체육관, 청운동, 광화문 등지에서 투쟁할 때 사용하셨던 이불을 말씀해주셨다. 이불은 단순한 침구류가 아니었다. 그 이불속에서 삭혀야했던 슬픔, 고통, 피눈물, 그리고 분노. 길고 길었던 투쟁의 과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설명해주셨다. 마지막은 희생당한 학생들의 기록이다. 학생들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4인1조로 집집마다 방문해서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집한 자료를 우리에게 공개해주셨다. 평범한 여고생의 물건들. 교과서, 노트, 교복. 특색 하나 없는 일반적인 여고생의 물건들이었다. 이 평범성이 오히려 이 참사의 고통을 더 크게 보여주었다. 이 사업은 길게 10년 정도,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416기억저장소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국가가 아닌 시민의 힘으로 운영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민간기록보관소로써 가지는 의미가 매우 크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운영에 피해자 가족분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세월호 사건에 국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진상규명의 목소리도, 사건의 기록보관조차 모두 피해자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놀랄뿐이었다.

 

  같이 오신 아시아민중연구회 선생님께서 일본의 동북대지진을 이야기하시면서 일본의 대지진 피해자들과 세월호 피해자들과의 교류나 연대를 생각하고 계신지 질문을 하셨다. 사무국장님께서도 일본과의 교류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렸다. 국제적인 연대는 거창한 이념이나 정치적 맥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동일한 고통과 슬픔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국제적인 연대가 출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416기억저장소에서 간담회를 마치고 단원고로 향했다. 단원고는 그렇게 큰 학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작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우리는 생존자 가족 대표분을 만났다. 세월호 사건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는 총75명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아이들은 다행히 죽음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극심한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생존자 가족 대표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를 신기하듯이 바라보는 여고생들이 지나갔다. 단원고 안으로 들어가던 그 학생들의 눈에 비친 우리는 어떠한 모습이였을까? 불청객. 고마운 위로객, 아니면 그저 아무도 아니였을까.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은 2학년들이었다. 2학년 교실은 3층부터 2층에 걸쳐있었다. 3층부터 1반이 시작되는 구조였다.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가 1반교실로 들어갔다. 1반은 침수가 가장 먼저 시작된 반으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은 학생들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편에 있던 학생들은 그런 상황도 모른체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만 믿고 방안에서 대기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10반에서 살아남은 학생은 단 1명이라고 했다.

 

  교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복도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과 자보들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먹먹한 감정을 느꼈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 감정은 눈물이 되어 흘러넘쳤다. 점심의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교실 안에는 많은 꽃과 작은 화분들,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요즘 유행하는 과자, 학생들이 생전에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는 귀여운 인형과 장난감, 이쁜 액자에 담긴 학생들의 사진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실안은 매우 이뻤다. 그래서 더욱더 참혹했다. 뒷반으로 갈수록 교실안의 풍경은 점점 더 화사하고 아름다워졌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학생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어 책상위에 놓인 꽃과 포스트잇, 인형과 과자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교실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각 교실의 칠판에는 아이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글부터 시작해서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의 그리움이 가득한 글, 그리고 생일을 축하하는 글들이 있었다. 칠판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그리움은 거대하게 나를 압도했다. 중간 중간 웃으면서 어서 돌아와 다시 놀자는 애써 밝게 써진 글귀, 남자아이들 특유의 허세가 가득한 욕설과 함께 얼른 돌아오라고 협박하는 말투의 글귀들, 칠판의 글들이 밝으면 밝을수록 글을 쓰고 있는 학생들의 눈물범벅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해맑은 글귀위에 번진 눈물 자국은 밝음 속에 숨겨진 슬픔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2학년 교실들은 말 그대로 4월 16일에 멈춰있었다. 각 반의 달력은 모두 4월달에 멈춰있었다. 4월 16일까지 X표로 채워지고 있던 급식표도 그날 이후로 멈춰있었다. 어느덧 1년이 다되어가면서 우리들은 우리도 모르게 세월호를 잊고 있었는데, 그 교실들은 여전히 4월 16일에 멈춰있었다. 죄책감이 너무 크게 가슴을 때렸다. 얼마나 울어야 이 슬픔이, 이 고통이 달래질지 모르겠다. 새삼 이러한 고통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피해자 가족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30~40분정도 교실을 다 둘러보고 마지막 2학년 10반에 헌화를 하고 생존자 가족 대표분과 간단한 담화의 시간을 가졌다. 가족들은 세월호 사건 당시 정부당국의 구조에 대한 태도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문제를 드러냈지만 국가의 가장 기초적인 존립 근거인 자국민 보호를 하지 못한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는 반드시 대한민국이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75명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사무국장님과 생존자 가족 대표분 모두 살아남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꽃과 과자, 장난감들로 가득한 교실 중간 중간에 비어있던 책상들을 떠올렸다. 전후좌우 모든 친구들이 떠나버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그 비어있는 책상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공부하고 장난치고 놀던 친구들.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같이 생활하던 그 친구들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상실감,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 그리고 홀로 남은 공포. 이 모든 것이 살아남은 아이들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다만 사무국장님께서는 그 아이들이 그 고통속에서도 잘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세월호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대로 시행이 되어야하고, 올바른 선체인양을 통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이 정확히 밝혀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원고를 나와서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분향소였다. 분향소에는 좌우로 컨테이너 박스들이 놓여져 있었다. 왼쪽에는 각 종교단체들의 사무실로 보였고, 오른쪽에는 유가족 대기실과 기록물을 보관하는 컨테이너 박스들이 있었다. 분향소안은 촬영이 금지였다. 안내원분들의 안내를 따라 영정사진 앞에서 우리들은 헌화를 하고,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묵념을 했다. 그리고 추도를 위해서 옆으로 이동해 한바퀴를 둘러보게 되었다. 이미 단원고에서 너무 큰 슬픔을 느껴서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영정사진들을 볼뿐이었다. 그러다가 영정사진 앞에 놓여있는 편지, 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 비해서 많은 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에 조심스럽게 놓여져있는 편지와 선물들은 조금 더 아이들을 알게 해주었다. 평상시 그 아이들이 꿈꿨던 직업들, 학교, 좋아했던 축구팀과 야구팀. 학교에서 달리 너무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분향소를 다 보고 나와서 유가족 대기실로 갔다. 유가족 대기실에는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유가족분들이 계셨다. 그날 세월호 유가족분들은 선체인양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도보행진을 진행 중에 있었다. 많은 분들이 내려가 있어서 유가족 대기실에는 많은 분들이 계시지는 않았다. 우리와 간담회를 가지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은 희생자, 생존자 가족들의 아픔을 이야기해주셨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분들에게 몇가지 공통된 육체적 고통이 있는데 급속한 노화현상과 건망증, 가슴통증 그리고 잇몸질환이었다. 우리와 함께 담화를 나누셨던 유가족분께서도 이빨을 이미 십여개나 뽑은 상태였다고 말씀해주셨다. 사건 이후 식사를 하지 못하시고 계속 누워있었더니 약해진 잇몸탓에 이빨이 돌아가버렸다고 말씀해주셨다. 이처럼 자식을 잃은 정신적 고통은 그대로 육체적 고통으로 전이되어버렸다. 그리고 피해자가족들의 요구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생명을 지켜주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한다는 점도 강조하셨다. 마지막으로 다시는 세월호 피해자가족들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하셨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씀은 오늘 같이 와서 고통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처음에 안산을 간다고 할 때만해도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까,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왔다. 하지만 단원고와 분향소에서 느낀 것은 고통이었다. 슬픔을 넘어 아픔이 느껴졌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든 일정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느낀 고통은 세월호 피해자 가족분들께서 느끼시는 고통의 백분일도 안될 것이다. 슬픔을 위로하거나 아픔을 달래주겠다는 마음은 이미 단원고 교실에서 사라져버렸다.

 

  슬픔을 위로하거나 아픔을 달래주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의 고통을 상대화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고통을 백분의 일이라고 같이 느끼고 공유했다. 세월호 사건이 얼마나 참혹한 사건이였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된 것이다. 현재 단원고에 남아있는 교실은 얼마 안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416기억저장소와 세월호 피해자 가족분들은 그 교실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한지 찾고 계신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슬픔과 고통의 흔적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기록이 기억의 연장이나 말처럼, 우리는 점차 세월호 사건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분들에게 단원고를 방문하길 권해드리고 싶다. 그 길은 분명히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희생자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이 사건을 기억하고, 무엇보다 그 희생자 가족분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원고에 가서 그 고통과 슬픔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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