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교과서를 논하다

[역사교육연대회의] 초등 5-2 사회(역사)교과서 분석결과 중간발표 발표문(2015.09.07 오전 10시 흥사단 강당 3층)

     

 

초등5-2 사회(역사)교과서 분석결과 중간발표

    

역 사 교 육 연 대 회 의

민족문제연구소|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

전국역사교사모임|한국역사교육학|한국역사연구회

 

 

일시: 201597() 10:00-

장소: 흥사단 강당 3

주관: 역사교육연대회의

 

<발표자>

하일식(연세대 사학과), 이준식(민족문제연구소), 이익주(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배경식(역사문제연구소), 방지원(신라대 역사교육과), 조한경(전국역사교사모임)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여러 차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강행하겠다고 밝혔으며, 황우여 교육부장관도 교과서는 한가지로 가르쳐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면서 9월 안에 국정화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함으로써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실에 입각하여 오류가 없는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된 공언이 실상 국정교과서 제도에 대한 반발을 호도하려는 것일 뿐, 정권에 가까운 소수 인사들이 참가하여 편향될 뿐 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오류가 많은 교과서를 만들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이 현실입니다. 2015역사과 교육과정 시안 개발진과 심의진 구성의 편향성이 이미 확인되었고, 밀실 작업하듯이 진행되고 있는 집필 기준 마련 작업의 문제도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201412월 역사정의실천연대가 주관한 초등 역사교과서 근·현대편 실험본 분석 결과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성공시켰다거나,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했다는 식의 충격적인 표현과 페이지 마다 두 개가 넘는 사실 관계의 오류는 그 자체로도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결과가 국정교과서 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합니다.

 

    이번 검토 작업은 전국 모든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2학기부터 실제로 사용하는 정식 교과서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선사시대부터 17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분석 작업에 참가한 역사교육연대회의 소속 단체의 관계자들은 교과서를 분석하면서 충격적인 실상을 접하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교과서가 정식 발행되기 바로 6개월 전에 그토록 충격적인 양상이 드러났는데도, 이 교과서 역시 앞선 실험본 교과서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실험본이 아니라 이번 2학기부터 전국 모든 학생들이 공부하기 시작한 교과서이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우리는 정부와 여당이 그토록 국정제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교과서의 꼴을 제대로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시스템을 결여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질 좋고 오류가 없는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주장은 모조리 허구이며, 그것을 구실로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인식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주입하려는 것일 뿐이라는 의구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두 권의 초등학생용 역사교과서는 그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이제 이 교과서의 문제점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사실 오류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역사인식상의 문제 혹은 역사이해의 오류 ; 현재 교과서에는 부여와 삼한의 역사가 거의 증발되어버렸습니다. 부여는 고구려보다 앞서 출현하여 고구려와 백제사로 직접 연결되는 민족사체계 속에서 매우 중요하며,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연원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국가입니다. 같은 고대사 안에서 볼 때 가야의 역사가 상세하게 다루어지고 50년 안팎의 후삼국 역사에 큰 비중을 두어 기술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사실로서 뒷받침되기 어려운데도 저자의 과도한 해석으로 그릇된 역사상을 만들어 내거나, 저자가 당대의 역사상을 정확히 서술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앞뒤 서술이 충돌하거나 역사 이해를 그르칠 만한 곳도 여럿 발견하였습니다.

 

 

착오에서 빚어진 수많은 오류 ; 신라와 고려의 관리 등용 방식을 잘못 설명하였다거나, 신라 말 호족을 설명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호족으로 불렀다(당시의 호족 용례를 극소수이며, 훗날 역사학자들이 개념화한 것)고 기술한 경우, 보신각을 종으로 설명하는 경우처럼 글로 된 오류도 많습니다. 고려 때 청자로 된 밥상에서 청자에 붉은 김치가 올라온 밥상을 받는 삽화나 노비 속량(贖良) 문서를 노비문서로 표현한 것, 서울의 궁궐을 그리면서 유독 창경궁을 빠뜨린 경우처럼 역사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의 역사이해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삽화와 지도의 오류도 엄청납니다.

 

 

역사상()의 오해를 불러올 비문(非文) ; 두 개의 조사를 한꺼번에 사용하는 문법상 오류를 비롯하여 문법에 맞지 않은 문장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입니다. 비문은 국어를 함께 배워야 할 초등학생에게 그 자체로 상당한 문제려니와, 정확하지 않은 서술로 인해 학생들이 역사상을 잘못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어 심각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선생님이나 전문가들은 저자가 하려는 바를 알 수 있다 해도, 학생들이 잘못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역사를 오해할 수 있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명백한 사실 오류라 하기 어려우나 초등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나 표현이나 교육부가 정한 편수용어를 지키지 않은 곳도 적지 않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몇 가지 언급합니다.

 

요선철릭이나 목면시배 유지와 같이 학생들이 도저히 알기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 것,

편수용어나 집필기준과 다른 경우 ; 해인사대장경판(팔만대장경), 발해의 주민구성과 관련된 서술

 

    이와 별도로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2009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이 교과서를 2007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와 비교해보았더니 여러 곳에서 동일하거나 비슷한 문장이 현재 38군데나 발견되었습니다. 다른 개발진이 만든 교과서 내용을 고스란히 따 붙인 결과입니다.

 

    자료집을 펼치기 전에 두 가지만 더 확인합니다.

 

    먼저 이 발표는 중간보고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최종 분석 결과가 아님에도 이 발표를 서두른 것은 이 교과서로 수업을 하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공교육에서 처음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12살 초등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과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시급히 교정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지금이라도 교육부가 국정제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중등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추진 중단을 약속한다면, 이 책으로 배우는 초등학생의 혼란과 가르치는 교사의 곤혹스러움을 조속히 수습할 수 있도록 교육부에 협력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교과서를 펼치면서 구체적인 문제를 확인해보겠습니다.

 

 

 

 

1. 부정확한 역사이해에서 비롯된 오류(예시)

내용 또는 본문

검토 의견

63

<삽화>

청해진을 설치하는 모습(상상화)”

- 민간 출판사의 비슷한 그림을 참고한 듯하나, 당시의 접안시설(接岸施設)에 대한 이해와, 접안시설이 확인된 완도 장군섬의 지형에 대한 지식이 없이 그린 것으로 추정됨. 현재 접안시설이 확인된 장군섬의 지형으로는 이런 절벽이 없고, 현재 그림은 접안시설도 아니고, 무슨 용도인지 교사가 설명할 수 없음.

86

<지도>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

-“태조 북진 후 넓힌 영토의 영역이 지나치게 부풀려짐. 함흥 지역은 고려 말에 고려의 영토가 됨.

-87쪽 천리장성이 표기된 지도는 귀주대첩 이후에 축조된 것임을 감안하면 태조 왕건 시기의 영토가 더 넓을 수 없음.

89

신라에는 사람을 출신 가문에 따라 나누는 신분 제도가 있었다. 나라에서는 국학에서 공부한 학생들 중에서 시험을 치러 관리를 뽑으려고 하였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통일신라가 국학에서 수학한 학생을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시행했지만 중하급 실무자를 선발하는 정도였고, 높은 벼슬은 진골이 독차지하였다는 점을 제대로 서술해주어야 함. 귀족들의 반대로 시험을 못치다니?

신라사 연구자가 처음 듣는 이해할 수 없는 서술임

89

고려에도 고위 관리의 자손에게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직을 주는 음서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공정한 시험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하여 광종 때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관리를 뽑게 되면서 고려에서는 가문이 좋지 않더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과거를 통하여 관리를 뽑던 고려가 신라에 비하여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한 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고려가 신분제를 뛰어넘어 개인의 능력에 따라 관직 진출의 자유가 보장된 것으로 역사상을 오해하게 할 우려 있음.

-음서제는 통상 과거제가 실시된 뒤(성종)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임. 따라서 이 부분 설명은 순서가 바뀌었다. 특히 음서제는 과거제 실시 이후 형성된 고려 문벌 귀족들의 관직 독점에 활용됨.

 

 

91

송은 당 말기의 혼란기를 이겨내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정예시>

송은 당 멸망 후의 혼란기를 이겨내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당은 907년 멸망. 송은 960년 건국. 당과 송 사이에는 510(907-960)이 존재함.

 

81

지방에서는 성주가 성을 쌓고 군사를 모아 그곳의 백성을 다스렸는데, 한 지방을 독자적으로 다스릴 만큼 세력이 커진 사람들을 호족이라고 불렀다.”

-갑자기 성주라고 하면 당시 역사를 제대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님. 국왕이 파견한 사람이 아니라 현지인 중에서 힘 있는 자가 성주, 장군이라 내세우며 성을 쌓고 자기 고장을 스스로 다스린 것.

-“호족이라고 불렀다” : 호족이라 표현한 것은 극소수 용례이며 주로 성주, 장군으로 표현됨. 이들을 개념화하여 호족이라 부르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임. 따라서 호족이라 부른다고 해야 적절한 표현임.

129

정도전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누명을 벗게 되었고, 그의 저술을 모은 󰡔삼봉집󰡕도 간행될 수 있었다.”

-태종 16년에 정도전의 자손들은 금고에서 해제되었고, 고종 2년에 훈작이 복구되었다. 조선후기에 누명을 벗게 되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삼봉집󰡕은 태조 6, 세조 11, 성종 17년에 이미 간행된 바 있으며, 정조 15년에 왕명을 이를 증보하여 간행하였다.

133

<한양 둘러보기> 보신각 캡션

조선 시대에 도성 문을 여닫는 시간과 화재와 같은 위급한 상황을 알리던 종이다.”

<수정 예시>

조선 시대에 도성 문을 여닫는 시간과 화재와 같은 위급한 상황을 알리던 종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누각이다.”

-보신각은 종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누각임.

-설명은 보신각종인데, 이 문장대로라면 보신각이라는 누각이 종이 되어버림.

 

133

<한양 둘러보기>

창경궁 빠짐

-궁궐을 그리면서 창경궁을 빠뜨림.

110

<청자 서술과 삽화>

청자는 주로 귀족들이 사용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찻잔, 접시, 항아리, 주전자뿐만 아니라 베게, 기와, 의자, 향로, 벼루, 연적 등도 만들었다.”

-본문의 서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에 네 개의 그림을 넣었는데 그림이 학생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림에는 식탁, 밥그릇, 냄비, 바둑판 등마저도 모두 청자의 푸른빛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식탁 위 반찬은 붉은 색 김치를 그려 넣음. 고추는 조선 후기에 들어 온 것으로 고증 없는 삽화임.

125

<연표 >

1485󰡔경국대전󰡕 완성

-1485년은 경국대전이 시행된 해임. 완성은 1481, 1484년 등 명확히 못 박기 힘듦. 대부분의 중고 교과서는 경국대전 반포로 서술하고 있음.

141

<경국대전 번역문>

일본인이나 여진족이 조선에 올 때는 일반 백성의 집에 머물러 잠을 자지 못한다. 만일 마을이나 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거나 제멋대로 노는 자가 있으면 곤장 80에 처한다.”

-원문 ·野人往來, 勿令宿閭閻, 如有侵擾諸邑·諸驛或出入放縱者, 押領員人杖八十압령인을 장 80에 처한다는 것으로 왜인이나 야인을 직접 처벌하는 것이 아니며, ‘곤장을 치는 것도 아님.

144

세종은 농민의 오랜 경험을 모아 정리한 󰡔농사직설󰡕을 만들어서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농사직설󰡕이라는 한문 서적을 편찬하여 수령에게 나누어주고 백성의 농사짓기를 지도하라는 것임. 마치 한글로 쓴 책을 백성에게 직접 배포한 것으로 이해할 소지가 다분.

152

<노비문서 사진과 설명>

노비는 주인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나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제시한 노비문서는 노비에서 면해주는 내용을 담은 속량(贖良) 문서이다.

-7차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같은 사진 아래 돈을 받고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 준 문서라는 캡션 있음

-내용은 이정명이 70냥을 받고 정만금의 3녀 옥련을 속량한 내용임.

-노비관련 문서는 맞지만, 서술과 함께 보면 학생들은 노비문서로 오해할 수 있음.

181

<문화재 지도>

비사성의 위치

-비사성위 위치(다렌)를 전혀 엉뚱한 곳에 설정함

 

 

2. 편수 용어나 집필 기준을 벗어난 서술, 지나치게 어려운 용어(예시)

내용 또는 본문

검토 의견

19

<본문>

그들은 돌칼로 곡식을 수확한 다음 무늬가 없는

<사진 캡션>

돌칼(오산리 선사 유적 박물관)”

-편수용어는 반달돌칼임.

-대부분의 중고 역사 및 한국사 교과서는 반달돌칼로 서술

-교과서가 사진을 인용한 오산리 선사 유적 박물관 홈페이지도 반달돌칼로 소개하고 있음.

112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경상남도 합천)”

-초등교육과정은 금속활자, 청자, 팔만대장경, 불교 미술 등을 통해 고려 시기의 과학과 생활, 문화를 파악한다.’로 서술되어 있음

-편수용어는 고려 대장경’, 또는 팔만대장경’. 대부분의 중고 역사 및 한국사교과서는 팔만대장경으로 표기

115

요선철릭

 

116

목면시배 유지

 

 

 

3. 역사 인식상의 문제/역사 이해의 오류(예시)

내용 또는 본문

검토 의견

18-29

<고조선 전체 서술의 특징>>

-고조선의 역사를 청동기 문화(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탁자식 고인돌)의 근거 위에서만 설명하고 있어 철기 시대까지 발전해 나간 국가라는 중요 사실 누락.

-고조선 후기의 대표 유물인 세형동검 등은 증발.

-고조선 멸망에 대한 서술 누락

-고조선 단원에 이어 삼국과 가야가 등장함. 고구려, 백제의 기원이 되고 5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던 부여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음. 초등학생임을 감안해도 타당하지 않음.

-학생들은 고조선에 이어 바로 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할 것임

34

<삽화> 주몽이야기(고구려)

다른 왕자들이 주몽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자, 주몽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에 고구려를 세웠다

-부여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다른 왕자들이 등장함. 학생들은 이 왕자들을 고구려의 왕자들로 이해할 우려 있음.

35

<삽화> 온조 이야기(백제)

주몽에게는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 졸본에서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가 있었다

-여기서 부여가 느닷없이 처음 등장하여 당혹스러움.

-교과서 서술이 분절적이고 고조선 시기에 부여와 삼한을 서술하지 않아 교사는 부여의 역사를 새롭게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됨.

58

이때 고구려 장수였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나와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발해 건국, 698).”

-마치 발해가 고구려 유민에 의해서만 세워진 국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

-최근 중고등학교 집필기준도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이분법적인 서술을 지양할 것을 권하는 경향으로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서술해야 함.

87

신라는 자기 영토에 들어온 고구려 유민을 통합하였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고구려 유민까지 통합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옛 고구려의 후손까지 포용하였다.”

-불필요한 비교 대조로 엉터리 서술이 됨.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발해 유민 포용은 200년 넘는 시간차가 있음.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로 신라와 고려를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님 : 고려가 받아들인 발해 유민도 망명해온 사람들에 한정된 극히 일부였음.

88

고려는 옛 고구려·백제·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민족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유교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도 소중히 여겼다.”

-이 부분은 69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서술과 중복되고 상충된다.

-고구려, 백제가 사라진지 200년이 넘었건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움.

-마치 통일신라는 도교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듯한 서술. ‘소중히 여겼다는 표현 자체가 어색함. “널리 퍼졌다는 정도의 다른 표현을 모색해야 알맞음

 

 

4. 역사상()의 오해를 불러오는 비문(非文)/예시

내용 또는 본문

검토 의견

17

지붕에는 풀이나 짚을 덮고, 그 위에 풀을 올리거나 동물 가죽을 덮었다.”

-지붕에 이미 풀이나 짚을 덮었는데 다시 풀을 올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임.

 

18

우리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수정방향>

우리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이 처음 세워진 곳을 현재의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음. 고조선을 처음 건국한 지역이 한반도 안이라고 학생들이 이해할 것으로 보임.

42

일반 사람들은 평민이 되었고, 전쟁에서 졌거나 죄를 지은 사람은 노비가 되었다.”

<수정 방향>

두 문장을 분리하여 명확히 서술해야 함.

-일반 사람들은 평민이 되는것이 아니라(become), 일반 사람들 대부분이 평민이었음(be)

-전쟁포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문장만으로 보면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경우 노비가 되는 것으로 읽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서술.

50

중국에서 받아들인 불교를 통해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학문과 음악, 공예와 건축, 미술과 같은 문화도 함께 전해졌다.”

-‘불교를 통해가 아니라 불교와 함께가 역사적 사실에 맞음

128

<선죽교 사진 아래 질문>

새 왕조를 세우려던 사람들이 정몽주를 죽인 까닭을 이야기해 봅시다.”

-정몽주를 죽인 것은 새 왕조를 세우려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원으로 특정해야 함.

-초등학생들의 토론 주제로 부적절해 보임. 차라리 고려를 지키려던 사람들과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던 사람들의 생각 등을 이야기해 보는 것이 보다 좋은 토론주제라고 생각함.

65

<신라 민정문서> 캡션

신라에서는 평민을 모으고 세금을 거두려고 마을의 이름과 크기, 인구, 농사짓는 땅의 넓이, 가축의 수, 뽕나무의 수 등을 기록하였다.”

<수정 예시>

남녀를 나이에 따라 구분하여 인구수를 헤아리고, 농사짓는 땅의 넓이, 소와 말의 수, 뽕나무 수 등을 적어서 노동력을 동원하고 세금을 걷기 위해 기록한 문서

-“평민을 모으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임.

 

161

<지도의 말풍선>

이웃 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조선은 군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 때문에 군사 수가 적다는 표현은 매우 어색함.

 

124

고려의 뒤를 이러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사람들의 바람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한 새로운 나라어떤 나라였고, 고려와 어떻게 달랐을까?”

-두 줄에 나라란 단어가 4번 등장. 집필자의 표현력, 서술 능력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문장임.

-고려를 세운 사람들의 바람도 당연히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171

병자호란 때 일어났던 일을 상상하여 일기를 써 보자.”

우리 아들은 어디에

-일기라고 하지만, 짧은 문장에 아들이란 단어가 9번이나 등장

 

 

5. 이전 교과서 베끼지 또는 따 붙이기(예시)

2007 교육과정

2009 교육과정

16

기원전 약 2000년경부터 구리를 불에 녹여 주석이나 아연을 섞어 만든 청동기가 등장하였다. 청동기는 만들기가 어렵고 귀해서 주로 거울, 방울, 검 등과 같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도구, 지배 계급의 무기나 장신구 등으로 쓰였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데에는 여전히 돌과 나무로 만든 도구가 사용되었다.

1단원 19<청동기 시대 설명>

기원전 2000년경부터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을 섞고 불에 녹여 만든 청동기가 등장하였다. 청동기는 만들기가 어렵고 귀해서 주로 거울, 방울, 검 등과 같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도구, 지배자의 무기나 장신구 등으로 쓰였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때 여전히 돌과 나무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였다.

37

노비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이들은 주로 귀족들의 농사를 지어 주거나 주인집의 여러 가지 일을 해 주며 살았다. 그들은 주인의 소유물로 여겨져 사고 팔리기도 하였다.

1단원 43

노비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이들은 주로 귀족의 농경지를 경작하거나 주인집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았다. 노비는 주인의 소유물로 여겨져 주인이 사고팔기도 하였다.

85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후, 원은 고려에 그들의 관청을 설치하고 고려의 왕자를 인질로 삼아 원으로 데려가는 등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다.

2단원 103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후, 원은 고려에 그들의 관청을 설치하고 고려의 왕자를 인질로 삼아 원으로 데려가는 등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다.

102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모습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옮겼다. 한양은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이 있어 물을 구하기가 쉽고 육로 및 수로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한양의 중심은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주변에 넓은 평야가 있어 도읍지로 적합하였다

3단원 130

이성계는 나라의 모습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한양(서울)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한양은 나라의 중심에 있으며, 한강이 있어 육로 및 수로 교통이 편리하였다. 그리고 산으로 둘러싸여 외적 방어에 유리하였고, 주변에 넓은 평야가 있어 도읍으로 적합하였다.

117

양반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직접 참여하였고, 자신의 땅과 노비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하여 관리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여자도 글공부는 하였으나 관리가 될 수는 없었다. 양반집 여자들은 주로 집안 살림을 챙기고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단원 151쪽 양반

양반은 관리가 되어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땅과 노비를 가졌고, 자신의 땅을 농민에게 빌려주기도 하였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하여 관리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도 글공부를 하였으나 관리가 될 수는 없었고, 집안 살림을 챙기고 자녀를 교육하는 데 힘썼다.

사회과 탐구 5-1 90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한 윤장원이 첫 출근을 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의복을 단정히 하고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 출근을 하였다. 윤장원은 궁궐에서 왕에게 조언을 하고 관리들이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아들 흥문이 글공부를 게을리하여 아버님께 혼나고 있었다. 노비 송노, 분개, 복지에게 율무 밭의 풀 뽑는 일을 시켰다.

저녁을 먹고 나서 친구 이광춘의 사랑채로 가서 장기를 두었다. 안채에 있던 광춘의 부인이 나와 인사를 하였다.

3단원 155쪽 박스 안의 양반의 생활사례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한 윤장원이 첫 출근을 하는 날이다. 윤장원은 아침 일찍 의복을 단정히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후 출근을 하였다. 그는 관아에서 높은 관리들이 하는 일을 도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송노 분개, 복지 등 노비들이 율무밭의 풀 뽑는 일을 마쳤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 친구 이광춘의 사랑채로 가서 바둑을 두었다. 안채에 있던 광춘의 아들이 나와 인사를 하였다.

131

육지에서도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이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다. 의병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이 다양하였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의병은 관군과 협력하여 진주성과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3단원 166쪽 임진왜란 중 의병활동

육지에서는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다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의병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관군과 협력하여 진주성과 행주산성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3

중립 외교 정책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광해군을 임금 자리에서 쫓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다. 인조는 명나라를 받들고 후금을 멀리하였는데, 이 때문에 조선은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3단원 168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다. 인조가 명을 섬기고 후금을 멀리하자 조선은 후금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명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