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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광장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과 일본 아시아민중사연구회의 안산 답사기 2탄] 세월호 「참사」의 기록·추도·기억 ― 한국 경기도 안산시를 방문하고(나카지마 히사토)

 

위 그림 출처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http://sewolho416.org/3910)입니다.

저자 의도와 별개로 블로그 편집자가 가져왔음을 알려드립니다.


 

세월호 「참사」의 기록·추도·기억

― 한국 경기도 안산시를 방문하고

 

2015年2月17日 나카지마 히사토

 

 

  2014년 4월 16일, 인천발 제주도행 청해진해운 소속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 부근에서 전복되어 침몰, 그 때문에 승객·선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이 「세월호」의 전복·침몰에 대해 한국에서는 예상 밖에 발생한 불행한 일이라는 의미의 「사고」가 아니라 「사건」 혹은 「참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이야기되고 있다. 꽤나 예전부터 진행된 선박업의 규제완화·아웃소싱化는 선박개조나 적재량, 피난훈련 등, 모든 면에서의 안전관리를 무시하게 하여 「세월호」의 전복·침몰로 이어졌다. 또한 「세월호」 전복·침몰 당시 박 대통령 자신이 범한 초기대응의 지체와 이후 이루어진 구출작업의 혼란은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빠뜨리게 되었다. 이 상황을 증폭시킨 것은 각 매스컴의 보도로 정부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여 중대한 오보를 하거나 생존자 및 유족의 신경을 건드리는 보도를 행했다. 원래 「교통사고」였던 것이 「사건」 혹은 「참사」로 바뀐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은 생방송으로 세월호의 침몰을 직접 보고, 국가의 무능함과 개인의 무력함을 동시에 느끼고 말았다」(역사문제연구소·아시아민중사연구회 편, [국제학술회의 새로운 민중사연구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2015년 2월, 비매품)는 감각을 낳게 되었다.

 

  내가 소속한 아시아민중사연구회의 멤버는 국제학술회의의 일환으로 한국의 역사문제연구소 멤버와 함께 2015년 2월 9일 「세월호」 참사로 다수의 고등학생 희생자가 나온 경기도 안산시를 방문했다. 세월호의 승객·승무원 총수는 476명인데, 그 중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던 안산시의 단원고등학교(2학년생) 학생이 325명, 인솔교사가 14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 참사로 고등학생 246명, 인솔교사 9명이 사망하고 고등학생 4명, 인솔교사 2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생존자는 고등학생 75명, 인솔교사 3명에 불과하다. 4분의 3이 희생된 것이다. 또한, 일반승객은 104명 중 71명, 선원 중에서는 23명 중 18명이 생존했다. 생존자 쪽이 많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조된 학생들에 의하면 배가 기운 상황에서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잘못된 안내방송에 학생들은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많은 학생이 희생되었다」(역사문제연구소·아시아민중사연구회 편, 앞의 책)고 지적되고 있다.

 

  안산시에서는 세월호와 관계하여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가 운영하고 있는 「416기억저장소」, 단원고등학교,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이들 장소가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특히 「416기억저장소」와 단원고등학교는 똑같이 「고잔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같은 디자인의 다세대주택이 다수 건설되어 있었다. 안산시의 도시화는 1970년대 이후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단지 형성을 계기로 하고 있으며, 다세대주택 또한 그 일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이 주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은 지역의 젊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잃은 것에 대해 단순히 그들의 가족이나 반 친구들뿐만 아니라 지역 사람들 역시 슬퍼했다.

 

 

단원고등학교 주변의 다세대주택

 

  먼저 「416기억저장소」에 갔다. 이 「416기억저장소」는 상점 등이 입거하고 있는 2층 건물 안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사무소였다. 한편 이후 창고 등을 확보할 것이라고 한다. 벽 한 면에는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이상자가 쌓여 있었다. 전시 공간 쪽의 사진을 여기에 게재한다. 이 전시 공간에 장식되어 있는 그림도 희생자 중 한 사람으로서 화가를 목표로 했던 고등학생이 그린 것이다.

 

 

416기억저장소

 

  이 「416기억저장소」는 「세월호」와 관련된 민간 기록센터로 세월호 유족을 위한 공동체운동을 지향하고 있으며, 「정부주도의 공공기록과는 구별되어 시민 중심의 기록수집, 관리, 전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역사문제연구소·아시아민중사연구회 편, 앞의 책)고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모으려는 기록은 3종류이다. 첫 번째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관련된 기록이다. 유족들은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요망(要望)에 일부 따른 형태로 작년 11월 7일 「4·16 세월호 참사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특별법이 제정되어도 세월호를 인양할 자세를 보이지 않는 등, 현 정권은 진상규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유족들은 시위를 위해 광화문에서 단식 투쟁, 안산에서 참사현장인 진도까지 도보행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 등을 행하고 있다. 두 번째는 유족이나 시민이 이 「참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 예로 「참사」 당시 가족대기소가 설치되어 거기에서 가족들이 숙박했을 때 사용한 담요를 들고 있다. 세 번째가 희생자들의 유품이다.

 

  종이상자를 몇 개 열어 유품을 보여주었다. 희생자들인 고등학생 자신이 찍힌 사진·스티커 사진 등도 있었는데,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의복 중심의 유품 사진을 여기에 게재해 둔다. 한편 뒤에 찍혀 있는 종이상자 하나하나에 고등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유품이 들어 있다고 한다. 유품 수집은 개개의 가족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는 작업이기에 중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된 고등학생의 유품

 

식사를 한 후, 걸어서 단원고등학교로 향했다.

 

단원고등학교

 

  전술했듯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생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되었다. 2학년생들은 10개의 반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고등학생들은 기존의 교실에서는 도저히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다른 교실로 옮겼으며, 현재 사건 당시의 2학년 10개 교실이 「참사」 당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학년이 졸업할 때까지는 그대로 둔다고 한다. 즉 희생된 학생·교사의 책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10개의 교실은 희생된 학생·교사의 추도의 장이 되었다. 다음 사진을 봐주길 바란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

 

  이 사진에서는 하나의 교실일 뿐이지만, 10개의 교실 모두가 이러한 정경인 것이다. 한 교실에 열 명이 살아남으면 다행이고, 1~2명밖에 살아남을 수 없었던 반도 있다고 한다. 희생된 학생·교사의 책상에는 꽃, 과자, 사진, 메시지 등이 많이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도 곧잘 교통사고나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아이의 사망현장에 꽃이나 과자 등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교실 전체가 이러한 상황이 된 것이다. 더욱이 그런 교실이 10개나 있다.

 

  각각의 책상을 보면, 놓인 물건이 획일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꽃도 각각 다르다. 어느 곳에는 사진이 놓여 있고, 어느 곳에는 메시지가 있으며, 그림이 놓인 곳도 있고, 책이나 노트가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이것은 희생된 고등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성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희생된 고등학생들에게는 각각, 물론 부모도 있었고 클럽활동(部活)이나 학생회(委員会) 등에서 선배·후배도 있었을 것이다. 각각의 개성을 가진 고등학생이 200명 이상 희생된 것이다.

 

  나는 한글을 전혀 읽을 수 없지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메시지의 내용을 들으니 다수가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구해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쓴 것이라 했다.

 

  책상 위뿐만 아니라 칠판이나 다른 곳에도 추도라고 생각되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칠판 위에는 대한민국 국기가 걸려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세월호」 참사의 비극성을 전해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추도」의 장이라고 표현했지만, 희생된 고등학생들과 살아남은 고등학생·가족들 쌍방의 「진혼」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단원고등학교를 나와, 우리들은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 분이 어느 다세대주택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기에도 학생 한 명(세월호 참사 희생자)이 살고 있었어요.

이전에 그의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이 마을을 떠나고 싶어요. 여기에는 자식의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어디를 가든 자식이 떠올라요. 어떻게 이 도시에 있을 수 있겠어요?」

나는 화를 냈어요.

「당신이 이 마을을 떠나면, 누가 그를 기억하겠어요?」

우리들은 부모와 그의 친구들 30명이서 울면서, 웃으면서 그의 생일잔치를 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 마을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 분은 「여기서(안산시) 유족 분들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의 목적 중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그 후, 큰 공원 안에 있는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도착했다. 여기는 정부의 「공식」적인 추도공간이다. 2014년 4월 29일 박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위로의 말을 걸었던 여성이 유족이 아니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물의를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 이 분향소는 가설(假設)이기는 하지만 체육관정도 되는 공간이다. 내부 촬영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행방불명자를 포함해 약 300명의 희생자 사진이 걸려 있고, 한 가운에 「분향장」이 있었다. 「416기록저장소」의 유품이나 단원고등학교 학생·교사 각각의 책상은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확실히 살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는 이 참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알 수는 있었지만, 희생자 각각의 개성은 「집단」 속으로 매몰되어 버린 인상을 받았다. 합동분향소 근무자의 의례적인 대응도 맞물려 사적인 「기억」과 공적인 「추도」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하지만 이른바 정부의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안에서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는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전국 규모로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추구를 요구하는 서명을 모으고 있는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내부에서도 같은 서명을 받고 있음을 인지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합동분향소 영역 안에 조립식 사무소가 몇 군데 있고, 거기에서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는 정부 측과 대치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전술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을 이 조립식 사무소 안에 소장하고도 있었다. 이 사무소 안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의 활동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바 「공적인 위령공간」을 점거하고 자주적인 활동의 장을 형성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합동분향소 안의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측 활동거점

 

  또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측은 이곳에 희생된 고등학생들의 어머니가 자수 등을 하며 치유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었다. 희생된 고등학생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배지를 받았기에 여기에 소개해 둔다. 「416」이라는 숫자와 「꽃」이 자수되어 있다. 이 배지도 「진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희생자 어머니가 손수 만든 배지

  마지막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록의 승리자야말로 최후의 승리자」라고.

 

  안산시를 방문하고 단순히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만이 아닌 역사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다양한 감개(感慨)를 느꼈다.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그때 국가나 매스컴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이 사실과정을 실증적으로 추구하고,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면서 그 후의 사회운영으로 연결해 가는 것은 실증주의적 역사연구의 과제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치의 과제이기도 하다. 정권이나 매스컴 측의 은폐공작 등을 배제하면서 가능한 한 기록에 근거해 실증적으로, 합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세월호 참사의 사실과정을 분석한다는 것은 실증주의적 과학―학술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치―사회운동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전술한 「기록의 승리자야말로 최후의 승리자이다」라는 말은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증적, 객관적으로 사실과정을 분석한다는 실증주의적 역사연구―정치의 과제는 다른 한편으로 희생된 고등학생들과 그들을 잃은, 살아남은 고등학생들, 가족들, 지역 사람들을 「진혼」한다는 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이야기했다. 희생자를 추도하고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간다는 것은 희생자들을 「진혼」하는 동시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희생자들의 소중한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러한 희생을 강제한 자들의 소행을 실증적으로 추급하는 동기를 고양시켜 가게 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한정하지 않고, 큰 역사적 사건 ― 8.15이든 3.11이든 상관없지만 ― 에는 희생자는 아니지만 그 일로 인생이 바뀌어버린 직접적인 당사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 각각의 개성은 본래 「집단」으로 회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뿐만 아니라 가족·친구·지역 등,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인생 또한 존재하고 있다. 큰 역사적 사건을 사후적으로 서술할 때에 무시되는, 이 사람들, 이 민중들의 생각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과정을 실증적으로 추급하는 영위(營爲)의 원동력이 되어 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역사의식」 형성의 시작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현대의 일본사회는 어떨까. 물론 이러한 의식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을 완전히 지워버리도록 일어난 일을 잊게 하여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2월 2일 전송한 인터넷기사 「【西論】 「“한중에 기대”하는 외교」의 어리석음…일본이 「가야할 길」은 신화로 배우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물에 흘려버리다」라는 일본인의 지혜도 여기(황천에서 귀환한 이자나기의 목욕재계―인용자 주)에서 태어났다. 재앙이나 원한에 단락을 짓고, 다시 태어난 듯한 청신(淸新)한 마음과 몸으로 새로운 세월을 맞이한다.

재생의 지혜는 일본인의 깨끗함을 낳았다. 좋은 예는 작년 온타케산(御嶽山)의 행방불명자 수색을 가을이 깊어가자 중단했을 때 가족의 대응일 것이다. 위령의 꽃다발을 바치며 봄에 마중하러 오겠다고 맹세하고, 경찰이나 소방, 자위대 등 수색대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하산했다. 숙박하고 있던 공공시설에 이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가족도 있었다.

이것이 이웃나라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사고에서 행방불명자의 수색 중지가 결정된 것이 약 7개월 후인 작년 11월. 행방불명자 9명의 가족은 항의하여 대기 장소인 체육관에서 계속 숙박했다. 그 고장에서 비워달라는 요구의 목소리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怨)」의 국체(國柄) 그 자체의 반응이었다.

http://www.sankei.com/west/news/150129/wst1501290008-n1.html

 

  애초에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비교하는 것이 어떨지 생각되지만…. 여기에서의 문제는 슬픔, 추도, 진상규명, 책임의 소재, 이후의 과제 등, 「역사」 의식의 원류가 될 수 있을 것을 모두 「물에 흘려버리고」,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는 산케이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기기(記紀)라는 「신화적 역사」로 정당화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공공시설에 이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는 동조의식을 칭송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책임문제 ― 식민지, 전쟁,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이슬람」 인질살해 등 ― 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 대부분 모르는 것뿐이고 메모를 하지 않고 기억만으로 써서 사실오인 등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있다면 그때그때 정정해 가고자 한다.

 

* 희생자 등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유영(遺影)이나 메시지를 직접 찍은 사진의 게재는 피했다. 다만, 「진혼」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최소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 글은 나카지마 히사토 선생님의 블로그 東京の 「現在」から 「歴史」 = 「過去」を読み解く ― Past and Present(https://tokyopastpresent.wordpress.com)에 실린 글로서 필자의 동의하에 전문을 번역하였습니다.