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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세이] 한홍구, 다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본 글은 정주하 사진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눈빛, 2012)에 서문으로 들어갔던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어, 어, 어, 후쿠시마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을 덮치고 연이어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TV로 생중계되는 폭발장면을 나 역시 극한의 불안감과 극한의 무기력함 속에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년, 미약하나마 평화운동을 한답시고 정신없이 왔다갔다 했는데, 평화란 것이 저렇게 느닷없이, 저렇게 한방에, 저렇게 참담하게 깨져나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세상은 온통 지진과 쓰나미와 핵발전소 이야기였다. 독일은 탈핵을 결정했고, 발전소를 해외에 수출하는 데 열을 올리던 일본도 안전점검을 이유로 자국의 발전소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이웃 일본에서 벌어진 압도적인 사태 앞에 숨을 죽이고 있던 원자력 마피아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이 나라의 대통령 이명박이 있었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21개의 원전 중 12기의 건설에 직접 참여한 바 있는 그는 ‘이번 사고로 원전을 오히려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외쳤다. 그에게 3ㆍ11 사태는 인류를 덮친 핵 재앙이 아니라, 핵 수출 경쟁국 일본의 탈락으로 한국형 원전을 팔아먹을 좋은 기회가 온 것일 뿐 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또 2012년 3월 26~27일 세계 50여 개 국의 정상이 모이는 핵안보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려고 하고 있다.

  평화박물관은 2005년부터 원폭2세 환우 문제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며 핵 문제를 다뤄왔다. 핵문제에 관해서 우리 사회는 놀라울 정도의 불감증에 빠져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핵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사망한 조선인이 무려 4만 여 명으로 추산되건만,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음에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2세 환우에 대해서건 한국사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불감증이 후쿠시마에 대한 관심도 슬그머니 사라지게 만드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3ㆍ11 사태가 있은 후 나는 5월과 8월에 각각 도쿄를 방문했다. 일본에 간다고 하니 일부 친지들은 도쿄도 방사능 오염수치가 높게 나온다는데 괜찮겠냐고 우려했다. 거기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하며 일본에 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후쿠시마에 꼭 한번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평화박물관 활동을 몇 년째 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이 역사적 비극의 의미를 한국사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괴된 일상

  후쿠시마의 비극이 갖는 의미를 어떻게든 기록하고 한국의 시민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평화박물관이 제일 먼저 떠올린 작가는 바로 정주하 교수였다. 그는 2008년에는 개인 사진집 <불안, 불-안>을, 2010년에는 제자들과 더불어 <검은 비 하얀 눈>을 연달아 펴내며 핵발전소와 핵무기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이를 사진으로 형상화해왔다. 그만큼 핵발전소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핵무기의 피해로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온 작가를 찾기는 어렵다. 정주하 선생과는 쉽게 의기투합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 후쿠시마에 같이 가자며 불쑥 연락을 했지만, 사진집을 통해, 그리고 합천평화의 집에 갔을 때 학생들과 먼저 다녀가신 흔적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독한 불감증에 걸린 이 땅에서 핵발전소와 핵무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묘한 동질성 때문에 교감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쿠시마에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가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의 시각으로 찍느냐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기획자인 평화박물관의 입장에서 일정하게 큰 방향에 대해서는 주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 발생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이웃나라 한국에서 후쿠시마를 이야기 할 때 재난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후쿠시마의 일상, 쓰나미에 뒤이은 원전 폭발로 지금은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후쿠시마의 일상으로 모아졌다. 느닷없이 삶의 거처에서 쫓겨난 사람들, 그들은 과연 정든 땅 언덕 위로 돌아갈 수나 있을 것인가, 돌아간다 해도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고향을 빼앗긴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이상화 시인의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들려주고 싶었다. 정주하 선생도 사건 발생 후 나온 재난 관련 사진을 보면 크게 재난의 참상을 찍은 것과 복구 과정을 찍은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진보다는 후쿠시마 사람들의 빼앗긴 일상, 인간이 사라져버린 빈 공간에 무심하게 찾아 온 계절의 변화를 찍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는 사건 이후 후쿠시마 인근을 방문하여 다큐를 만든 서경식 선생께 후쿠시마에 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선생께서는 쾌히 우리와 동행하여 안내해 주시기로 하셨다. 도쿄대 교수로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하고 있는 다카하시 데츠야 교수도 동행하기로 했는데, 다카하시 교수의 고향은 바로 후쿠시마이다.

 

빼앗긴 들, 조선과 후쿠시마

  서경식 선생의 발문에도 잘 나와 있지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타이틀로 정주하 선생의 후쿠시마 사진전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듣고 몇몇 벗들은 우려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이상화가 이 시를 쓴 것은 1926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때였다. 그 때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일본제국주의나 그 하위동맹자인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어떤 사람은 만주로 어떤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떤 사람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도시의 토막민이 되었고, 또 어떤 이는 자기 땅이었던 곳을 떠나지 못하고 소작인이 되어 부쳐 먹고 살아야 했다. 그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표하는 절창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다. 몇몇 벗들은 일본제국주의에게 땅을 빼앗긴 조선 사람의 처지를 노래한 이 시를 자기네 나라 정부와 기업이 세운 핵발전소 때문에 땅을 빼앗긴 일본 사람들에게 불러주는 것을 꺼려했다. 식민지 통치로 핵발전소가 초래한 재난을 동일한 평면에 두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우려한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절절한 아픔을 노래한 절창으로 후쿠시마를 노래할 때, 일본사람들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에서 쉽게 위안을 받거나 쉽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운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불편한 마음이 들었었던 적이 있다.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관을 둘러본 한국인들 중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의 뜻이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사실을 비난하는 분들이 상당히 있다. 이 분들 중에는 심지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 정말 못된 짓을 많이 했으니, 원자폭탄을 맞아 싸다고 하거나,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고마운’ 원자폭탄 이라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있다. 히로시마 원폭 평화기념관에 가면 묘한 비석이 서 있다.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 여기서 ‘잘못’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 아니면 전쟁에서 진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히로시마는 원래 군사도시였다. 그 역사를 아는 이들 중에는 군사도시 히로시마는 사라지고, 피폭도시 히로시마, 평화도시 히로시마만 남게 되었다는 점을 몹시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다.

 

고통의 연대를 위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처럼 원폭이 투하된 곳은 아니지만, 2차 대전 말기에 일본 전역이 엄청난 공습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 곳곳에 있는 평화박물관의 대다수는 바로 이 공습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엎드려 공포에 떨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상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늘에선 폭탄이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땅은 흔들리고, 굉음과 비명은 고막을 찢는 절망적인 순간에 젊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리면 안전하기는 한 걸까? 일본에 널려있는 평화박물관 중에 일본이 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한 사실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전시를 구성한 곳은 매우 드물다. 그것이 정말 아쉬운 점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평화운동에 몸담고 있는 역사학자인 내가 더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의 결여 또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무지나 무감각이 아니다. 왜 저 어마어마한 공습이 안겨준 공포와 무기력감과 절망의 기억이 그저 일본 내에만 머무를 뿐,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공습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과 공감과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왜 일본이 당한 공습의 기억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엄마들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일까?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연대의 손짓은 그래도 어디선가 찾아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일본에 공습이 가해지고 불과 5~6년 후에 이웃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북쪽지역에 가해진 엄청난 공습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시는 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역사학자이지만 히로시마를 찾는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이 원폭이 휩쓸고 간 압도적인 풍경을 보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이라고 아쉬워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앞으로 지구상에 다시는 이런 참상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자기 손으로 실천하기를 바란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내일 그와 유사한 잘못이 일어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아내는 데에서 가장 첨예하게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숫자로만 따진다면, 히로시마에서는 ‘겨우’ 16만 명이 원폭 때문에 죽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아시아에서 제 명에 죽지 못한 사람이 무려 2천만인데 말이다. 히로시마는 먼저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은 아시아인들의 명복을 빌고 사죄한 뒤에야 히로시마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사죄를 받을 권리가 있고, 일본인들은 사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한국인들은 기필코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그것은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 사죄를 안 했다고 일본인들이 원폭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통만 이야기하고 조선인을 비롯한 다른 전쟁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묵살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지만, 자신들의 고통을 뼈 속까지 느끼고 그 고통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과정 속에서 조선인들의 고통과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제국주의의 침략에 땅을 빼앗긴 것과 핵발전소 사고로 땅을 빼앗긴 것 중 어떤 것이 더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이런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할 것이다. 남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쩔 수 없는 본성 일지 모른다. 서로 내가 더 아프다고, 당신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기보다, 몹시 아파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는 놈이 더해 라는 말도 있지만 과부 사정을 홀아비라도 알아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의 연대이다.

  봄은 어김없이 왔다. 왕소군(王昭君)이 끌려간 흉노의 척박한 사막에도, 이상화가 거닐었던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에도 봄은 와 주었다. 후쿠시마에도 봄은 왔다. 사고가 난 핵 발전소 반경 20km지점의 강제 피난구역 경계선은 그저 사람이 쳐 놓은 경계선일 뿐, 봄은 선 안팎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그 경계선 밖에서 물끄러미 정든 땅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살아생전 그 땅을 밟아 볼 수 있을 것인가? 꽃조차 피지 않는 황량한 땅에 끌려간 왕소군은 그 봄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노래했고, 이상화는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곳에 찾아온 그 잔인한 봄을 거닐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겼다. 그래도 온 몸에 풋내를 띤 이상화는 다리를 절면서도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들을 걸을 수 있었지만, 지금 후쿠시마는 걸어볼 수조차 없는 땅이다. 빼앗긴 땅 되찾으려다 쫓겨난 독립투사들은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빠지더라도 그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그 땅을 기필코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아본 적은 없다. 그런데 후쿠시마의 현실은 그런 꿈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빼앗긴 들에 돌아가고픈 마음이야 절절하지만, 앞으로 수백 년, 어쩌면 수천, 수만 년 동안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 돌아간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결코 가능하지 않다. 정주하 교수가 찍은 후쿠시마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감은 더 탐스럽고, 더 붉고, 더 슬프다. 핵을 폐기 대상이 아니라 잘 지켜야 할 안보의 대상이라면서 각 국의 정상들이 50명이 넘게 몰려온다는 대한민국, 단위면적당 핵발전소 밀도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대한민국에서 다시 만나는 후쿠시마의 첫 봄은 너무 시리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ㆍ평화박물관)

한홍구 대학 교수
출생1959년 07월 16일
소속성공회대학교 교수
경력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한홍구 선생님께서는

 7월 17일(수) 19시부터 평화박물관에서

 <강연> 핵과 평화. 핵발전과 핵폭탄, 그리고 민주주의강연해주십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posted by 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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