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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정전60주년. 역사, 평화를 이야기하다/행사이야기

[역사, 평화를 이야기하다. 후기]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장래건)

[역사문제연구소 정전60주년 특별기획] 역사, 평화를 이야기하다. 7월 6일 <학술토론회> 끝나지 않은 전쟁 60년, 평화의 길을 묻다. 진행중. 본 글은 이날 행사에 참여하셨던 장래건 님의 후기입니다. 본 사진의 어딘가에 본 후기의 저자도 계십니다.

</학술토론회>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2013.07.06.

장래건

 

  국민 남성이라면 반드시 병역의 의무를 져야만 하는 대한민국에서 ‘안보’는 아주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이다.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강력한 안보만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쌍수 들어 환영하기도 하는 것이리라. 군부대에서 ‘거안사위(居安思危)’와 같은 문구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강력한 안보가 평화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말은 사실 한국 정부가 국민에게 행하는 심각한 ‘사기행위’다. 오히려 안보의식이 고취되고 안보가 강화될수록 남북의 대립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군사적 도발이 이루어지는 배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북한의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남한이나 미국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성을 가진다. 서재정의 분석에 따르면, 북한은 제네바 협정 이후 핵을 동결하였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은 북한에 선제타격을 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경제 제재를 가함으로써 북한을 압박했고, 제 1차 핵실험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제 2, 3차 핵실험 역시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제재 및 군사적 억지(抑止)와 한국 정부의 동참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요컨대 한반도에서는 안보를 강화할수록 평화에 가까워지기보다는 그것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한반도에서는 안보와 평화가 공립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남과 북이 ‘적대적 공범관계’, 혹은 ‘적대적 공존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은 상대를 타자화하여 배척하고, 국내의 국민들을 ‘안보’라는 이름 아래 결속시키는 것이었다. 지금껏 남한은 ‘반공’이라는 기치 아래 ‘빨갱이’, ‘간첩’ 등의 이름으로, 북한은 ‘자주’라는 기치 아래 ‘간첩’, ‘반동’ 등의 이름으로 반체제 운동을 진압해왔다. 그런 점에서 남한과 북한은 상대를 배척하고 타자화하면서 같은 전략을 공유하는 적대적 공범관계에 놓여있었던 셈이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평화와 안보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안보’라는 용어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한 평화는 안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군사력 위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는 사실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패권국가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속에서 미국의 힘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한반도의 문제에만 국한하여 보더라도 남한과 북한은 상호 간의 힘에 의해 억지로 유지되는 평화이다. 이런 평화는 힘의 질서와 균형이 깨지는 순간 파괴될 수밖에 없다. 힘의 질서와 균형이 깨어질 것을 두려워하면서 국가를 ‘병영화’하는 병영국가가 평화로운 국가체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화의 사전적 의미는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이라면, 안보 이데올로기가 어떤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의 실상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비록 군비 감축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당장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안보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상대를 타자화 하고 내부를 결속하는 메커니즘이라도 포기해야만 한다. 오늘날 한국의 군비는 반공을 기초로 한 안보 관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 글은 저자에게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