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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에세이들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 해방; 답사; 후기]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정명섭)

 

[역사문제연구소 해방 70주년 연속기획]해방

'해방의 마을로' 답사 소감문

정명섭


  공간은 기억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남산이라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와 남산타워, 사랑의 자무쇠로 알 잘려진 남산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였으며, 그리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답사에 운 좋게 참여하게 되었다. 충무로  역에 모여서 남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답사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들린 곳은 통감관저 터였다.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발을 뻗게 된 일본은 공사관을 세웠다. 처음 세워진 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불탔고, 새로 만든 공사관 역시 2년 후의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남산 중턱에 새로 영사관을 지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남산 근처인  진고개, 지금의 충무로에 자리를 잡게 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일본 영사관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통감부가 되었다가 왜성대에 새로운 통감부가 설치되자 관저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이 우리에게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곳 2층에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 처음을 다른 나라에게 주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이후 총독관저로 사용되다가 경복궁 뒤편,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관저가 지어지게 되면서 시정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아쉽게도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작은 공원 한구석에 통감부 터였다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해방 이후 군사용 건물로 만들어졌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이 지역에서 세워지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실 통감부 건물도 언제 사라졌는지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은 상태에서 마주치면 감흥이 좀 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텅 빈 공터에서도 충분히 그런 감상을 느낄 때가 많다. 통감부 터 역시 남아있는 것은 표지석 하나  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근대였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통감부 터 바로 옆의 작은 공원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늘 아래 긴 벤치가 있는데 나무가 아니라 돌로 만들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았다가 표면에 새겨진 한문을 발견했다. 답사를 안내해준 역사문제 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설명을 해줬다. 바로 한일강제병합 당시 일본 영사였던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좌대를 벤치로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동상까지 만들면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반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통감부 터 표지석과 벤치로 변한 하야시 곤스케에 동상 좌대를 보고 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바 캐릭터들이 세워져있는 애니메이션 센터에 도착하자 작은 표지석이 우리들을 반겼다. 1907년 만들어진 통감부 청사 자리였다는 표지석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본격적인 통치를 위해 남산에 세워진 통감부 청사는 르네상스 양식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우리에게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에 세워진 것 밖에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926년에 총독부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조선에 대한 통치와 지배가 이뤄졌다.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이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이곳에 잠입해서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벌인다. 그야말로 영화같은 이 이야기는 암울했던 당시는 물론이고 95년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가슴도 뜨겁게 만들었다. 증축을 거듭하던 남산의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에 새로운 총독부가 완성되면서 과학관으로 사용된다. 일본보다 한발 먼저 세워진 과학관은 일본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점과 개발 사업들을 선전하면서 장소가 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면서 표지석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라바 캐릭터 동상 사이에 세워진 표지석이 없다면 이곳이 과거에 어떤 장소였는지 알 수 없었다. 좀 더 큰 조형물을 만들어서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것은 김익상 의사의 의거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떨어진 곳에 세워져있었다는 점이다. 두 개를 나란히, 혹은 하나로 합쳐서 만들면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올라가게 되면 노기 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면서 곳곳에 자신들의 종교 시설은 신사를 세웠다. 정신적으로도 지배하겠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인데 남산에는 그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신사였던 조선신궁을 비롯해서 노기신사와 경성신사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기 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과 그 부인을 기리는 신사다. 두 사람은 메이지 천황이 죽자 나란히 순사를 했는데 일본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신사를 세운 것이다. 노기 신사는 경성신사에 부속된 신사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리라아트 고등학교 안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손을 씻는 수조와 석등 받침 등이 남아있다. 노기 신사에서 나와 좀 더 올라가면 숭의여대가 나온다. 이곳 교정의 한구석에는 이곳이 경성신사 터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사진이 남아있다.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신사는 이 땅이 일본의 것이 되면서 확장되어갔다.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유권을 빼앗긴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대로 이어온 전통을 부정당하고 지배자들의 종교와 정신을 주입당해야만 했다. 일본은 이 땅 곳곳에 신사를 지으면서 종교를 강요했다. 정신을 말살함으로서 이 땅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속셈을 보인 것이다. 남산에는 이런 신사들이 많이 세워졌다.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했던 충무로와 명동과 가까웠고,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때 조선인들의 숭배를 받았던 경성신사는 이후, 그들의 손에 의해 폐교된 기독교 계통의 학교 송의여학교가 들어선다. 교정의 안내판에도 숭의 정신이 일본의 제신을 눌렀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교정 건너편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에 세워져있다. 햇살 속에 우뚝 솟아있는 동상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다는 것이 지닌 의미를 떠올려봤다. 신사를 두 곳이나 봤지만 남산에는 신사들의 끝판왕 조선신궁이 있다. 신사보다 한 단계 위인 신궁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남산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는 이곳은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고 있다. 상징성과 규모에서 다른 신사들을 압도하는 이곳은 총독부와 더불어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이곳은 갈기갈기 찢겨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 경외심을 갖게 만들었던 계단은 1948년 겨울, 눈으로 덮힌 채 스키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변했다. 일본이 사라진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독재자 이승만이었다. 살아있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동상은 4.19의거로 파괴되었다.

 

 

 

 

  남산을 둘러보고 향한 곳은 해방촌이었다. 글자 그대로 해방 이후 남북분단이 진행되면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거주한 곳이었다. 남이 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남산에 있던 경성호국신사에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이후 해방촌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실향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급한 경사와 좁은 길을 보면서 그들의 팍팍했던 삶을 짐작해봤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골목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지어진 일본식 주택들이 남아있었다. 지방이 아닌 서울에 이렇게 많은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향민들의 거주지였던 해방촌은 최근에는 외국인들의 거주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끼리 바톤터치를 한 셈이다. 해방촌 주민들이 세운 해방교회를 지나 하늘 계단을 내려오자 시내와 마주쳤다. 오가는 버스와 사람들을 보면서 방금 지나쳐왔던 과거와 다른 세상을 만났다. 역사를 마주친다는 것은 일종의 몽상과 같다. 백 년 전의 세상을 이야기하고 걷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어떤 결정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면 역사는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물음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다. 역사란 ‘현실’ 그 자체다. 

 


정명섭: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백화점 경리와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치고, 현재는 글을 쓰고 있다. 이런저런 책을 썼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좀비부터 청소년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 중이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현재도 그것으로 전업 작가 생활을 버티고 있는 중이다. 남들보다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답사를 자주 다닌다. 역사는 종이 뿐만 아니라 발끝으로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