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모임/2015. 차별과 폭력을 넘어서-1.섹슈얼리티

[2015기획모임] 차별과 폭력을 넘어서-1.섹슈얼리티 3회차(2015.7.10) 후기 (김대현)

기획모임 차별과 폭력을 넘어서 1. 섹슈얼리티

세번째 모임(2015.7.10) 후기

  1970년대 유럽 성해방운동의 배경

 기 오껭겜, 윤수종 역, 『동성애 욕망』, 중원문화, 2014.

 김대현

(연세대학교)

 

 

 

1959년 1월 1일부터 1969년 12월 31일까지 11년 사이에 서울대학병원을 찾은 성도착증 환자는 단 11명뿐.

이나마 2명은 다른 병에 성도착증을 부수적으로 겸하고 있는 환자였는데 이들 성도착증을 세분해보면 동성애 8명, 피학증 1명, 노출증 1명, 성욕과다증 1명으로 여자는 단 3명뿐이다. 

이것을 영국의 '런던' 대학병원의 같은 11년 동안 417명의 동성애 환자와 '킨제이' 보고서에 나타난 미국의 전 백인 성인 남성의 4%의 동성애 환자와를 비교하면 1년에 한명 미만 꼴로 한국의 동성애 환자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성을 죄악시하던 기독교의 '죄문화권'(길트컬쳐)과 성적으로 갈등이 없는 한국의 '창피문화권'(쉐임컬쳐)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 「<스케치> "한국인의 성도착·환각제 복용 거의 없다" 서울 의대 韓東世 교수 논문」, 『동아일보』 1971.6.28., 5면.

     

 

  동성애는 오랫동안 정신분석학의 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성애는 정신병이고, 그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정신분석과 상담치료와 '전환'치료의 대상이 되었지요. 정신병원에 제 발로 찾아들어온 동성애 '환자'의 차원에서, 킨제이 보고서를 통해 동성애자가 생각보다 상당한 규모로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으로, 병리와 치료의 대상에서 사회적 실체의 하나로 동성애가 취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동성애를 바라보는 틀이 정신분석학에서 사회과학으로 이행되는 과도기, 그 한가운데에 있었던 한국 의학권력의 맨얼굴을 위 기사는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72년 프랑스의 기 오껭겜이 쓴 동성애 욕망또한, 이 전환기를 살았던 지식인의 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정신분석학자가 아닌, 게이 해방운동의 한 일원으로서 말이지요. 그는 책에서 성실히 프로이트를 읽고, 그를 통해 동성애를 병리화하던 당시의 상식을 깨부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선 여전히 정신분석학의 패러다임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한계를 지니고, 동시에 그 한계 속에서 심리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동성애를 해석하려는 노력의 첨단을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동성애자가 되는 '선택'은 없다. (...) '(그것은)어린이가 숨이 막힐 때 찾아내는 출구이다.'" (162-163)

 

 

  동성애를 어린 시절의 어떤 정신분석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동성애자들은 자주 이런 질문을 대합니다. "언제부터 동성애자였나요?" "무슨 계기로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이런 질문이 얼마나 미욱한지는 저 질문을 뒤집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성애자였나요?" "무슨 계기로 이성애자가 되었나요?"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정체성은 그렇게 쉽게,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이 자유주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누군가 그에 대해 대답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인생사 속에서 재구성된 기원일 뿐, 진짜 성정체성의 '기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헌데 이 책은 제프리 웍스의 서문에서도 지적되듯이, 거꾸로 "동성애 공포"를 가진 사람들을 이런 '정신분석'의 틀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성애 욕망"의 반대 극항인 "동성애 공포"를 비판하려는 뜻이겠지만, 그런 종류의 이성애자(?)들을 과거 동성애자에게 해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분석'하는 일은, 버려야 할 칼의 손잡이를 거꾸로 잡는 격이 될 수 있지요. 또한 저자가 주장하는, "항문 섹스"를 하는 게이들의 "집단화"된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혁명"(51)을 하자는 결론 또한 과한 감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게이 해방운동의 대두 이전에 "개인화된 동성애 관념"(59)이 만연해있던 상황에 대한 역진으로 이해됩니다만, 동성애 억압의 배경에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있을지는 몰라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혁명이 동성애 해방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난날 해방운동의 유토피아적 낭만으로 읽히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정신분석 안에서의)사유화된 '개인'은 인위적 구성물이며, 이것의 사회적 기능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회 생활에 붙어있는 무질서를 파악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50)

"자본주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들을 생산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듯이 동성애자들을 제조한다. 동성애는 정상 세계가 제조한 것이다." (73)

"이성애 이데올로기는 생득적 또는 도착적 동성애와 병든 동성애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운명과 잘못은 공존한다." (124)

 

 

  그러나 이 책이 오늘을 기준으로 철지난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프로이트에서 나온 '정신의학 운동'적 경향과는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42), 정신분석학 속의 '개인'을 인위적 구성물이라 전제하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무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이트의 입론을 받아 안으며, 이 무의식의 차원으로부터 이야기할 바탕을 끌어내는 그의 기획은, 이른바 '남성 지배구조''가부장제'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의미 깊은 통찰을 줍니다. 한편으로 이는 무의식과 욕망들이 속류 정신분석과 같이 주의주의적인 방법으로만 분석될 수 없으며, 사회와 체제의 투영을 거치지 않고 욕망을 분석하는 것이 거꾸로 얼마나 철지난 틀인지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욕망은 이성애적이지도 동성애적이지도 않"(72)으며, 욕망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고(45), 욕망의 대상이 곧 그 욕망의 본성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탁월합니다. 가령, HIV/AIDS 감염취약군을 학술적으로 지목할 때, 이제는 '남성 동성애자'가 아니라 MSM(Men who have Sex with Men), 즉 남성과 섹스하는 남성이란 말을 주로 사용합니다. 전자와 후자는 같은 개념이 아니며, 남성과 주기적으로 섹스하는 이성애자도 존재합니다. 같은 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과, 같은 성과 섹스를 하는 것과, 스스로 동성애자라 정체화하는 것은 모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경우, '동성연애자'는 동성과 섹스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동성애자'는 동성과 (섹스가 포함된)연애·동거를 하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삶 속에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양식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숙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게이·레즈비언더러 '동성연애자'라 부르는 것이 비하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가진 다양한 삶의 부분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그저 '누구와 섹스하는 자'로만 축약하는 것이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게이·레즈비언 정체성 정치는 바로 이 점에서 착상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동성애는 "같은 성의 성원들 간의 단순한 성활동 이상"(54)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상'이 어떤 자본주의 철폐의 아이콘으로까지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거기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등 체제의 문제가 일정하게 연루되어 있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불러온 기존의 가족제도와 성 담론의 균열 속에서, 비로소 게이·레즈비언의 고유하거나 고유하지 않은 삶의 여러 양식들, 다양한 형태의 섹스와 연애, 나아가 또 다른 '가족'의 형태가 차례로 가시화되고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셈입니다.

 

 

"동성애 상황은 원칙에보다는 행동에 있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사라지는 일상생활의 구체성에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할 수 없는[대단한] 유리함을 나타낸다." (200)

"동성애자는 우리가 거의 사회라고 감히 부르지 않는 또 다른 관계형식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157)

 

 

  물론 지금도 여전히 동성애자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궁금해하고, 성정체성을 '교정'할 수 있다고 보며, 동성애자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박멸되어야 할 변태적 '욕망'으로만 축약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실제로 어떤 다채로운 생각과 경험과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는지 여러 연구를 통해 충분히 증명된 오늘에도 말이지요. 이 책이 가진 시대성과 반시대성의 공존은 오늘날에도 그 낯을 바꾸어 유지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역사란 본래 단선적으로 진행되지도 않고, 어떤 과제가 일거에 단계론적으로 극복되지도 않습니다.

 

  어느 때보다 발호가 거세어지고 그 실체가 폭로되고 있는 "호모포비아", 동성애 혐오세력을 목도하는 마음이 그러합니다. 저들의 사고와 존재는 결코 일거에 극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의 욕망이 그렇듯, 동성애를 싫어하는 이성애자(?)의 욕망 또한 아직 채 다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활성화한 사람들이 왜 욕망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을까"란 질문은 그래서 동성애자만이 아닌, 동성애 혐오세력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한 질문입니다. 과연 당신들은 '동성애'에 대해, 아니 자기 자신의 '이성애', 혹은 '성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다음의 문장은 아직도 그 생명을 잃지 않은 언명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동성애 욕망이 아니라 동성애공포이다."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